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레비나스_철학아카데미
타자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한다
타자가 무한이라면 나도 무한이다
타자를 살해하지 않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은 신의 계시이고
타자에게서 초월성을 발견한다
하이데거를 뒤집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한나아렌트와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완전 다르다
타자들을 존재자인 개별자에서 살려낸 레비나스
타자들의 조건을 보편자의 자리로 격상시킨 아렌트
아직 현실로 꺼내기 전까지
나는 더 많는 고뇌로 하루하루를 보낼테다
20170721_철학아카데미
처음읽는 프랑스철학_김선하교수(감신대)
3장_엠마누엘 레비나스
들어가기
-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1906년 리투아니아의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 18세에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한 후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 나타난 직관 이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 단행복으로 출간된 이 논문을 통해 레비나스는 프랑스에 처음으로 현상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 하이데거가 스승이었으나, 하이데거의 전체성을 비판하면서 많은 글들을 썼다.
- 특히 1947년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중 포로 수용소에서 썼다.
- 1947년 '시간과 타자'는 장 발이 주관하던 철학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들을 한 권으로 묶었다.
- 헬레니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헤브라이즘의 철학적 번역을 통해 양자의 새로운 종합을 꾀하는 이 장대한 사유의 흐름들은 훗날 하나의 완결된 책의 형태로 집대성하게 된다.
- 레비나스는 국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전체성과 무한'이 1961년에 발간되었고 독창적인 철학자로 인정을 받는다.
- 1995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 오늘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존재, 존재자
- 존재자는 시공간 상에 개별적으로 있는 것들을 뜻한다. 즉 개별자를 뜻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개별자로서 타자를 보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의 근본구조인 '존재론 - 인식론 - 윤리론'을 비틀어서 '존재론 - 윤리론 - 인식론'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 존재는 이 모든 사물들의 본질이자 근거를 뜻한다.
- 파르메니데스와 더블어 그리스의 철학적 사변능력이 진일보하면서 존재라는 완전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물의 본질과 원리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 전통을 현대에서 부활시킨 사람이 하이데거이다.
- 하이데거는 존재는 만물이 생장하고 소멸하는 운동인 자연의 운행, 민족들의 흥망성쇠에 따른 역사의 흐름, 그리고 자연과 역사의 상호작용 등 삼라만상 전체를 주재하는 것의 이름이다.
- 인간은 이러한 존재에 대해서 이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언제나 이미 자연과 역사의 무한 연관 속에 내던져져 있는 인간은 좌표 위의 한 사물처럼 놓인 것이 아니라 무한한 존재의 운동에 휘말린 실존자로서 자신의 유한성에 고뇌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 타자
- 하이데거에게서는 항상 전체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전체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 레비나스는 실존철학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 무의미를 초월하고자 현상학을 넘어서는 시도를 한다.
- 1947년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이러한 전체성을 넘어서는 존재들이 어떻게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가를 고민했다.
- 전쟁, 폭력, 살인, 죽음과 같은 것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그것을 행해도 별다른 윤리적인 추궁을 할 수 업음을 이야기한다.
- 결국 이러한 윤리'에서 타자를 향한 주체적 자아가 태어나는 것이 레비나스의 철학이다.
- 타자에 대한 무한 윤리의 탄생, 그것은 있음에서 무한한 타자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존재, 있음
- 레비나스에게 주체의 발견은 '있음 il y a'였다.
- 주체는 항상 자신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순간 불면에 빠진다.
- 우리는 항상 어디가에 있고, 존재하고, 그것을 인식하고, 그에 맞춰서 살아간다.
- 이러한 존재가 자신의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이다.
- 이렇게 잠을 자는 시간은 무의식의 공간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공간에서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이데거, 전체성
-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는 사물 -도구적 사용'의 도식에서는 존재들의 층위가 결정된다.
-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라는 염려로 부터 출발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불안하다.
-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를 '사용'의 가치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향유jouissance'라는 개념으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 사물과의 관계가 염려로 부터 만들어진 네트워킹이 아니라, 만족과 향유와 욕망을 충족하는 대상으로 관계맺는다는 것이다.
- 염려로 세상이 구성되는 게 아니라, 향유로 구성된다는 것에서 '타자'의 존재가 보인다.
- 향유를 할수 있는 존재들의 세계는 생활세계, 요소, 세계, 무규정적, 형식없는 내용으로 표현된다.
신화적 반응, 있음
- 향유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처음의 '그저 있음'이라는 존재로 상태로 빠지는가?
- 얼굴없는신들이 등장하는 심연, 즉 인간의 마음 속에서 신화적인 반응을 통해서 인간의 주체성을 탈곡된다.
- 따라서 신이 사라지는 순간, 신들의 얼굴이 사라지는 순간, 무신론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로 '염려'가 발생한다.
거주, 노동
- 인간은 그저 있음'이라는 상황을 탈피하고자 신화적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거주하고 노동을 한다.
