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Nov 16. 2017

전이와 사랑

정신기호학과 줄리아크리스테바_철학아카데미

20171116_철학아카데미

정신기호계와 줄리아크리스테바_김선하 교수

혁명적 공포, 분석, 사랑

오늘도 최고의 깨달음이었다. 전이된 사랑만이 세상을 바꾼다.


들어가기


오늘은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한 '혁명적 공포, 혁명적 분석, 혁명적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혁명적 공포라는 것은 억압된 모성에 대한 혁명적 효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억압하고 있는 언어, 종교, 정치, 도덕의 권위로 부터 모성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이 첫번째 단계에서 등장하게 된다. 혁명적 분석에서는 상상과 상징이 연결되어 버린 고착화된 지점을 분석을 통해서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강한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다시 기호계로 돌려놓는 작업을 혁명적 분석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가는 환자의 병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묶여 있는 타자의 욕망과 자기 자신의 기념에서 나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혁명적 사랑에서는 사랑을 통해서 정신분석을 진행하여 생각이 바뀌고,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의미는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이적 사랑'이라고도부른다. 오늘은 크리스테바의 '정신기호계' 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안과 담론을 내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혁명, 공포


'공포의 힘'에서 크리스테바는 언어 내의, 억압된 모성의 혁명적 효과에 관한 예를 제시한다. 그녀에 의하면, 우리들의 종교, 도덕, 정치 그리고 언어의 권위는 공포의 억압에서 나온다.따라서 이들의 권위 이면에는 비천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파시스트적 공포가 숨어 있다. 문화는 이러한 공포 위에 건설되어 있다. 그녀는 이 공포를, 억압된 무의식에 기원을 둔 소위 자신의 '아브젝션의 언어'로써 이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아브젝션의 언어를 통해 이야기하는 공포는 일부 말씀의 권위의 위기를 뜻한다. 아브젝션의 언어의 힘은 권위의 신비를 벗기는데 있다. 비천한 문학은 주체의 권위와 더불어 언어 자체도 의문시한다. 크리스테바는 혁명적 시와 마찬가지로 비천한 문학의 내용은 모성적이라고 암시한다. 그것은 언어의 기호적 음악이고 리듬이다. 한쪽 차원에서만 보면, 아브젝션은 언어의 상징적 요소로 인해 억압당한 부분이며, 이 억압당한 부분 자체가 모습을 드러내면 언어의 권위 자체는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공포의 힘'에서는 혁명적 시에 대한 초기의 몇몇 저술에서와는 달리, 그녀가 비천한 언어와 동이시한 그 힘은 거의 순수하게 미적인 것이다. 그녀는 아브젝션의 언어는 의미의 결핍을 명시하며, 오직 자체의 미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시사한다.


상징계질서에 사로잡히기 전에 우리의 기호로 다시 상징계를 재창조해야한다.


혁명, 분석


크리스테바가 정신분석을 택한 것은 말하는 주체, 정신이상 상태의 발화, 그리고 어린 아이의 언어 습득에 관한 관심 때문이었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존재의 '야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몇몇 인텨부에서 단순한 추상적인 분석에 만족할 수 없어서 실행하는 분석하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인터뷰에서 이론과 실제가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정신분석이라고 믿는다고도 말한다. 정신분석은 실제이면서 동시에 메타언어 즉 이론이다. 분석가는 분석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론을 수정할 뿐만 아니라 적용하기도 한다.또한 어떤 의미에서 이론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상황 속의 담론, 실제이다.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이야말로 시가 지향하는 것을 능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는 정신 착란의 계속적인 위협을 만나면 잠시라도 그것을 피하는 반면, 정신분석은 이 정신 착란을 순화시키고 그 위협을 유희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 기호체계


라캉에게 있어서 기호체계는 무의식의 구조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구조는 타자의 욕망이고, 타자의 욕망은 주이상스라는 큰 타자이다. 그리고 남근은 큰 타자로 가기 전에 일어나는 욕망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 역시 무의식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서 질서화되기 보다는 이질성들이 언어적으로 결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크리스테바는 상상을 상징으로 분석해 내지 않은 것에 정신분석학의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 되기


