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Nov 23. 2017

정치와 여성

줄리아크리스테바와 정신기호계_철학아카베미

20171123_철학아카데미

줄리아크리스테바와 정신기호계_김선하 교수

정치와 정치분석, 차이의 정치, 페미니즘 (켈리 올리버)

점점 크리스테바 철학의 깊이를 더한다


들어가기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성은 스스로를 비천시하면서 사랑으로 아이를 주체화 시킨다.그러나 그러한 시기가 지나면 모성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문제는 어머니가 비천시되는 부분을 여성 전체로 환원시키면 여성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의 문제도 다시 거론된다. 집단의 문제로 변질되면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핵심은 간단하다. 주체를 '사랑'하는 주체로 보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주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사랑하는 주체라면 스스로를 비천시하면서 상태인 타자를 주체로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정치, 종교


크리스테바의 분석으로는 정치는 대부분 일종의 도착이다. 그녀는 정치의 이상이 자신의 이상처럼 이론적이 아니라면 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정치는 정치 그 자체를 위한 이상에 집착하는데, 이 때의 이상은 바로 그 이상으로 추구하는 리비도적 만족까지도 은폐해 버리는 것이다. 이 리비도적 만족이 억압될수록 그 만큼 정치적 이상은 초월성을 띤다. 그녀는 종교의 위기라고 보는 상황 속에서, 종교적 이상을 대신한 것이 정치적 이상이다. 크리스테바는 정치는 현대의 종교가 되었다고 말한다.



정치, 해석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정치적 해석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초월적 의미를 추구한다. 정치적 해석도 종교처럼 특정 전통과 삶의 양식을 설명하고 합리화하는 방법이 된다. 정치적 해석은 충동이 통제되거나 간접 방출되는 일종의 문화적 상상계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달리 정치적 해석은 무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 크리스테바는 종교가 신비나 기적을 중시할 수 있는 반면, 정치는 환상이 될 때도 합리성과 의미로 명맥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정치 담론의 약점 중의 한가지이다. 정치 담론은 우리 체험의 일부인 무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테바는 정치 담론은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무식적 충동을 인정 못하는 종교 담론처럼 정치 담론은 쉽게 전체주의, 박해, 전쟁에 빠져버릴 수 있다.

페미니즘은 왜 반항군처럼 느껴지는가?


전체주의, 페미니즘


크리스테바의 지적대로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정치적 해석이요, 어떤 의미로는 한 가지 의미 추구의 논리적 결과이다. 사람이 한 가지 이상에 고정될 때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해석마저 전체주의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현대 페미니즘 운동을 보고 느끼는 크리스테바의 불평이다.해방을 정치적 운동의 목표로 삼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고정된 이상이 배제와 박해 위에 올려져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크리스테바에 있어 정신분석은 이런 정치적 해석의 허상을 해보하는 것이다. 그려는 사람을 도와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에는 실제 정치보다는 정신분석의 역할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정치, 분석


정치분석은 정치적 이상과 해석에서 오는 궁극적 의미와 최종적인 원인을 분석 가능하게 한다.정신 분석은 정치적 해석이라는 한가지 의미 내에 있는 다른 의미와 무의미를 밝힐 수 있다.크리스테바는 이런 방법으로 정신분석 담론이 전체주의 담론에 대한 저항을 불러 올 수 있음도 시사한다.



정치, 정신분석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의 정치적 기능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작업은 진리의 체계라는 이름의 종합 해석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를 취할 때면 해석은 언제나 신학의 형편없는 사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작업은 현대 해석의 체계의 위기를 숨김없이 기록하는 것이고, 이 위기가 상징적 기능 자체에 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 위기를 부정하려는 전체화 해석을 비롯한 모든 구조를 징후로 인식하는 것이다'정신분석은 모든 표상을, 표상 내 위기의 징후로 표상해야 하는 얄궃은 과업을 떠 맡는다. 이 때 정신분석은 언제나 표상 불가능한 것도 작업에 끌어 넣는다. 고전적표상의 논리를 이요하는 듯하면서도 그것을 붕괴하는 이 주장은 반기본적antifoundation이론에서 보는 몇가지 원론적인 문제를 초래한다.


