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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09. 2017

생기와 범신

낭만주의 철학_철학아카데미

20171209_철학아카데미

낭만주의 철학_이병옥

10장 초기 낭만주의의 종교와 정치_피히테 대 스피노자


오늘은 마지막 시간, 낭만주의와 종교에 대해서 슐라이어 마흐의 종교론을 설명하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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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강의의 마지막 시간이다.지금까지 우리는 낭만주의자들이 피히테와 스피노자에게 그 토록 이끌렸던 이유를 알게 되었따. 그리고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이 두 철학자를 결합하려는 기획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종교와 정치에서 이러한 관점을 전제로 어떻게 낭만주의자들의 자신들의 이론을 통해서 결합을 시도하는지를 따져 볼 수 있다.



피히테, 무한자


피히테는 행동주의자로서 무한자'(자연, 신)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창조하는 대상이라고 보았다.무한자라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신=자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무한자라는 개념이 자연을 통칭하기도 한다.무한자라는 것은 끝이 없는 존재이다. Deus sive Natura라고 할 수 있다. 신이 곧 자연이고 자연은 끝이 없이 존재하는 무한한 존재Das Unendlinche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도 무한자라는 개념은 비록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정의내릴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기도 한다. 피히테의 급진주의적인 혹은 행동주의적인 관점은 사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지고 온 개념이다. 칸트에게서 무한자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이념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칸트는 실체화의 오류'라고 불렀다.


한계가 없는 존재, 무한자


스피노자, 피히테


스피노자에게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실 내가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신의 속성에 따라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사라지고 신의 양태로서 현존하는 나만 존재하게 된다. 신의 필연성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자유가 사라지고 결국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굳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도 없고 의지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피히테는 이러한 주체의 무화'를 주도하는 스피노자 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히테의 경우 프랑스 혁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찬양과 그 원동력으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모든 사물의 의미와 연결을 이야기를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숙명론에 빠지게 되고, 자연에 동화되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완전히 반대하면서 피히테는 정치적 관점에서 급진적인 철학을 펼친다.


유기체적인 연결로 인간을, 세상을 통합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 낭만주의자들


낭만주의자들은 당연히 스피노자의 이론을 어느정도 받아 들인다. 17세기 말 이후 독일에서 스피노자는 급진적 프로테스탄트, 모든 불만스런 개혁가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이들은 루터가 군주들에게 매수되어 종교적 자유와 만인사제설이라는 자신의 두 거대한 이상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이 급진주의자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스피노자를 수용했는데, 그 이유들은 모두 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그들은 스피노자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종교의 자유를 보증한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의 '성서' 비판이 루터주의를 성서주의, 문자를 신앙으로 규약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사랑했다. 그것은 모든 신자의 평등과 만인사제설을 정당화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이 모두의 안에 똑같이 무한하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그렇다면 우리와 신의 관계를 매개할 사제나 정신적 권위가 필요없다.



슐레겔, 만인사제설


슐레겔도 자신의 종교론에서 만인사제설을 이야기한다. 'Alle Menschen sind Priest'라고 한다. 성서로 돌아가서 모두가 같오오은 평등을 외치는 성서주의를 외치기도 한다. 반면 해석학적 측면에서 슐라이어 마흐는 '성서주의'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문자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우주의 직관'을 통해서 종교경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주'라는 개념은 슐라이어마흐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라는 개념은 인격적인 신God이라기 보다는 인격적이지 않은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직관이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흐의 '종교론'은 종교철학의 고전이라고 읽히고 있다. 인간의 종교성은 어디서부터 유래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피히테, 낭만주의자들


낭만주의자들이 피히테에게 이끌렸던 주된 이유는 그의 급진적 자유개념, 특히 자아는 단지 그가 스스로 정립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개념은 두 측면에서 급진적이었다. 첫번째는 그것은 자아가 어떻게든 반드시 실현하거나 발전시켜야 할 영원한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히려 자아의 본질은 자기에 의해서 창조된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 뿐이며 그의 입장은 사르트르를 예기한다. 둘째는 자아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 세계 역시 그의 이성의 산물이어야 한다. 이 두번째 주장으로 피히테가 의미한 것은, 마치자아가 신적이라는 듯이 자아가 자신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가 그렇게 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노력을 통해 완전히 이성적인 세계라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한다.


스피노자, 부활


낭만주의적 종합의 핵심은 스피노자의 재해석에 있었다. 그들은 스피노자의 몇몇 근본적인 독트린에 완전히 상충하는 방식으로 그를 재해석했다. 스피노자에 대한 낭만주의적 재해석의 중요한 선례는 헤르더의 1789년 소책자 '신, 몇명대화'Gott, Einige, Gesprache였다. 헤르더의 스피노자 재해석의 몇가지 근본 조항들이 셸링과 횔덜린, 노발리스, 프리드리히 슐레겔, 청년 헤겔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1787년 소책자에서 헤르더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생기론적 범신론 혹은 범신론적 생기론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스피노자를 유기체적 세계관의 옹호자로 만든다. 이것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살아 있는 유기체를 형성한다. 헤르더는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를 재주조하면서, 스피노자와 그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동시대인인 라이프니츠를 자기-의식적으로 융합시킨다. 바로 라이프니츠가 실체의 본질을 생명력, 활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헤르더는 우리가 해야할 일이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자연주의를 라이프니츠의 생기론과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들을 필사적으로 매장하려했던 바로 그 때, 헤르더는 두 위대한 독단론적 형이상학자들을 부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연결, 이성과 영혼의 연결


헤르더, 낭만주의


헤르더는 단 한순간도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즉 자연이 무한하며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관념을 의심하지 않았다. 헤르더에게 이것은 가장 먼저 스피노자의 유일한 무한 실체를 생명력, 모든 힘들 중의 힘, 모든 힘들의 원천적인 힘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자연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보증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유기체적인 것과 비유기체적인 것 사이의 어떠한 이원론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물질이 생명력이라고 가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원론 대 유물론의 곶너적 딜레마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정신과 물질을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다른 정도들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생명력의 조직화와 발전의 낮은 정도인 반면, 정신은 그것의 가장 높은 정도이다. 이것은 환원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다.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 여전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다.