인간에 대한 분석이 있을 수 있고, 인간에 대한 구성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상징계 질서 안에서 실재계를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이 정신분석의 담론에서는 말그대로 '분석'으로 그칠 수 있다. 그래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과정을 뒤집어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바꾸는 방식으로 크리스테바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전하는 주체라는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어진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사랑을 전해받을 수 있고, 누구나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은 구분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모성이 그러한 사랑을 전해준다고 할 수도 있지만, 크리스테바의 방법론으로는 상징계 질서라는 남녀라는 구분이 '기호계 코라'로 들어가게 되면 아무런 연결고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되는 과정은 사랑을 받는 주체에서 사랑을 주는 주체로 나아가는 가운데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시작되고 도달해야할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차별을 넘어서 서로 주체가 되는 과정 말이다.


크리스테바의 주요한 글들이 담겨있다. 특히 세미오티계는 상징계의 언어를 기호계로 데리고 간다는 측면에서 매우 혁명적이다


인카네이션, 전이된 사랑


'전이된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여러 사람들이 존재한다. '같이 존재하기 - 같이 되기 - 분리되기 - 주체화시키기 - 비천시 되면서 사라지기'라는 차원에서 성육신은 정확히 같은 구조를 이룬다. 성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내려오고 이 땅에서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고, 다시 우리와 분리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여 죽음이라는 과정을 극복하고 살아 있는 이와 다시 살아난 이(부활)와 하나가 되어 부활의 삶으로 모이고, 다시 자유를 얻어 부활의 자유를 누리는 주체가 된다. 전이된 사랑은 다시 전이로 사랑을 만든다.  



민네이션, 생각


크리스테바는 들뢰즈 가타리의 욕망의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아울러서 스피노자에게서 나오는 '코나투스'라는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욕망을 표현한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고, 이러한 욕망이 충동으로, 감정으로,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남성이기 이전에 존재에서 우리는 '코나투스'적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재계로 내려오면 경험과 임상의 측면이 된다. 여기서는 실재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경험하는 것들의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다. 실재계에서 '모성'은 오히려 생명의 잉태의 주체가 되는 실재이다.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잉태를 위한 단서를 제고하지만 그 생명이 자신의 몸 안에서 잉태되고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고민은 상징질서에서 나오라고 하면서 여전히 상징계 질서의 구성요소들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민네이션, 전이된 사랑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하는 해결책인 '전이적 사랑'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랑이 아니라, 전이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사랑은 배우고 경험한 후에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동안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랑은 '구성적 사랑'이었다. 구성적사랑은 에리히프롬에 의해서 '노력과 성실함, 책임'이라는 의지적인 입장에서의 구성인 부분도 있었고,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고유의 특성으로 '내재된 사랑'을 주장하기도 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라고 이야기하는 크리스테바의 표현은 그래서 특이하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는데, 문제는 태초라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었던 사랑이 인간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그 전이의 과정은 '모성'에서 시작되는 탄생을 말한다. 이러한 탄생은 모성의 '비천하게 되기'를 통해서 사랑을 전이받는다. 코나투스적으로 존재하려는 욕망 이전에 모성이 스스로 '아브젝시옹'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이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성으로부터, 탄생으로부터 전이되어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계속 '없음'과 '결핍'이라는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고,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코나투스 개념은 다시 말하면 '스스로 비천하게 되면서 사랑을 전해주고, 자신은 하나된 주체성으로 주변부로 빠지기'라는 '비천시 되기'를 통해서만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성의 스스로 객체화가 자녀의 주체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혁명적인 사랑이다.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는데, 사랑이 전달되어 주체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을 전해줄 때 일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전해주는 부분이 없을 때 내 안에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욕망으로 멈추게 된다.


새로운 상징계를 만들어 보려는 이들과 함께 홀라크러시를.




매거진의 이전글 기계와 자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