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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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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22. 2017

미래와 희망

오늘! 여기!하나님나라

우리가 미래를 어떤 식으로

그리느냐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달라지고


그날그날 이루어지는 행위의 윤곽과

사고의 품격이 결정된다


미래관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무력하게 살게 마련이다


수 많은 정서적, 정신적 질환과 대부분의 자살이

'미래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언제나

강력하고 분명한 미래관이었다


그 미래관의 가장 구체적인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믿음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분께서 승천하신 날부터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다


데살리니가 전후서 머릿말_메시지 성경




그가 주저 제3권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2003)>(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5)이란 주제로 두꺼운 책을 내어놓았을 때는 그 작업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써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Surprised by Hope, 2007)>(IVP, 2009)가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더불어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Evil and the Justice of God, 2006)>(IVP, 2008)가 다루고 있는 주제도 제대로 조명을 받게 된다. 이 논의는 기독교권에 흔한 (휴거와 재림의 시기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나, 전통적인 의미의 ‘영원히 불타는 지옥’을 심판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 등에 급제동을 걸면서 전향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 정의와 평화를 위한 헌신 등을 하나님 나라의 약속으로 보게 하는 신앙적 안목을 열어주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 책들을 읽고 자신의 종말관이 바뀌었다고 호평을 했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 마커스 보그와 공저한 <예수의 의미(The Meaning of Jesus: Two Visions, 1999)>(한국기독교연구소, 2001)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예수의 의미를 비교 서술한 흥미로운 기획이다.


톰 라이트 읽기를 위한 지도_양희송 (청어람 대표기획자)


칭의문제를 다룬 톰라이트의 저작




1965년 몰트만은 카르트의 비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종말론을 각각 비판하고 대신 미래 지향적 종말론을 제창함으로써 '희망의 신학'이란 용어가 생겨났다. 계시에 있어서 역사의 위치를 재강조하고 미래의 차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종말론적 신학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으로서가 아닌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자기의 미래 지향적 종말론의 근거와 열쇠를 하나님의 본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은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완료형이나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서 오직 희망과 약속 가운데서 현재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바로 약속과 희망이기 때문에 참된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회 개혁의 투사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그는 모든 신앙 원리를 미래에 집중시킴으로써 점진적 구원사를 무시해 버린다. 부활의 참된 역사성을 부인하고 폭력적인 혁명의 사용을 정당화한다. 몰트만의 급진적이고 좌경적인 신학은 한 동안 유럽에 뿐만 아니라 개발 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아 왔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그의 신학의 성경적 신학적 기반이 한계에 부딪치게 됨으로써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희망의 신학_위르겐 몰트만(KCM.KR)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상황은 항상 과거를 재해석하게 만들기에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서


과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미래에 대한 예감이 달라진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인 부분spirituality인데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 존재론ontalogy를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젠가 인생의 한번쯤은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는 여행을 한다


그것이 죽기 바로 직전이든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기이든 말이다


대부분은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는

살며시 혹은 과감하게 답찾기를 무시하고는


열심히 목적을 설정하고 살아가다가

문득 인생의 거대한 산과 만나게 된다


그 때 드는 생각은 시간과 존재, 시간과 타자,

윤리와 무한'과 같은 현상학적 논재들이다


현상은 항상 본질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본질이 어떠함을 규정해야만


현상의 원리와 이치 그리고

실제로 돌아가는 힘을 파악할 수 있다




최근들어 더더욱 새로운 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에서는 논의가 깊어지고 있다


그 논의는 기존의 가지고 있던 기독교 사상의

뿌리를 흔드는 '부활'이라는 주제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주제로 한국교회의 상황은

거의 끝을 달리고 있는 것 같다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가 없거나

당위로 예상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쪽에서는 구조선 신앙과 같이

구원 이후에는 전도만 남았다라거나


우리는 불타 없어지는 이 세상에서

이제 천국으로 올라갈꺼라는 사상이 난무하고


인생의 목적이 오직 이 세상을 빨리 뜨는

무엇인가 도피성 신학과 신앙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현상을 보면


전도를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고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음에도 나는 아침마다 불안하다


무엇이 나를 확정해줄까

무엇이 나를 살게 만들까


무엇이 나를 열정적이게 만들고

무엇이 기대를 증폭시킬까


내일, 나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기대되는 미래일까?




그 동안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주어지는 선물로

부활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잘 생각해보면

'식스센스'의 브루스윌리스가 경험한 것처럼


오히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사람들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수식어로


대충 현재를 얼버무려 놓고는

사리진 윤리를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영성이 아니라

미래에 어딘가에 기대거나


과거의 '구원의 확신'에 기대어서

현재의 윤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기업이나 기독교 학교들도

항상 현재를 사는 영성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부활'에 대해서는 더더욱 톨스토이를 제외하고는

논의하지 않고 집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현재에서는 더더욱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삶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완성'의 입장에서

구속 이후 완성까지 부활의 삶은 계속해서


현재를 변화시키고 완성해가고 있었고

겨자씨같은 하나님나라가 날마다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당장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한다


천국과 이 세상이 분리된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였고, 결국 이 지구는 재창조되는 과정이라면


이 세상을 떠나서, 버리고서 어디론가

탈주하려는 신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나라를

맛 본 사람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고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고


사랑이 가장 먼저된 인생의 꼭지점을 찍고

날마다 기쁨은 늘어갔다


굳이 톰라이트, 몰트만, 유진피터슨의 논의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피부로 느껴지는 진실

을 넘은 진리였다, 지금도 진리이다




나는 오늘을 희망으로 산다

희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이미 부활한 몸, 부활한 정신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현재가

오늘 나의 미래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로 존재의 근원을 삼는다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쁨! 이 즐거움!

이 무한한 사랑 안에서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


현실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다스림이 미치기까지


나는 오늘도 이웃을 만나서 사랑하고

구조화된 허물을 밀쳐내고 새로운 구조를 추구한다


삶은 계속 변화되어야 하고

인간의 잠재력은 신의 영역까지 확장된다


선포인듯 하지만 실재의 경험이고

지금 이 순간 살결들이 말해주는 증거이다




오늘! 단 한명이라도!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면!


나는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으며

이웃을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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