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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26. 2017

이성과 낭만

낭만주의철학_철학아카데미

20171118_철학아카데미

낭만주의 철학_이병옥 교수

9장 칸트와 자연철학자들

유기체와 관념론을 설명하시는 교수님의 제스처.


들어가기


우리는 지난 시간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있는 형이상학적 질서에 대해서 고민하였다.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질서란 피히테로 대변되는 관념론과 스피노자로 대변되는 기계론의 통합을 통해서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낭만주의는 사유와 현실을 통합하려고 한다. 그리고 수 많은 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에 의해서 그 시대를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론을 만들어냈었다. 오늘날 우리가 낭만주의, 그것도 초기 낭만주의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스피노자가 말한 실체에 대한 속성들의 정도에 따라서 양태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론에 대해서도 낭만주의는 어느정도를 포함하면서 또한 관념론자가 말하는 이원론을 또한 받아 들인다. 이제 이러한 유기체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칸트와 자연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기본적인 칸트철학의 도표.


칸트, 자연철학


문제는 자연철학이 칸트 체계의 깊은 아포리아, 즉 그것이 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본체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의 상호작용을 설명하지 못하는데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기체적 자연개념을 옹호하는 낭만주의자들의 가장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논변은 매우 흔한 칸트적 전략을 사용하여 유기체 관념의 초월적 연역 같은 것을 제공하려 한다. 유기체 관념의 구성적 지위가 경험의 가능성의 필수 조건이다. 자연 안에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칸트에 의하면 이것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독단적 형이상학을 통해서 '유기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자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과 낭만주의자들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이 갈린다. '철학은 독단적 주장이 아니라 비판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이다'라고 칸트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입증될 수 없는 '유기체론'은 비판받아서 마땅한 것이다.

칸트의 영향은 근대 서양찰학의 한 획을 그었다.


독단주의, 회의


낭만주의 자연철학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아마도 유기체적 자연 개념만큼 신카트주의적 비판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개념이 최악의 독단적 형이상학적으로의 회귀라고 일축했다. 그들은 칸트가 매우 현명하게 목적론에 규제적 제한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적 자연개념이 그것을 위반한다고 비판했다. 낭만주의 자연철학자들(셸링, 헤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 같은 사상가들)은 순진하면서도 독단적으로 유기체 관념에 구성적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다. 낭만주의자들은 거대한 사변과 선험적 추론을 좋아하는 성향에 따라 무모하게도 자연이 실제로 유기체라고 가정했다.그래서 자연을 단지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탐구해야 한다는 칸트의 비판적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정말로 그렇게 순진하고 부주의했을까? 아니면 그들은 칸트가 부과한 제한을 넘어설 어떤 근거를 갖고 있었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유기체적 자연에서 우리는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을 볼 수 있다. 개미들이 잎사귀를 봉합하고 있다.


신칸트주의, 관념


신칸트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근본적인 측면에서 칸트는 자연철학의 아버지였다.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metaphysische aufungsgrunde der naturwissernschaft'에서 그의 역동적 물질 이론은 1세대 자연철학자들(셸링, 에센마이어, 요한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린크, 아우구스트 니콜라우스 셰러)에게 형성적 영향을 미쳤다. 둘째, 칸트의 규제적 독트린은 때때로 주장되어 온 것처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생리학과 생물학 연구의 토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8세기 후반 독일의 거의 모든 저명한 생리학자(알브레히트 폰 할러,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  , 키엘마이어, 크리스티안 볼프, 훔볼트)은 생기적 힘을 규제적 원리라기보다 인과적 작인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목적은 뉴턴이 비유기체적 세계에 했던 일, 즉 그것의 근본적인 운동법칙들을 규정하는 일을 유기체적 세계에 하는 것이었다. 뉴턴이 중력의 원인에 대해 사변하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그들도 이 법칙들의 원인에 대한 인식을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이 원인들을 유기체적 성장의 배후에 있는 생기적 작인들로 보았다. 셋째, 칸트 자신은 그의 규제적 독트린에 대해 매우 양면적이었다. 그의 동요는 '제 1비판' 초월적 변증론의  부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칸트는 명시적으로 자연의 체계성 원리들이 단순히 가설적이고 시험적인 지휘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자연 안에 어떤 체계적 질서가 있다고 가정



독일, 역사


독일 국민들은 대부분 순응적이고, 권위를 매우 중요시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게르만족은 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 게르만족이라고 하면 유럽에서는 문명화되지 못하고 저급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었고, 계몽주의 시대에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여러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독일 계몽주의는 사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수입해서 들여온 사상이었고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계속 고민했다.독일의 민족주의가 히틀러에 의해서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낭만주의자들이 미쳤던 영향은 스피노자와 피히테, 데카르트와 같은 이들의 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통합시켰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한 독일은 소위 말하는 '인종개량', '인간개조'에 의해서 빌둥'이라는 교양을 가진 민족성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 초기의 낭만주의는 '독일 민족성의 기원'을 '로마'에서 찾은 것이고, 로마가 가지고 있던 권력과 영향력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발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분할해가는 철학은 매우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분석은 통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전체의 연결을 보게는 못한다.


