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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18. 2017

감시와 처벌

처음읽는 프랑스현대철학_미셸푸코

20170818_철학아카데미

처음읽는 현대프랑스철학_김선하 교수

미셸푸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들어가기


미셸푸코는 1926년 프랑스의 푸아티에서 태어났다. 1946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1950년 경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2~3년 후 탈당했다. 1955~1960년에는 스웨덴, 당시의 서독, 폴란드 등에서 프랑스대사관의 문화참사관, 프랑스 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1년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 '임상의학의 탄생'과 '레몽루셀', 1966년 '말과 사물', 1969년 '지식의 고고학'을 출간했다.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선출되었고, 1971년 취임 강연 '담론의 질서'를 간행했다. 이후 들뢰즈 등과 함께 '감옥에 관한 정보 그룹G.I.P'  운동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1975년 '감시와 처벌'을 출간했으며 1976년 이 책의 문제의식을 섹슈얼리티 문제로 확장한 '성의 역사' 시리즈 1권 '지식의 의지'를 발간했다.


푸코까지, 흐름


1960년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인류학, 알튀세르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언어학적 정신분석 등 구조주의적 사상의 도전으로 인하여, 의식적 주체를 강조하는 현상학과 무의식적 구조에 각기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구조주의 사상 간의 학술적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의 포스트철학으로 통칭되는 새로운 사상을 싹트게 한 기름진 토양이 되었다.


푸코, 구조주의


인간의 일상적 실천이 결코 개인의 의식적 작용에 따른 것이 아니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구조의 반영도 아니다. 역사적 시대마다 우리의 사물 인식을 일정한 방향으로 틀지어주는 시대고유의 무의식적 구조(에피스테메)가 있다. episteme는 인식구조라고도 부르고 무의식적이며, 불연속적인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문화'라는 것으로 통칭될 수 있다. 문화의 핵심은 지식의 전파, 이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권력과 연관되어 있다.


푸코, 핵심


푸코의 철학은 우리의 사유와 말과 행위의 밑바탕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나눔의 역학, 즉 존재론적 분절을 문제삼고자 한다. 한 사회의 나눔의 체계는 필연적으로 배제의 역학을 함축한다. 푸코는 이 배제의 역학을 통해 형성되는 타자들에 기본적인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타자를 다루되 그를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에서, 즉 담론의 형성과 변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탐구하는 프랑스의 메타과학적 전통에서 다루고자 한다. 메타과학적 담론은 그 기반에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깔려 있기 때문에 더욱 힘을 얻는다. 푸코는 타자들을 다루는 지식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메타과학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그 밑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나눔의 논리와 배제의 역학을 드러내고자 한다.


푸코사상, 네 변화 시기


- 실존주의 시기 : 광기의 역사

- 구조주의 시대 :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 권력론 시대 : 감시와 처벌(감옥의 탄생), 지식의 의지, - 성의 역사

- 자기와 윤리로 회기


1. 광기의 역사


광기의 역사, 문제설정


1650~1790년까지가 고전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푸코의 구분이다. 그 이전은 중세와 르네상스이고, 그 이후는 근대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가 ancient regime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제이며 계몽주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유사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던 시기이다. 푸코가 '어마어마한 감금'이라고 부르는 배제, 감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에 거대한 수용시설이 만들어지고, '이성, 도덕 및 사회질서의 상태를 바꾸려는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을 감금한다. '지체 부자유한 빈곤자, 곤궁한 노인, 거지, 게으른 자, 성병환자, 풍기문란자,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자의 부친, 공금을 횡령한 성직자 등' 광인은 다른 사회적 부적응자와 함께 격리 수용되었다. 이러한 배제, 격리를 소외라고 부르며, 소회의 의해서 '착란'이 생겨난다. 이러한 추방의 움직임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하나의 소외이며 착란의 고고학을 발굴하는 것이다. 이 배제를 이성에 의한 비이성의 배제로 이해하고 있다.

 

광기, 이성


광기란 언제나 '이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결코 그 자체로서 정의된 적은 없다. 광기란 언제나 이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합리성의 반대급부로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문화는 부정의 부정을 매개로 해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비추어 주는 거울을 요구한다. 중세 나병환자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을때 중세의 동일성ㅇ르 가능하게 해주던 타자가 소멸되기 시작했을 때, 그 역할을 대신할 또 하나의 희생양이 요구되었다.


