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아카데미_들뢰즈
20170824_철학아카데미
처음읽는 프랑스현대철학_김선하 교수
들뢰즈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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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들뢰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로부터 영원회귀에 이르는 니체, 그리고 시간과 직관에 대한 베르그송까지 자신의 철학을 중심으로 잡고 있다. 바로 선험적 주체를 말하는 칸트, 진리를 간파하는 헤겔을 부정하면서 초월성 자체를 가진 철학자와 사상을 모두 배격한다. 초월성이 사라진 내재성의 공간에 시간이 무한히 반복하는 영원회귀라는 판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판에서 오직 생성에 의해서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생성은 베르그송에 의해서 '생성철학 혹은 생철학'으로 발전한다. 들뢰즈는 비인간주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해체시킨다.
베르그송, 생철학
베르그송은 생명과 지속을 이야기 한다. 기하학적인 공간과 질량, 수학을 가지고서 인식론의 기본을 다진다. 생명이라는 것은 운동, 변화, 지속, 직관, 차이, 기억과 연계되는 과정이다. 생명은 변화하고자하는 경향이고 그 자체가 사실은 차이화의 과정이다. 차이를 무한히 수용하는 일원론, 즉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차원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열린전체는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는 이러한 일원론에서 나온다. 시간 속의 차이, 시간으로서의 차이는 시간이 자기를 차이화해 가는 잠재성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자연주의적 유물론이 바로 이것인데, 그것은 아리스테텔레스가 말하는 잠재태와 현실태의 개념에서 유래한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 현실태로 드러난 것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잠재태 안에서 하나의 근원에서 현실태로 변화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를 친다고 할 때 우리는 절대로 같은 음을 낼 수 없다. 그것은 피아노 현을 때리는 망치의 강도와 속도가 항상 다르기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멈춰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생물은 항상 차이를 드러내는 차이화의 과정에 있다.
스피노자, 욕망과 신체
생성으로서의 욕망은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이다. 무엇이 실체인가? 스피노자에게는 신은 곧 자연이었고, 자연은 곧 실체였다. 실체는 속성에, 속성은 양태에, 양태는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러서 실체와 정신은 하나이다. 모든 실체는 신을 내제하고 있고, 드러나는 양태들의 본질은 어떠한 하나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 그것이 바로 힘이다. 스피노자에게 힘potentia는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본질, 힘이 바로 생성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고, 본질은 속성과 같다. 실체는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을 통해서 자기 원인이 된다.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형성하는 것이다. 존재의 욕망은 항상 생산하려는 욕망이고, 이것은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esirante가 존재의 근본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욕망은 '코나투스CONATUS'라는 표현으로 스피노자가 사용한다. 힘에 있어서는 스피노자의 힘 개념을 방향과 정해진 것이 없는 니체의 힘의 방법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의 충동 개념도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기계'라는 개념과 연결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론적, 신학적, 변증법적 함의가 없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은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이다. 욕망이란 인칭들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때문이다. 욕망은 자기 합류하는 온갖 성질의 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한다.
고전물리학, 현대 물리학
고전물리학은 뉴턴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절대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거시적인 세계를 규정하였다. 반면에, 현대 물리학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절대라는 개념과 시간의 연계가 사라지고 양자물리학과 같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 애매모호해진다. 양자의 세계까지 들어가면 속도와 위치는 같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서 한가지만 측정할 수 있고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들뢰즈를 고전물리학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 절대 이해가 안된다. 현대물리학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오직 연결과 접속에 따라서 목적이 정해지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 신체
속도가 다른 무수한 미립자의 교착이 형성되는 구성, 관계로 이루어지고 다른 신체에 의해 촉발되는 힘으로서의 많은 정동으로 이루어진다. 기관보다도 훨씬 미세한 입자와 기능보다도 훨씬 불확정적인 운동을 한다. 신체를 구성, 재구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관없는 신체 혹은 실체를 들뢰즈는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라고 한다. 결합의 구도plan a consistance는 보통 내재성의 장이라고 한다. 무엇인가가 촉발되는 장이 있는데 이러한 장에서 무엇들이 결합하여 어떤 의미를 낸다는 것이다. 서로 인접하는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를 통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은 리비도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의 힘은 신적인 힘이 되고 그것을 누멘이라고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목표는 들뢰즈가 읽었을 때는 유동하는 신체가 다른 여러가지 신체의 구성과 관계를 맺어서 활발하게 서로 촉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넓고 보다 강한 하나의 면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는 국가, 사회도 하나의 기관없는 신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기관없는 신체라고 할 수 있다.
