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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4. 2018

존재와 사건

알랭바디우 존재와 사건_철학아카데미

20180104_존재와 사건

알랭바디우_존재와사건_홍기숙

알랭바디우의 진리, 사건 그리고 주체



들어가기


바디우는 서양철학이 가진 근본적인 개념은 주체의 개념을 진리의 개념으로 연결시킨다.진리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진리가 발현되는 것은 바로 사건이다.사건이 오히려 주체를 만들어 낸다. 사건을 사실 빈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그것은 하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자에서 오는 것이다. 있음으로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한 규정에 의해서 현시된다. 이런 이야기들로 알랭바디우는 자신의 '존재'와 '사건'을 이야기한다.



바디우, 사건


일자는 없으며 순수다자만이 존재한다'는 바우디우 철학의 존재이름은 '상황'의 다른 말인 '현시la presentation'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 존재는 바디우에게서 '자연적 상황'을 나타내는 존재와 '역사적 상황'을 나타내는 존재로 구분된다. 바디우는 자연적 상황 내에서의 존재는 일반적인 다수의 원칙을 받아들일 뿐, 사건의 원리로 짜여지는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자연적 상황을 말하는 수학적 존재론의 외부에 있는 첫번째 개념인 것이다. 자연적 존재론의 다수가 절대적이고 따라서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안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시와 재현의 균형을 갖는다고 생각해보자. 


자연적 존재론에서의 다수가 절대적이고 따라서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안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현시와 재현의 균형을 갖는 것이라면, 역사성은 지엽적이고 불안정하며 도래하는 것의 드러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사건'을 통해 바디우의 도래할 미래의 '동일자'로서의 '진리'가 엮어지게 된다. 바디우의 진리는 기존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드시 우연적 사건에 의해 도래하게 되는 것으로 그 자체로 분별불가능한 과정을 자신의 고유한 성격으로 갖는다. 이러한 진리는 지엽적이며 다수적이고 특이성을 지니면서도 보편성을 담보해 낸다는 특징을 보인다.


 바디우는 이러한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절차들에 대해 말하는데, 이 진리의 유적 절차들은 그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조응하는 것으로서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가능한 것이다. 바디우는 이 시대에 조응하는 네가 진리절차로서 과학, 정치, 예술, 사랑을 꼽는다. 이 네가지 진리 절차에 의해 '기존 지식에 구멍을 뚫는다'는 바디우의 표현대로,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지식 즉 이후의 새로운 동일자가 될 지식으로서 진리의 과정이 형성된다. 바디우에게서 진리는 보편성, 특이성, 분별불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지엽적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주체에 의해 진리가 이루어진다. 


전체성을 담보하는 진리가 그 속성상 주관적이며 지엽적일 수 밖에 없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진리와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우연성만을 자신의 유일한 질료로 삼는 사건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드물고 따라서 알 수 없음을 기대하게 된다.



바디우, 주체


#1. 주체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한 상황 안에서 하나로 셈되어질 수 있는 다수를 칭할 때만 그 의미를 갖는다. 진리절차의 식별불가능성은 만일 주체가 실체라고 한다면 성립될 수 없다. 

#2. 주체는 없음이 아니다. 없음은 존재의 고유한 이름으로 비인간적이며, 탈주체적이다. 없음은 존재론의 개념일 뿐이다. 주체는 진리절차 속에서 그 다수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3. 주체는 경험적 의미를 갖는 것에 의해 조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초월적인 기능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경험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연적 사건에 의해 넘어섬을 특징으로 갖는 유적 진리를 수반하는 절차들은 그러한현시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이러한 트징은 의미와 진리를 구별하게 한다. 

#4. 주체는 현시의 불변요소가 아니다. 주체는 매우 드물고, 따라서 그에 따른 진리절차들은 항상 한 상황을 가로질러 횡단한다. 각각의 주체와 진리절차들은 특이성을 지니며 따라서 주체가 있따라는 주장은 우연적이지 존재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5. 모든 주체는 자격을 갖는다. 즉 개별적 주체, 혼합된 주체, 집단적 주체 모두 가능하다. 

#6. 주체는 하의 결과도 원인이나 기원도 아니다.