병원, 광기


병원이라는 장소의 정의는 고전시대의 질서 속에서 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 사람들에 대해 행해졌으며 합리성에 대한 정의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하나의 혼재공간을 형성했다. 의사들이란 신체를 다루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교화하고 교정하는 정신적 교정자들이다. 의학전문가가 아닌 국가 공문원들, 고전시대의 질서를 이탈한 사람등를 교화하는 종교적 사제들, 교정을 위해 낙인 및 화형대와 감방 및 지하감동을 관리하는 관리들도 의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병원을 대표로 하는 수용소들의 탄생은 17세기의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감금의 주요 목적들 중의 하나는 노동하지 않는 자들을 모아 노동을 창출하려는데 있었다. 더 근본적인 동인은 17세기 부르주아 사회가 성리되었을 때 형성된 부르주아적 도덕 및 그 도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합리성의 개념이다. 즉 노동의 현실적인 유용함보다 더 근본적이었던 것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의 게으름이 종교적 도덕적인 견지에서 악이다.


휴머니즘, 권력


프랑스 대혁명이 지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광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인권 사상에 기반을 둔 근대 휴머니즘 사상 때문이다. 근대 휴머니즘은 지식으로 보다 정교하게 무장한 권력이 광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합리성에 불과하다. 19세기 이후의 부르주아 사회는 실증적인 지식들을 사용해 이제는 광인의 육체가 아닌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자 한다. 19세기 이후의 휴머니즘은 서구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나눔의 소멸이 아니라, 단지 또 하나의 나눔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의 개념이 통용될 수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한번에 갑짜기 불연듯,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양소는 더 이상 광인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그 이상의 작업을 수앵하게 된다. 광인의 죄를 구성하고 광인에게 부여된 자기 의식의 형태로 그리고 간수와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이성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인식의 형태로 그리고 광인의 실존에로의 치료적인 개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전시대 광기란 결코 병이 아니었다. 과학적으로 중성화된 대상으로서의 신체적 이상이 아니라 당시 부르주아 질서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이 지닌 죄, 의사는 그를 부르주아 질서로 편입시킬 임무를 띤 일종의 공무원이나 목사였다.  


광기, 19세기


광기를 일종의 병으로 인식하고 그를 치료할 여러가지 방법들이 모색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19세기가 도래하면서 일반병원 등에 존재했던 그 때까지의 혼재공간은 무너지고 광기는 새로이 정의된다. 당시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서 수립되었던 실증주의는 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부르주아적 권력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등이 체계화되었다. 정신병리학적 담론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조건은 환자-의사 사이에 수립되었던 일정한 관계이다. 정신분석학이 감추고 있는 것은 현대의 심리학이 은폐하고자 하는 비이성에 대한 경험이다. 고백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은폐되어 있던 내밀한 속내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는 기법이다. 서구 기독교 사회의 특이한 구조인 고백문화의 현대적 변용을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는 의사이기 이전에 현대의 사제, 과학자이기 이전에 현대의 목사이다. 침묵과 관찰을 폐지하고 관기라는 개념을 제거하게 된다. 의사의 반신성한 지위를 마련, 그의 위에 존재했던 권력에 집중하게 된다. 지위를 하나의 절대적인 관찰로 순수하고 신중한 침묵으로 벌주고 상주는 판관으로 변환된다.


2. 감시와 처벌


권력이 인간과 신체를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이간의 모습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기술한 책이다. 인간을 처벌하는 감금하는 권력에 대한 서술이자 근대적 도덕과 영혼의 계보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력의 역사이자 권력에 대한 철학적 이론인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대한 정치, 경제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연결과계를 규명함으로써,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나 신체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독득한 탐구를 진행한다. 이것이 바로 계보학적 방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앎의 고고학에서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고 그러한 방법론을 가지고 역사를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


계보학, 니체


계보학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방법과 구별되는 것으로, 역사에 있어 고정된 본질이나 심층적 법칙, 형이상학적 결말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의 의미가 있다는 논리를 부정한다. 의미, 가치, 진리, 도덕, 선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 속에 감추어진 권력의 전략, 지배와 복종, 억압과 전투의 관계를 파해친다. 그것은 지식의 담화, 추상적인 언술 행위 속에 이루어진 권력의 개입과 작용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푸코의 계보학은 역사적 시작은 갖되 역사학과 구별되는 것이며, 개별적인 사건들의 뿌리를 추적하되 그것들이 과거와 현재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원인과 결과를 이룬다는 결정론적 시각을 거부한다. 그것은 궁극적 진리나 절대적 앎을 전제로 한 헤겔적 이성의 계보학이 아니라 해석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열릴 수 있는 니체적인 계보학이다.