자연, 이성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Die Beeelung der natur durch Verunft'라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 자연성의 영혼을 불어 넣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니 교양'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성을 충동과 욕망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규칙과 조직화를 통해서 이성과 충동이 교양화되고, 자연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교양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해석한에서 슐라이어마흐는 beseelung'이라는 영혼을 불어 넣다는 개념을 'ethisieren'이라고 표현하면서 현상의 해석을 통해서 교양이 증가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노발리스는 'bildung'의 개념을 절충주의적 입장에서 내적성숙과 더불에 직업을 감당할 수 있는 실용적인 능력도 포함시켰다.낭만주의자들을 몽상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칸트, 판단력 비판


목적론에 반대하는 칸트의 논변이 매우 특수한 한 개념, 즉 그가 '자연목적'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은 낭만주의자들의 목적론 개념에 중요한 텍스트인 '판단력 비판' 65절에서 명시적으로 정의된다. 칸트는 어떤 것이 두가지 본질적 조건을 충족할 때만 자연목적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유기체적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거기서 각 부분은 전체와 분리 불가능하며, 바로 전체의 관념이 그 안에서 각 부분의 위치를 결정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발생적self-generating이고 자기 조직적self-organizing이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부분들은 상호적으로 서로의 원인과 결과이며, 외적 원인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부분은 필수적이다. 칸트는 기계도 그 조건 만족시킬수 있음을 고려할 때 유기체적 통일성만으로는 어떤 것을 자연목적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자연목적이란 오직 외적원인을 가지지 않을 때 자연목적의 내재적 원인에 충실하면서 존재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을 분석적으로 이해했다. 사실이라는 것은 오직 오감을 통하서만, 그러나 가치는 언제나 가능한 영역이였기에 개인안에만.


셸링, 자연철학의 이념


자연철학의 이념'에서 셸링은 어떻게 칸트의 이원론이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제안을 한다. 칸트의 규제적 제한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1797년 '자연철학 체계의 기회'와 1800년에 '초월적 관념론 체계'에서는 칸트의 이원론이 갖는 문제에 대해서 그의 규제적 제한을 분명히 넘어서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셸링의 해결책은 그의 유기체적 자연개념이다. 만약 자연이 유기체적이라면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는 종류의 구별이 아니라 정도의 구별만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단순히 자연 안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단일한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은 다른 정도들이다.그렇다면 이 명백한 대립항들을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정신적인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최고 수준이며, 육체는 단순히 정신의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유기체는 조직화의 정도의 따라서 수준이 결정된다'라고 말이다.



유기체, 자유의 문제


낭만주의자들의 유기체적 자연 개념은 그들이 자유의 문제에 대한 칸트와 피히테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유기체적 개념의 핵심은 자연의 통일성,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단일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하지만 자유의 문제에 대한 칸트와 피히테의 해결책은 이 영역들의 이원론을 전제로 했다. 자유를 구하기 위해 칸트와 피히테는 자연의 현상계 위에 그리고 너머의 본체계를 상정했다. 본체계는 이성에 의해 부과된 도덕법칙을 따르는 반면, 현상계는 자연법칙에 따라 엄격한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 낭만주의자들이 그러한 해결책을 거부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에 담긴 이원론적 함축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이성의 영역이다. 믿음의 영역은 또한 당위의 영역이 된다


슐레겔, 셸링


슐레겔과 셸링은 자연 전체에만 절대적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숙명론의 함축을 피하기 위해서 여전히 노력한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아가 자유롭다는 것을 부정하지만, 자아가 자연 전체와의 통일성 안에서는 자유롭다고 인정한다. 그들의 의제는 자유와 필연성을 화해시키는 것, 참된 자유와 필연성이 대립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신적 자연 자체에서 이 통일성을 보았다. 자연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그것은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행동한다. 눈에 띄는 사실은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셸링이 자연의 어떤 부분에서 대해서도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연전체, 무한한 신적 실체 자체에 대해서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실체는 자기-인과적이고 자기-형성적인 자기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롭다.슐레겔과 셸링은 자연 전체에만 절대적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숙명론의 함축을 피하기 위해서 여전히 노력한다. '유기체적 형이상학'안에서 스피노자의 기계론은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의 핵심이다.  



민네이션, 생각


'절충주의'를 넘어서서 혹은 '통합주의'를 넘어서서 '구성주의'적인 입장에서 낭만주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과 자연을 단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원개념-분리-발전-연결고리제공-유기체적 연결성-발전'으로 가는 방식의 유기체적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하나였던 것을 나누었다가 다시 이것을 합칠려니깐 통합주의로 가는것인가? 아니면 원래 하나였던 것들을 분리해서 해석하다가 다시 새로운 혹은 원래의 해석으로 돌아온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인간의 자연목적은 무엇인가? 이런고민도 든다. 결국은 철학으로 돌아오면 presupposition과 perspective의 싸움으로 가게 된다. 무엇인 가장 처음에 있었는가? 어떤 연결이 처음에 존재했는가?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을 찾다가 보면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로 가게 된다. 물질적을 근원물질이 있는가?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저 존재하던 것들이 있는가? 그것들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이런 고민들의 싸움에서 '신에서 사물로 확장되는 존재'인 스피노자의 철학이 나오고, 이미 주어진 '이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인간존재가 모든 것을 해석하는 주체로 변화되는 코기토적인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철학이 있다. 기독교 적으로는 '태초에 말씀이 있다'라는 것으로 혹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장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



민네이션, 유기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자. 프랙탈 개념에서 모든 것들은 작은 단위가 큰단위로 '자기유도'적인 형성방법을 가지고 있다. 유기체적으로 볼 때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유기체를 이루면 그 유기체는 자유롭게 하나의 개체가 되어서 활동한다. 그러나 유기체로 연결되지 않는 개체는 없다.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유기체성을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있던 것으로 발견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유기체를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불완전과 완전의 개념이 나온다. 이것은 프랙탈 함수로 풀어낼 수 있다.프랙탈 함수에서 1차원에서 2차원 으로 가는 가운데 1.92차원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기체의 구성을 그럼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떻게 구성될 때 유기체라고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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