바디우 철학에서 보편성과 진리를 생각해보자


주체개념, 근대적 사유


바디우는 존재와사거이라는 대표 저서를 통해 수학적 존재론이라 할 수 있는 자연적 존재론과 또 그와 구별되는 것으로 사건과 진리로 규정되는 인간의 역사전 존재에 주목한다. 이는 언뜻 칸트와 헤르더와 같은 근대 계몽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는 자연일반과 자연 안의 인간의 자유의 역사를 구분짓는 근대 역사적 사유방식과도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데카르트의 주체를 선언하며 모더니즘의 연장을 주장하는 사유는 근대계몽주의자들의 사유와 유사하다고 단언하고 넘어가야 할까?그러나 바디우의 사유는 존재와 사건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라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물음에 빚지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존재의 문제를 상황과 함께 사유하고 있는 현대철학자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디우는 포스트모던이 놓치고 있는 주체와 진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다.



순수다자, 존재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를 배격한다.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 '일자'와 '무한'을 연결시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일자와 무한을 연결시키ㄴ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들은 지난 서양철학 존재론의 주된 과제였으며, 이제는 과감히 그런 시도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신들의 사라짐으로 특징 지워지는 시대이다. 이러한 사라짐은 구별되는 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왜냐하면 세 가지 중요한 신인 종교의 신, 형이상학의 신, 시인들의 신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철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있다. 


연결에 의해서 예술이나 과학이나 정치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하나란 없다'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독자로서의 하나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하나란 있음의 전체를 가리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로 고려되는 혹은 하나로 셈 되는 것으로서 어떤 한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따라서 바디우에게 '하나란 없다'는 결코 하나로 셈하기로서의 하나에 대한 것은 있다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상황은 그 상황이 하나로 고려되고, 셈 되어짐에 의해 안정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불안정한 다수가 안정의 다수의 형태를 취하게 됨은 바로 이 '하나-로-셈하기'에 의해 가능해진다. 바디우에게 '하나'란 어떤 존재의 이름이 아닌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하게 해주는 하나의 법칙으로서 어떤 작용일 뿐이고 그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실재로서의 하나를 거부하는 그의 주장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론을 떠나 현시로서의 존재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시, 존재론


순수다자multiple pur 혹은 공백vide으로서의 존재를 생각해보자. 현존이 거기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화된 상황 안에 드러난 어떤 존재를 의미한다면, 바디우가 현존과 구별하여 말하고자 하는 현시란, 엄격히 말해 존재가 하나의 구조나 상황 안에서 파악도리 수 없음을, 즉 존재가 하나로 파악될 수 있는 구조로부터 벗어나 잇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이렇게 볼 때 바디우의 존재로서의 존재, 즉 현시로서의 존재는 비어있음vide의 형태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ried(무)의 형태를 지니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바디우의 현시로서의 존재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서 불안정한 다수성 혹은 순수다자를 의미한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였던 하이데거에게도 세계 안에 던져진 '거기 있음'으로서의 개별자, 즉 현존재가 사유의 궁극적 중심 대상이었듯, 바디우에게도 '거기-있음', 즉 인식 가능한 다수가 그의 사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거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바디우에게서 다수는 둘이라는 가라짐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불안정한 다수성과 안정된 다수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다수란 상황 속에 드러난 안정된 혹은 하나로 셈이 가능한 형태를 지니는 것으로 안정된 다수성이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이 안정된 다수로부터의 출발이란 있을 수 없다.왜냐하면 하나란 있을 수 없고, 항상 새로운 존재의 출현은 바로 이 비어 있음으로부터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바디우에게서 존재란 항상 자신의 불안정성 즉 공백의 긍정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바디우에게 공백이란 존재의 고유명사로서 모든 존재 출현의 토대이자 그 자체로 무한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공백으로서의 존재가 언제나 상황의 관점에서 볼 때 초과의 지점을 갖는다는 특징은 다시 한번 '일자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바디우철학의 핵심은 불가능성의 인정에서 시작한다


수학mathematique, 존재


바디우가 하나를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서 존재로서의 존재의 이름이 순수하다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계속의 무한으로서 타자 혹은 차이를 의미할 뿐 아니라 항상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열린 체계라는 것이다. 언제나 존재가 하나의 주어진 상황을 벗어난다는 초과를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현시대의 새로운 유물론적 존재론의 틀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학은 그리스 시대 이후부터 다수성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학문으로서 자신의 본업, 즉 존재의 문제를 충실했던 학문이었다. 다시 말해, 바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절대적으로 인지하는 유일한 담론이었던 것이다. 수학적 사유 위에서 존재의 문제를 사고하려고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란 순수다수로서의 모든 질적인 차이나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하는데 바로 수학만이 이러한 모든 것을 배제한 순수 다수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에 대한 사유는 집합이론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의 공백의 존재로서 불안정한 형태를 지니는 순수다수는 필연적으로 한 상황 속에서 안정적인 형태로 드러냐야 하는데 그 때 다수란 바로 수학적 의미의 집합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칸토르의 집합이론에서 말하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에 기본 토대를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디우, 플라톤


