미움과 존엄

우유부단함 예찬*잡담

by 낭만민네이션

순간순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다가 보면, 내 자신이 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황에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온 것 같은 결과를 만날 때 드는 생각 말이다. 아는 것으로 인간을 판단하거나, 행한것으로 인간을 종합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감정으로 인간을 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인상 하나로 감정을 정하고 그 감정을 흔히 첫인상이라고 하면서 '직관'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순간, 나는 저 사람이 그냥 싫더라'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정당화되는데는 정말 3초도 안 걸릴 때가 있다.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판단은 아주 짧지만 그 판단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의 인생에서는 저런 사람을 수백명은 만나보았거나, 몇시간 이상을 저런 인간과 지내면서 싫어지는 감정의 골이 생긴 것일 테니깐. 불현듯, 내가 왜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지라고 느꼈다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난 왜 미움을 사고 있는거지라는 의아함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써 본다.




12살인 친척동생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응 오빠! 그 애는 남자들한테 꼬리를 친단 말야! 정말 밥맛이야!" 다른 아이들보다 언어적 감수성이 풍부한 친적동생은 이런 판단을 툭 던지고서 "엄마는 내가 불편해 한다는 것을 생각도 안해본거야?"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점점 탄생의 순간과 멀어지면서 더더욱 생명이 꽃피우는 각각의 경우에 대한 찬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친척동생의 감수성에 경탄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혹시 남자한테 꼬리친다라는 생각을 어디서 들은거야? 다른 나라에서는 남자한테 꼬리친다는게 나쁜게 아닐수도 있고, 밥맛이 아니라 좋은 감정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이렇게 이야기하자 친척동생은 나역시 그 밥맛인 아이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듯이 "아 몰라! 암튼 걔는 밥맛이야!"라면서 앞으로 가 버린다. 그 후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 한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각이 머릿속에 남았다. 감정의 골은 쌓이면 잘 안 비워진다. 그리고 감정의 테두리, 감정의 방향성은 항상 어디선가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미디어가 되었든지, 부모님이 되었든지, 친구들이 되었든지. 우리는 계속해서 어떤 감정의 골을 만들어가고 있다. 친척동생이 표현된 것 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먼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골격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대화를 하다가 보면, '저 사람은 나에 대한 배려가 없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나를 깔보거나 혹은 하대하거나, 없는 사람취급하거나, 있으나 마나한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매우 많은 감정이 폭발한다. '나 역시 그렇게 해버릴까? 아니면 그냥 무시해 버릴까? 복수를 해줄까?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까?'라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고, '반대로 음 그래도 사랑을 실천해보자. 조금 더 사랑해보자.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면서 자기방어기제를 선한방식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사람에게는 '아! 저 사람은 마음의 병이 있구나'라면서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편한대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밥맛인간들이 점점 인생에 쌓여간다는 것과 함께, 나 역시 밥맛인간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서 나를 이해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게 당연한 이치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기는 커녕 내 할일도 바쁜 때가 많다. 사람을 미워하기로는 정말 너무나 쉬운일이라서 굳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일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순간은 다르겠지만 나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할 때 그 존엄을 느낀다. 그 사람의 존엄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전해지는 대상의 존엄까지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이 존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대로 인간이 존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때는 사랑받지 못할 때,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인 듯하다. 감정없이 대한다거나, 일부러 그 사람을 깍아 내릴려고 한다거나. 이렇게 쓰고 있는 나의 심정은 나역시 매번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씁쓸하다고나 할까? 암튼 나는 그렇다. 누군가 나를 미워할 때 나의 존엄도 사라지지만 그 사람의 존엄도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인간이 선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순간의 사랑없음'이 만들어 낸 선택이 그 사람이 되고, 나와 그사람의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곧 내 안에 사랑이 있을까?'라는 고민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매번 밝히지만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서 사랑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스스로만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겠지만, 나의 무책임 혹은 사랑없음으로 피해나 무시를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까지 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랑없이 행동했을 때 나의 존엄이 무너지면서 상대방의 존엄도 무너지를 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나의 존엄을 무시할 때 내 안에 사랑이 어느정도인가이다.




사랑이 충분히 있을 때는 그 사람이 가진 미움을 받아서 나름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고민하고 사랑으로 대하면서 존엄을 회복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내 안의 어떤 존재를 본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내가 미움을 당할 때 그대로 미워하는 경우를 본 사람들은 반대로 내 안에 다른 존재를 본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느끼지 못한 다른 사람말이다. 못되고, 악하고, 별로인 사람말이다. 이것은 잡담이라서 산으로 가다가 바다로 가고 있다. 그러나 잡단이라서 이렇게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 생각을 말로 적고 있기는 하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의미에서는 마르셀푸르스트와 같다고 합리화를 시켜본다. 아무튼 나는 사랑이 충분히 담겨 있는 상태에서는 미움도 존엄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많이 경험해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굳이 그렇게 안되는 사람들에게 머라고 나무라지 말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말이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쓰는 순간 text가 되면서 내가 가진 매순간, 영원의 현상인 context는 내가 쓴 text를 계속해서 생각나게 하겠지 않나? 그래서 내가 미움을 당할 때, 미워할 할 때 나를 제정신 차리게 해 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잡담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미움이 난무하는 상황이 싫다. 그리고 그것을 신뢰의 차원에서 풀어보고도 싶다. 한가지는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말이다.