니체, 긍정과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최고의 긍정'이면서 존재와 동일자의 되돌아옴이 아닌 생성과 차이의 되돌아 옴이다. 우연의 긍정은 운명에의 사랑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원회귀란 시간과 그 차원들의 종합이며, 다양성과 그의 재생산의 종합이며, 생성과 생성 안에서 긍정되는 존재의 종합이며, 이중적인 긍정의 종합이다.
존재, 욕망
라카에게서 욕망은 요구에서 욕구(생물학적 생존 욕구)를 뺀 것이다. 그러니깐 욕망은 생물학적인 욕구를 뺀 사회적인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자아를 뺀 타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존재의 욕망을 통해서 들뢰즈가 가지고 온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은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산의 욕망, 본직적으로 촉발하는 욕망을 가르킨다. 그러나 유기체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으로 기계로 보는 것이다.
들뢰즈, 앙띠오이디프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세계를 축소하고 파괴하고,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고 비판한다. 무의식은 제조하여 흐르도록 해야할 하나의 실체이고 정복해야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간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적인 어린 시절의 블록들을 가지고 '어린아이-되기'라는 블록들을 생산한다. 욕망의 대상. 욕망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발화 행위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발호행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니 어떤 주체를 표상하려고 하지 말고 배치의 프로그램을 짜라. 발화체를 덧코드화하지 말고 이 발화체들이 이른바 시니피앙 작용을 하는 거장들의 압제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라.
혁명, 욕망
혁명은 욕망의 배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욕망은 그 자체의 객관성의 흐름들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시니피앙 없는 기호들의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욕망은 언제나 더 많은 연결접속과 배치를 원하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오이디프스 콜플렉스는 아빠-엄마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고 법칙이며 문화로의 통로이다. 정신분석가는 한없는 체념을 가르치는 최후의 사제들이다. 공둉어가 되고자 하는 정신분석학의 야망과 언어학과 결연관계를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들뢰는 비판한다. 진실을 구성하고 지식과 권력의 유착하고 배치를 덧코드화하여 기성 질서의 요청에 부응하는 작업이 정신분석학이다. "당신들의 장소들, 배치들, 입자들과 하름들을 발견하고서도 그 판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만들 줄 모른다면 당신은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들뢰즈는 이야기한다. 배치라는 것은 혼자 만들 수 없다.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배치, 판
판의 구축은 개체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이다. 필연적으로 어떤 집단'이며 집합적 배치들, 이련의 사회적 생성들을 개입시킨다. 욕망은 전-인간적pre-human이며 삶은 욕망의 흐름이다. 삶의 초과excess가 억압의 원인이다. 인간의 몸들은 성적인 생성의 결과들, 삶의 작용자라기보다는 삶의 수레에 불과하다. 몸들을 생산하고 초과하는 욕망은 자유로운 흐름이며 창조적인 차이이자 생성이다.
소수자 윤리, 소수의 정치학
국가장치(알튀세르가 이야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는 모든형태의 흐름을 일정하게 조직해 통합적인 삶의 양태(기호체제들, 언표적 차원)를 만들어내는 배치이다. 전쟁기계들이란 국가 장치 바깥으로 끝없이 탈주해가는 무리들이다. 탈주선 긋기가 바로 전쟁기계이다. 창조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종류의 기계들이 전쟁기계들이다. 카프카의 글쓰기 기계, 뒤샹의 표현기계가 바로 그것이다.전쟁기계는 충돌지점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며, 창조적 파괴라고도 할 수 있다. 지표화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내면서, 새로운 배치들(대안적 삶의 모색, 제도권을 벗어나는 사유, 아방가르드적인 창장 등)을 창조한다. 이것은 노마드nomade 즉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유목주의nomadism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들을 새로운 배치 속에서 끊임없이 탈영토화시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가치로 기존의 것들의 동일성을 뒤흔들고 전복시킨다. 창조와 생성, 생산의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전쟁기계는 탈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변형시키는 파괴기계가 되고, 유목은 불모적인 방황으로 된다.