일자를 버리고, 다자를 취하는 바디우를 살펴보자. 바디우는 일자가 없다는 전제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다자를 알게 해준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하나가 없음'으로부터 '다름'을 읽어낸다. 하나가 아닌 것은 다른것들인데, 그것은 자신의 차이성과 이질성 안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이 다른 것은 다름 아닌 타자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타자란 절대적으로 순수한 다수, 즉 바디우가 말하고자 하는 불안정한 다수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타자란 모든 구조에 모든 하나의 결과에 우선하는 것으로서의 순수 현시인 것이다.


존재와 사건



ultra초과, citra미만


바디우식 플라톤주의라 함은 플라톤에게서 일자는 버리고 다수로서의 존재만을 취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학적 사유 위에 존재론을 전개시키고 있는 바디우에게 플라톤이 수학과 관련지어서 진리의 범주의 타당성을 말하고 부활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수학을 통한 존재론을 말하는 플라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 역시 수학의 존재론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플라톤을 존재론적으로 넘어서면서 수학이 바로 존재론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것이 플라톤을 초과하는 부분이다. 


존재론과 수학을 철저하게 일치시키면서 논리학을 형식적 분과가 아닌 수학적 논리학으로서 규정, 위치 지운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스스로 미플라톤주의자라고 칭한다. 바디우는 플라톤과 다르게 논리학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의 이러한 초플라톤주의자이지 미플라톤주의자인 입장은 미묘하게도 플라톤의 사유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애매하고 유동적이며 도피적인 사유 불가능한 것이 외관이고, 수학을 포함해 정적이고 단일하며 사유에 드러나 있는 것이 관념이라면, 바디우의 경우에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대립되는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즉 바디우에게 있어서 고정적이고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안정적인 것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이 세계이고 현상계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거기-있음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이며 서로의 관계가 연결되고 결합되어 안정성을 갖는 세계이다.반면 무정부적이고 중성적이며 불안정한 것은 존재 그 자체로서 수학에서 사유 가능한 순수다수이다. 말하자면 바디우에게서 모든 존재는 '거기-있음'으로서의 존재이다.


동굴의 우상


들뢰즈, 플라톤


들뢰즈는 플라톤을 뒤집으면서 원형(모델, 원상, 오리지날)과 복사의 구분이 아닌 '복사와 시뮬라크르'의 구분에서 시작한다. 플라톤의 '티오마이오스'에 등장하는 '데미우르그'라는 창조의 신이 혼돈 속에서 만든 질서의 세계, 즉 이데아와 이데아로부터 분유받은 개별자의 세계, 그리고 거기서 불가피하게 벗어나는 혼돈의 세계인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자.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측정 가능하며 고정된 질을 잦는 사물의 차원, 즉 그러한 사물들은 영구적이거나 한시적이며, 그렇지만 후지기와 같은 정지의 순간을 갖고 있고, 현재라는 시간성과 주체의 부여가 전제로 있어야 하는, 즉, 어떤 순간에 어떠한 크기와 작기를 갖는 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사물의 차원이다. 측정 불가능한 순수생성, 즉 현재를 벗어나며 과거와 미래로, 최고와 최소로, 지나침과 모자람으로 동시에 결코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미친 듯 움직이는 생성의 차원이 그것이다'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두 의미가 동시에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작아지지 않고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 역설이고 이것은 양자역학으로 보면 작아지면서 커진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역설이 지배하며, 정지의 지점이 없이 무한이 운동하고 생성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해진 방향성도 갖지 않는 동시에 양방향을 갖는 무규칙적인 생성의 세계로서 과거와 미래를 자신의 시간성으로 갖고 있는 세계이다.플라톤을 깨기 위해서 들뢰즈는 '역설'이 지배하는 시뮬라크르가 바로 진정한 세계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들뢰즈는 스토아학파가 어떻게 플라톤주의를 전복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아카데미아의 플라톤



들뢰즈, 스토아학파


들뢰즈는 스토아학파에 대해서 '사건과 효과'를 통해서 원형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끌어낸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 세상이 이데아의 현시라고 이야기했지만,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을 시뮬라크르의 현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주의를 스토아학파가 전복한다는 것은 '시뮬라크르의 올라오게 하고, 상들이나 복사들의 권리를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디우 자신은 '현재성만 갖는 다자'를 플라톤 철학에서 취하는 반면, 들뢰즈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같은 일자를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전체로서의 하나라는 이름하에 생명이라는 이름하에 복원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지를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일자를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자라고 극단적으로 명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들뢰즈 자신이 폐쇄성을 갖는 일자를 거부하고 열린 체계를 갖는 전체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다자성이 일자와 다자의 구분이라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물음에서 빗겨난다 할지라도, 따라서 관계로서밖에 그 이름을 명명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일자 개념을 복원한 것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들뢰즈를 재강조된 플라톤 주의자로서 규정한다. 