나는 사실 책을 읽을 때 책 전체를 읽지 않는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도 있지만, 한페이지만 읽어도 생각폭탄이 터져서 많이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보통은 핵심만 읽거나 소설 같은 경우 인상적인 부분만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책 들 중에 특별히 이미 제목에서부터 맘에 안들지만 첫 문단이 너무 맘에 들어서 작가를 사랑하게 된 경우의 소설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가 그 책인데 앞 부분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한 말이 항상 나의 귀에 웅성거린다. "누군가를 판단하려거든,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거라" 대충 이런 느낌인데, 그 다음에 주인공의 태도가 바뀐 것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우유부단한 성격이 되었다'라고 나온다. 아 정말 피츠제럴드의 재치는 천재스럽다. 맞다. 누군가에 대해서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우유부단함을 기꺼이 바보처럼 꺼내는 행동을 통해서 나는 누군가의 미움에서도, 누군가를 미워해야만 하는 직성에서도 어느정도의 낭만과 여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 긴 잡담에서 핵심을 뽑으라면 바로 이 한 문장일게다. 아무튼 나는 더 잡담을 하고 싶다. 이렇게 우유부단함이 주는 단점은 다른 사람들고 부터 핀잔과 함께 질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장점은 진짜로 해보면 알겠지만, 진짜로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신기하게 이게 습관이 되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나, 뒷담화를 할 때도 왕따를 당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다른 사람은 다 뒷담화를 하고 있는데 나는 멍 때리고 있는 듯이 보이니깐 말이다.




현상학을 좋아한다. 머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이란 건 어렵지 않다. 생각을 표현하거나 구체화하거나 혹은 체계화하거나 추상화한 것인데, 그건 각자의 swag에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뿐, 철학 자체는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현상학은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현상을 직시하는 것이다. 두가지 재료와 도구로 말이다. 바로 의식과 시선이다. 여기서 이 두가지 도구의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지향성'이다. 의식과 시건은 반드시 지향성이 있고, 멈출수가 없다. 생각은 절대로 멈출수가 없고, 시간은 사팔뚝이가 되더라도 멈출수가 없다. 이 두가지 도구로 지향성을 가지고 현상을 보기 시작하면 대상의 특징이 잡히고, 그 특징들의 어떤 공통점을 찾게 되어 있다. 그게 후설이 되거나, 하이데거가 되거나, 한나아렌트가 되거나 야스퍼스가 된다. 아무튼 이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유부단함에서 얻게 되는 현상학적 특징이다. 우유부단함은 지향성 자체에 바리케이트를 치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이 멈추고, 시선이 꼬인다. 그럼 어떻게 되냐면 감정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지고, 이런 어려움이 결국 현실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미워해야만 하는 대상에 대해서 순간순간 소지오패스처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만, 즐거운 점은 드디어 여유로운 공간이 생겨서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 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과 생각이 자리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날마다 다른 순간마다 다른 방식의 형식이 나온다. 좋은 건 마음이 항상 새롭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고, 새로운 판단으로 현실이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주변에 나를 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큰 신뢰를 잃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정말 많기는 하다 생각해 보니깐. 이것을 그냥 b혈액형을 가진 남자들의 변덕스러운 특징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편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철학적으로는 이런 지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굳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으로 대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해보면 알겠지만, 먼저는 그 사람이 나를 더 미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오래지속되면 결국 나를 미워하던 사람이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내게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니깐 말이다. 여기에 나의 행동변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이건 다음 잡담에서) 중요한 건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그 미움을 받고 있는가이다. 그럼 바뀐다고 확신한다. 나의 존엄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그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고, 결국에는 서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런 글을 쓰면서 다짐을 하는 중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해야지, 그 전에 나는 먼저 우유부단함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요즘 너무 내 자신이 빠른 판단력과 냉철한 인식으로 현상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처음으로, 우유부단함으로 돌아가보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날마다 다른 선택을 해보자. 그럼 점점 아무것도 바뀌지는 않았지만 먼가 세상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 군인으로 총을 들고 자신을 지키고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의 마음에서 예술가가 되어 나의 삶에도 멋스러운 구름 한점을 그리겠지. 다른 사람 캔버스에도 풍성한 산나무 몇그루 려주겠지 않나


minnaito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