생성, 되기
생성(분자-되기, 동물-되기, 여자-되기, 소수자-되기, 아이-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은 새로운 다양체를 구성해가는 것이다. 분자적 생성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탈기관체 형성,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n개의 성이 된다. 윤리와 정치의 핵심은 새로운 존재들(개체들)을 새로운 배치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인 것이다. "혁명의 미래에 관한 질문은 안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따져서 이 질문은 어느 층위나 장소이건 사람들의 혁명가-되기에 관한 질문을 막기 위해서 제기된 것이 때문이다."
연결, 접속
connexion연접은 원시사회이다. 원시사회에서는 소규모적으로 일어나는 연결방식이다. disjonction이접은 전제군주제에서 주로 일어난다. 전제군주에 의해서 이전의 접속은 끊어지고 새로운 접속이 만들어진다. conjonction통접은 자본주의의 방식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통접의 한 형태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러한 통접을 더욱 가속화시킨다는 데 있다.
민네이션, 들뢰즈
들뢰즈를 처음 들었던 것은 대학교2학년 때였다. 그 당시에는 생각의 방법 중에 하나로 '바깥의 사고'를 하는 것이 들뢰즈의 사고라고 배웠다. 그 당시에는 들뢰즈는 이름 자체가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냥 아는척하기 딱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몇년이 지나고 나서 지금 내게는 들뢰즈가 현실을 바라보는 개념이 현실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왜 들뢰즈들뢰즈하는지 알 것 같다. 들뢰즈가 말하는 재영토화, 존재하는 힘, 차이와 반복, 천개의 고원, 리좀적 다양성 등등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양자역학과 현대물리학에 딱 맞는 개념이다. 오히려 들뢰즈이 철학이 과학을 만들어냈나 할 정도로 말이다. 만약에 들뢰즈가 보는 것이 진리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타난것이라고 한다면 들뢰즈의 관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 보니깐 사실은 자연의 생성과 인간의 생성의 공통점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작업처럼 보인다.
민네이션, 생각
역시 들뢰즈는 시작부터 현실의 판을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구조들을 깨버린다. 헤겔을 부숴버리는 차원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하면서 정신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 칸트를 부정하는 차원에서 인간이 가진 것은 선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생성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starting point를 현재로 잡는다. 그러니깐 재영토화를 큰 차원에서 진행하면서 탈 영토화를 먼저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영도화는 배치와 연결, 접속이면서 새로운 욕망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혁명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혁명은 결국 배치하기의 방법론이다.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가 결국은 어떻게 혁명을 가능케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판을 짠다는 것은 결국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는 역시 '구조주의'에 입각해서 정치적인 혁명-되기를 탈영토화-재영토화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프랙탈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국가도 사회도 하나의 신체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이 작성하고 있는 주제는 '바이오정치 - 오가닉정치 - 에코정치'에서 오가닉정치가 결국 바이오를 생성하고 에코를 구성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들뢰즈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회는 기계처럼 연결과 배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에서 욕망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시민사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의미에서 시민사회라는 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시장과 자본 그리고 시민과 사회의 대립이고 그것을 국가가 어떻게 기획하고 배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프랙탈'개념이다. 작은 단위에서도 큰 단위에서도 자기유도적 동일구조를 갖는 것을 말한다. 기관없는 신체는 사실은 프랙탈들의 흐름이다. 프랙탈들이 모여서 하나의 신체를 이룬다는 것이 바로 우리 신체의 세포들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