고문, 처벌


첫번 째 장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앙시앵 레짐의 시대의 왕권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잔인한 전통이다. 18세기가 지나서 19세기로 접어들어서는 신체형이 소멸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의식이 범죄와 수상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으로부터 연유한다. 사형집행의 공개는 폭력이 재연되는 온상으로서 인식된 것이다. 그 결과 처벌행위는 거의 일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생활의 영역을 떠나서 추상적 의식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고, 이제부터 형집행 의식의 치요과 영광은 다른 방법으로 분리되는데, 그것은 범법자를 소극적이면서 명확한 표현으로 규정하는 유죄의 선고 방법이다. 그 근본 목표는 교정, 감화, 치료라는 것이다. 이 형벌제도에 의하면 신체는 구속과 박탈의 체계, 의무와 제한의 체계 속에서 취급되고 있다. 징벌은 견딜 수 없는 감각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의 단계에서 그 모든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는 경제의 단계로 이행한 것이다. 확연하게 벌의 강도가 감소된 것은 처벌의 대상이 이제 신체가 아닌 정신이라는 목4표의 변경이라는 점ㅇ르 시사하고 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그것을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강간을 재판하지만 동시에 성도덕의 타락을 재판하는 것이고, 살인행위를 재판하면서 충돌이나 욕망의 행위를 재판하는 것이다. 재판받고, 처벌받는 것은 소송 요인의 구성요소들 배후에 있는 그러한 그림자(욕망이나 충돌)등이다.처벌한다는 것은 형벌에 수반되는 안전조치(거주제한, 자유의 감시, 감호조치, 진료의 의무화)의 작용이기도 하며, 그 '조치'의 목ㅈ겅느 범죄를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개인을 감독하고 그의 위험한 상태를 제거하고, 그의 범죄적 소질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이루어진 변화를 단 한 번의 조치로 고정시키도록 하는 데 있다.  


권력, 미시물리학


푸코는 처벌수단의 변모를 연구함에 있어 신체에 관한 정치적인 기술론을 출발점으로 삼도록 시도한다. 현대사회에서 처벌제도가 신체에 관한 일종의 정치경제학 속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다. 신체기능의 과학이라고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신체의 지식과 한편 체력을 지배하는 능력 이상의 것인 체력의 통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지식과 통제가 신체의 정치적 기술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내용을 이룬다. 분명히 이 기술론은 분산되어 있어서, 체계적이고 연속적인 담론의 형태로는 거의 표명되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국가기구와 제도가 작용시키는 이른바 구너력의 미시 물리학이란 것인데 그것의 유효한 영역은 이러한 기구와 제도의 대규모 작용과 그것들의 물질성과 힘을 포함하는 신체 자체의 사이에 놓여 있다.


권력, 지식


기본적인 전제는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주체, 인식되어야 할 대상, 인식의 양태는 모두가 권력-지식pouvoir=savoir의 기본적인 관계와 그것들의 역사적 변화의 결과들이다. 권럭에 유익한 지식이든 불복종하는 지식이든 간에 하나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권력-지식의 상관관계이고, 그것ㅇ르 가로지르고, 그것이 조성되고, 본래의 인식형태와 가능한 인식영력을 규정하는 그 과정과 싸움이다.


정신, 계보학


중요한 것은 처벌 기술이 신체형의 의식에서 신체를 점령하건 혹은 정신을 대상으로 하건 간에, 그 기술을 정치체의 역사 속에 놓고 파악하는 일이다. 형벌의 실제를 법률이론의 결과로 생각하기보다는 정치적 해부의 장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영역의 가장 어두운 지대에서 사형수는 최대한의 권력인 국왕과 대칭적이고 도치된 형상이다. 사형수의 복종하는 신체에 행사되는 과인 구너력은 신체가 아닌 비신체적 이중화 곧 정신의 이중화를 불러 일으킨다. 처벌 권력이 이 미시무리학의 역사는 하나의 계보학, 오히려 근대 정신의 계보학을 만들기 위한 요소가 된다. 정신은 실재이며, 그것은 하나의 실재성을 갖고있고, 정신은 신체의 주위에서 그 표면에서, 그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드러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 권력이야 말로 보다 일반적으로는 감시받고 훈련받고 교정받는 사람들, 광인, 유아, 초등학생, 피식민자, 어떤 생산기구에 묶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감시당하는 사람들에게 행사된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정신의 역사적 실재성이라고 할 때, 정신은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표상되는 의미에서의 정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 죄를 범해 벌을 받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감시-징벌-속박 등의 소송절차를 거쳐 생겨나는 것이다. 이 정신은 실재적이나 전혀 실제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어떤 유형의 권력의 성과와 어떤 지식의 관련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구성요소이며, 또한 권력의 관련 형태들이 어떤 지식을 만들어내고, 또한 지식이 권력의 여러 성과들을 뒷받침해 주고 강화해 줄 수 있는 어떤 톱니바퀴적 장치이다.