정체성, 아브젝트


정체성은 배척할때, 아브젝트할 때 생겨난다. 시적언어' 부터 시작해서 검은태양까지 모든 글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아브젝시옹으로 인해서 태어나게 된다. 집단의 정체성도 타자를 아브젝트할 때, 그리고 그 타자가 더 많아질수록 더 확실한 정체성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 환상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이 타자, 이방인을 구체화하고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그것, 그녀를 확인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수 있따고 시사한다. 그것은 원래 프로이트가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획이었고 이러한 타자들과 함께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이 화해불가능한 요소를 존중하는 윤리를 설정했다는 주장을 한다. 정신분석은 차이, 무의미,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모셔들인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그 다음에 한 가지 정치를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테바, 페미니즘


크리스테바는 모든 말하는 존재 중에 여성이 최초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큰상징적 질서를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여성이 그 큰상징적 질서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여성이 지배적인 담론을 마스터해야 한다'는 뜻과 다름을 분명히 한다. 크리스테바는 '우리는 더이상 '모든 여성'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각각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언어는 큰상징적 질서의 일부가 될 것이다. 여성은 단순히 상징계 바깥으로 뛰어나갈 수 없다. 또 그렇게 원해서도 안된다.큰상징계는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를 크리스테바가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리스테바는 큰상징적 차원 없이는 인간의 삶도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최근에 나온 페미니즘 관련책, 페미니즘도 정교함을 더해간다. 그러나 크스테바의 질문은 여전하다! 왜 모성은 빼는가???


페미니즘, 비판


크리슽테바는 페미니즘이 반 권력을 추구하면서 사실은 더 큰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정치적으로 변해가는 페미니즘에는 여전히 전체주의가 도사리고 있고, 이것은 사실 페미니즘이 증오하던 남성적 전체주의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 또한 페미니즘은 '모성'에 대한 이해를 잘못한다고 말한다. 모성에 대한 이해는 '차이'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마는 주디스버틀러와 같이 이미 젠더화된 성으로 우리는 성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상징적으로 이미 우리는 성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징계 질서에서 기호계로 돌아가서 새로운 질서를 새워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 모성


크리스테바에게는 어머니와 여성은 다르다. 어머니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면서 '아브젝션'을 하고, 아이는 생명으로 어머니 자신은 비천해지기를 선택한다.이때 상상계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끌려 들어가는 아이를 잡아주면서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은 어머니일 때 '타자를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한때 어머니와 하나의 몸이었기 때문에 상상의 아버지의 개입이 없으면 어머니의 정체성으로 다시 회귀하게 된다.


민네이션, 정치


정치는 구조화로 가는 규모의 정치로 가거나 정체성으로 가는 차이의 정치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정체성으로 가는 차이의 정치를 이야기한다. 크리스테바가 추구하는 정치는 정체성의 새로운 도전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가는 라캉의 상징계와 무의식에서 '기호계'의 등장으로 가능하다. 기호계로 돌아가면 개인이 스스로 갖는 정체성에서 '스스로를 낯설게' 여기게 되고 이러한 낯설게 되는 타자화에서 다시 '기호계-상징계'의 순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민네이션, 타자


모든 것을 타자화시킬 수 있다. 낯설게 보기를 하려면 메타인지를 발동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들이 '상징-실재'의 연결이 깨어지고, 아직은 무의미한 기호들의 난립이 일어난다.이 과정에서 나는 모든 것들로 부터 연결되지 않은 기호적 타자가 된다. 그것들에게서도 나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자아 개념은 멈추고 '기호적 자아'에서 시작하는 창조성이 열린다.



민네이션, 바디우


바디우에게 '사건'이라는 것은 예상되지 않은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돌발적인 상황들이 만들어지고, 모든 상징계의 구조가 깨지면서 실재계를 바꾼다.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진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이것을 크리스테바적으로 보면 '상징계'의 질서에 '사건'이 발생하면서 '기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여기서 부터는 이제 기호들을 상징화시키는 주체인 '나'라는 존재가 등장한다.당연히 이 과정에서 집단이 주는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네이션, 기독교


기독교에서는 일종의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고, 두려움으로 빠져 나기기 위해서 아브젝시옹을 한다.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성은 사실은 정체성이 아니다.없음,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가 '있음, 존재함'이 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그래서 크리스테바의 이야기처럼 '사랑의 존재'인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갈 수 있다.기독교적 용어인 '정죄함'으로써는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거나 보여주지 못한다. 오직 우리는 긍정성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진정한 힘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이와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