인간활동, 신적활동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신에게 의존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에게서는 인간들이 신에 의존하는 만큼 신도 인간들에게 의존한다. 오직 인간의 자기-의식과 활동을 통해서만 신적 자연은 결국 자기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의식이나 인간 주체가 없더라도 분명 신적 자연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하고 잠재적이며 맹아적이고 미규정적일 것이다. 따라서 오직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만 우리는 신적인 것을 완성하고 완결되게 하고 실현한다. 따라서 인간의 활동은 곧 신적 활동이다.



인간, 주체


인간 주에체게 큰 역할을 부여함으로써(인간 활동이 스피노자적으로 볼 때는 신적 활동) 낭만주의자들은 피히테의 행동주의를 정당하게 다루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피히테가 신적인 것을 인간 활동의 목적 혹은 이상으로 만들었을 때, 그는 결국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 오직 우리 활동을 통해서만 신적인 것이 자기를 실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활동의 목적으로 만들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는 행동주의자가 될 더 많은 이유를 갖게 된 듯하다. 우리의 행동은 이제 신적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위해서 세계를 더 나은 장소로 만든다.



결론,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피히테의 관념론과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유기체라는 플랫폼을 통해서 '생기론적 범신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유기체는 계속해서 생성되는 조직과 행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이미 신의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이 품고 있던 잠재력에서 불러 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낭만주의적으로 볼 때 어떤 행동이 빌둥(교양)에 의해서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고 세상은 더욱 완전해져 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물은 완전히 흩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나서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노력하는 인간에 의해서 경험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생각한 통합은 바로 이러한 통합이다.



참고, 추천도서


- 베르너 좀바르트,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시초를 새롭게 이야기한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랑과 사치와 자본주의'Liebe, Luxus and Kapitalismus를 읽어보라. 12세기 이후 교황의 아비뇽 우수 이후에 아비뇽에서는 향락과 사치가 기본적인 문화가 되고 이러한 문화는 궁정문화로 확대되어 사치가 고귀한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등장하는 것이 주요한 논제이다. '가치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본질이 가치화되고, 그 가치를 교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제시되고 그 가치를 교화하기 편한 화폐 속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에서 가치가 형상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이 이제 자본이라는 축적된 가치의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세속적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치를 통한 소비의 폭발적인 활약에 힘입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좀바르트는 막스베버와 라이벌이었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는 금욕과 성실함을 가지고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좀바르트의 비합리적이면서 욕망을 주체로 하는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피터 슬로터 다이크, 냉소적 이성 비판


철저하게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의 철학적 사유를 담은 <냉소적 이성 비판> 제1권. "시대는 온통 냉소적이 되었다" 라는 명제 하나로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인정받게 된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저서이다. 1983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슬로터다이크란 이름은 우리의 시대정신인 냉소주의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이 책은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났고,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고 있다.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가 계몽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또한 수사학적 과정이 냉소주의의 철학적 원형인 견유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민네이션, 변화


스피노자에게서 세상은 이미 신의 양태로서 정해진 숙명론이다. 그러나 피히테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변화에 대해서 피히테와 스피노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스피노자적 성격은 오히려 보수주의가 될 수 있고, 피히테는 진보가 될 수 있다. 물론 더 복잡한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초기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두 관점을 동시에 가지고 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유기체적으로 구성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이야기되는 것이다. 급진성을 가지고 변화를 시켜야 하는 것과 꼭 지켜야할 가치를 보수하기 위한 이론이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사물이 이런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움직이는 것과 멈춰진 것들 사이에서 계속 변증법과 피드백이 일어난다. 시스템 다이나믹스의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시세계에서는 유기체가 당연하다


민네이션,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spititual 영역에서는 잠재성을 놓아 두고, identity의 관점에서는 육기체로 사물을 구성했다.그리고 피히테의 영향으로 이러한 잠재적인 범신론의 세계가 생기적인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고 통합되고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이런식으로 유기체를 만들어가면서 세상을 통일하고, 불안을 해소하고, 싸움을 그치려고 했다. 칸트는 분석철학적 관점에서 이것이 가능한지?가 아니라 이것들을 분리해냈을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전체를 분해하면 아무런 기능도, 존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낭만주의자들은 분석이 아니라 생성을 통해서 흩어진 개념들을 통합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이 발현되고, 도야를 통한 문화와 교양을 만들어 가면서 역사는 완성을 향해서 간다는 것이 낭만주의의 주요한 논지였다.


이번학기 수강하신분들과 함께


민네이션, 구성


지금까지 분화하는 생각이나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각각 분석해 보았다.그렇다면 이제 분리된 것들이, 구분된 것들이 통합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고민해 보려고 한다.그것들이 만들어져 가는 생기론적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 포지셔닝에 의해서 '차원'의 문제로 가는가? 아니면 프레이밍에 의해서 '스펙트럼'으로 가는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합쳐진 모습은 예상해보건데, 나선형 스펙트럼이 차원형으로 조금씩 올라가고 축적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이것을 정치에 대입하여서 서로다른 주체들이 유기체적으로 통합되는 '유기체적 정치체제'organic politics system를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밀이지만 수업후에 항상 풍성한 점심으로 배불리 대접해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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