- 자기지배에 대한 확대로 노동을 통해서 산물을 획득하고 자기자신을 확증한다.
타인, 얼굴
- 타자의 얼굴은 무한으로 계시를 준다.
- 하이데거의 논리가 세계의 지평을 동일자의 논리로 구성하고 그것을 전체성으로 굳어 버렸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러 그 반대로 세계의 지평을 타자의 세계로 열어 놓는다.
- 타인의 존재는 자기초탈, 무한의 개념을 계시하고, 물론 주체는 상처받을 수 있지만 거기서 주체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 여기서 바로 타자의 얼굴은 보는 순간 윤리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타자의 얼굴은 항상 무한의 영역이기 때문에,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도덕적인 명령을 준다고 할 수 있다.
- 제 3자의 얼굴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존재욕구'라고 볼 수도 있다.
- 결국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의 원천이면서도 세계를 존재하게 만드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 죽음
- 타자의 얼굴이 사라지는 지점, 바로 죽음의 순간에서 불안이 시작된다.
- 타자의 죽음, 얼굴이 없어지는 지점에서 자아의 죽음도 찾아오기 때문이다.
- 타자를 죽이지 말라! 혹은 타자의 얼굴을 지우지 말라!라는 명령은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한 명령이기도 하다.
- 타자를 죽이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방식이 결국은 자신이 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 가능성
- 타자를 정말로 사랑할 수 있을까? 타자를 타자로 놓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타자는 미래를 여는 무한성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 사랑이라는 것은 타자와 나의 관계를 열어주는 것이다.
- 타자와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부부는 무촌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의 몸이 된다.
- 그 하나의 몸에서 새로운 타자가 태어난다. 바로 자녀들이다. 이러한 자녀들은 미래를 열어주는 타자의 탄생이다.
- 우리가 서로 타자와 사랑을 나눌 때 먼저는 에로스에서 감지되는 신비를 경험한다. 먼저 애무를 통해서 타자의 신비를 경험하지만 우리는 매번 만질 때마다 타자의 존재를 신비로, 더욱 신비로 경험하게 된다.
- 이부분에서는 '몸의 철학자' 퐁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의 대립이라는 측면은 별로 레비나스에게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레비나스, 자아
- 레비나스 철학의 시작은 현상학자들과 마찬자리라고 볼 수 있다.
- 세계 내 존재로서 독립성과 자립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자아의 주체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탈무드의 비유'와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다.
- 타자로부터 내게 요청되는 도덕적인 요청은 항상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 마찬가지로 가인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는 말은 타자들에게는 마찬가지로 타자로 하여금 나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 되면서 서로 죽이지 않게되는 효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 샤르트르의 '타자의 시선'과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샤르트르가 타자의 시선으로 부터 자신이 무화되기 때문에 매우 부담스럽고 심지어 공포스러웠던 반면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의 영역으로 나를 인도해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 샤르트르와 레비나스는 근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다르다. 결국은 무신론과 유일신론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근본하고 있는 토대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고, 자기스스로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된다. 결국 자신의 존재는 외재성, 초월성, 계시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외부로 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레비나스에게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는 타자의 존재가 근거를 잃게 되고, 타자의 존재가 불안해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타자의 욕망, 타자의 계시 역시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샤르트르에게는 '너'가 없고, 레비나스에게는 '나'가 없다. 서로 먼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것에 대한 단초는 인식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 즉 자유의지의 주체성을 이야기한 리쾨르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타자를 없음으로 볼 것인가? 혹은 타자를 무한으로 볼 것인가? 이것은 인식론의 지점이다. 타자'가 있음 자체는 존재론의 지점이다. 이제 타자에게 내가 어떻게 할 것은가는 '윤리론'의 측면이다.
- '있다'라는 존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보편자 속에 또는 전체성 속에 갖혀버린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서 계시가, 미래가, 신비가 열어 놓은 개방성으로 나아가는 개별자로서 '타자의 얼굴'은 레비나스에게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김춘수의 꽃에서 나오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구절과 연결되어 있다. 인식되어야만 존재자가 되는 것이 하이데거의 전체성 담론이라면, 불러주기 이전에 그러니깐 인식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자로 존재하는 사물과 타자의 존재는 완전히 예상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이 전체성이라면,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찾아내는 것이 타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질문
- 칸트와 레비나스, 칸트와 존 롤스의 연결고리는 많은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않는가?
- 칸트에게서는 완전한 목적을 가진 자아가 존재하고 그 존재로 부터 목적의 왕국을 구성해 낸다면, 레비나스는 완전한 신비와 계시인 타자로 부터 자아를 형성되는 방식이 존재한다.
- 칸트가 가지고 있는 실천이성의 당위성을 현실화하면서 존 롤스는 무지의 베일을 만들고 차등성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레비나스와 존롤스의 관계를 어떻게 보게 될 것인가? 타인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를 집중해서 고민하면 타자의존재가 탄생한다는 측면에서는 '무지의 베일'에서는 타자의 얼굴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