실재성, 지시관련성


정신의 이 실재성-지시관련성realite-reference의 토대 위해서 사람들은 각종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분석 영역을 영혼, 주관성, 인격, 의식 등으로 절단했다. 사람ㄷ르은 그 실재성-지시관련성 위에서 여러 기술과 학문적인 담론을 수립해 왔으며, 인간 중심주의의 도덕적인 권리 요구를 드높이 내세워 온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영혼 대신에 지식의 대상이자 철학적 성찰과 기술적 관여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즉 현실적인 인간이 도입이 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복종화의 성과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미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푸코, 윤리


푸코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에토스에 집중한다. 주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하면서 자기배려의 윤리에 집중한다. 존재에 대한 근거가 없으면 윤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인식론-존재론-윤리론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자기변형의 기술이라는 것은 자기일탈의 기술이다. 이미 체화되어 있는 구조가 주는 지식-권력의 신체와 정신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자신에게서 일탈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들뢰즈도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푸코에게서 발견되는 구조주의 담론은 후기적인 느낌이 강하다. 후기적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완전히 확고하다가 반대의견을 만나고 어느정도 반대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중간지점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기 구조주의적인 성격으로 인간이 어느정도의 구조에 반응하지만 또한 인간 스스로도 결정이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의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일수도 있다. 푸코와 우저을 나누어 본다면 푸코는 무엇이 과연 고민이었을까? 지식과 권력, 지식과 정치, 성과 정치, 정상과 비정상, 배제와 포섭 등과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구조를 바꾸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민네이션, 에피스테메  


17세기에만 보더라도 국가-가족이라는 틈새에 부르주아들의 요구로 '시민사회'가 창조되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를 정의내리고 포지셔닝하기 위해서 사용한 도구는 계몽주의의 주요한 도구인 이성이었다. 따라서 이성에 맞고, 이성의 구조를 잘 따라가는 사람들로 시민사회와 부르주아 계층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사회변혁이 시작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비이성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정신병원을 사용한 것이다. 푸코의 계보학의 마디는 항상 에피스테메이다. 인식론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면(인지혁명) 사람들이 산업혁명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회혁명과 산업혁명의 결합이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시대를 살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는 권력이 자본과 연결되지만 계몽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는 계몽이기 때문에 계몽을 할 수 있고, 한 계층은 지식을 가지게 되는 사회인 것이다. 사회혁명-산업혁명이 역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더욱이 '인지혁명 - 사회혁명 - 산업혁명'으로 연결되는 연결고리는 항상 한 방향이지는 않다. 휴머니즘이라는 인식체계에서 푸코식으로 보면 인간 자체가 권력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호모사케르를 이야기하는 아감벰의 논의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현대 자유주의국가에서 에피스테메는 '자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뿐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이 바로 권력자인 것이다. 노동으로 부터 자유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만드는 자유를 가진 사람은 바로 권력자들인 것이다. 그 사이에 자본이 섞여 있다. 자유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치주의가 최종심급이 되는 사회, 다시 말하면 법이 에피스테메가 되는 사회에서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핵심에 있게 된다. 따라서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자본도 뛰어넘는 법-권력자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푸코의 생각을 고고학적으로 살피고 나니 그의 계보의 주체는 결국 사회에 포섭되지 않고, 에피스테메를 넘나드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윤리가 나오고 주체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푸코가 위대한 것이다. 주체성의 담론을 펼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주체성을 가진 주체들은 사회의 법률과 지식의 계보를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헤겔과 니체


독일철학자들의 대부분의 방법론은 헤겔의 변증법을 따른다. 이러한 변증법의 전제는 정신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니체의 계보학을 따르기도 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토대를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엇인가의 전제를 깔지 않고 바로 대상과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결국 정신의 전제에서 처벌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법을 집행한다는 것, 공권력을 갖는 다는 것, 국가라는 것은 헤겔이 이야기한 '가족-사회-국가'라는 변증법을 거쳐서 절대정신으로서 국가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법의 차원에서 집행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권위를 시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을 개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처벌과 고문이라는 방식은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문이 아니나 다른 방식의 반대칭 권력을 요구하게 된다. 위버멘시를 생가해보라. 초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의지이다. 지식이 아니라 의지이다. 따라서 이 의지는 방향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없어도 바로 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을 중심으로 의지가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니체의 계보학은 정신의 계보학에서 좀 더 들어가 의직의 계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니체의 계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시작되었다.


민네이션, 생각


4차 산업혁명에서 주요한 에피스테메는 기술이다. 기술을 직접 가지고 있는 엘런머스크, 래리페이지 같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4차 산업혁명은 결과이고 이것의 시작은 자본이나 법이라는 에피스테메를 '기술'로 바꾼 인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혁명에서 나온 인공지능은 오히려 기존의 에피스테메에서 존재를 구속하는 '자본과 법'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거나 증산되는 존재이다. 인식론에서 존재를 만들고, 존재가 만들어지면 다시 새로운 주체가 가지고 있어야하는 윤리론이 나온다. 구글이나 애플을 보라. 기술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들이 하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들을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의 에피스테메에서 권력자들이 누리고 있는 명예, 권위, 자본 들과 다른 형태로 움직인다. 이러한 기술은 새로운 인지혁명인 '상상력과 창의성'의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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