이는 일자와 무한을 결합하려는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를 반대하는 바디우의 이론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떤 형태이든 일자를 복원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무한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한한 다자'만을 주장하는 그로서의 비판적, 대립적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들뢰즈가 주장하는 잠재성이나 시간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디우로서는 니체식의 영원회귀와 같은 의미로서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관계로서 반복을 주장하는 시간으로서의 밖의 개념, 혹은 중성으로서의 순수사건이며 순수 잠재성인 생명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바디우가 일자를 버리고 다자로서의 플라톤주의를 취한다면, 들뢰즈는 새로 복원된 잠재적인 것의 일자로서의 플라톤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 바디우의 들뢰즈 프라톤주의 전복에 대한 요지이다. 들뢰즈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전복의 근거는 불확실하고 오히려 들뢰즈 그 자신이 새로운 플라톤주의자로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 철학은 사실 일자의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일자와 무한이 연결되어 있다.


민네이션, 생각


바디우는 철저히 무신론에서 시작한다. 가정된 것들을 배제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바디우가 추구하는 존재는 결국 현상학의 끝판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하나' 혹은 '단독자'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바디우의 개념은 퍼셉트론의 인풋과 아웃풋을 생각하게 된다. 그림과 같이 여러가지 퍼셉트론의 방식으로 우리는 인식하지만 그것이 현상, 현시될 때는 하나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이지는 않고 드러나는 것만 하나인 것이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지만 그것이 모든 있는 것들을 대표하는 '하나'가 아니라 드러나는 하나이기 때문에 정의되는 것은 드러난 것이지 그것이 모든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의 시작은 바로 '없음, 공백'에서 만들어짐이다. 없는 것에서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창조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공백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존재는 바로 이 공백에서 시작한다.공백은 불안하고 정의내리수 없기에 불안정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흐름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무한하고 불안정한 다수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가 여럿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존재로서 유일하게 존속 가능한 공백의 순수이름이다. 


바디우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하나에 대한 이념 즉 하나의 이데아가 없음을 증명하며 결론짓는다. 이념 혹은 이데아가 플라톤에게 있어 사유 가능한 존재자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이념으로부터 각각 분유받는 존재자들이 잇음을 상정해 보자. 일자의 경우 그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이념 즉 하나에 대한 이데아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소피스트'에 나온느 5가지 기초가 된느 변증법적 이념에 일자가 없다는 것은 바디우가 보기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그 다섯가지 이념은 존재, 운동, 정지, 동일자, 타자이다.


지식의 나무


민네이션, 플라톤


바디우는 '진리와 주체'개념을 설명하면서 플라톤을 데리고 온다. 플라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이데아'라는 것을 상정한 이분법을 이야기하는데 바디우는 조금은 다르게 본다.바로 '이데아'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하나로 정리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이데아는 다수이다. 이미 이데아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다수를 이야기할 수 있다.또한 이데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현시되는 것들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심지어 '공백'이라는 개념도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다수를 전제하게 된다. 이데아와 현실이라는 상정만으로도 이미 다수가 된다. 공백에서는 당연히 이데아가 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다자가 산정된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다른 지점은 플라톤은 이데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면, 바디우는 현상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리가 태어나고 현시되는 지점은 바로 이데아가 아니라 현시되는 바로 지금 여기이다. 바로 진리는 '거기-있음'인 것이다.



민네이션, 차원


들뢰즈는 차원의 논리를 간파했던 것이다. 차원은 항상 개체가 커지면서 낮아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작은 단위로 갈수록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원의 문제에 있어서 물질의 차원과 관념의 차원이 나누어 질수도 있다. 이것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래서 이러한 차원의 문제는 결국은 통시성의 입장에서 고민되고 확장되어 진다. 앞으로 들뢰즈, 바디우, 베르그손이 어떤 차원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겠다. 사실 나의 고민은 이러한 관념론과 실재론이 하나로 만나는 플랫폼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일자의 철학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강의에서 배우게 되었다. 일자가 아니라 순수다수라면 그 순수다수는 과연 어느차원에 있는가? 이런 고민들을 해보는 것이다.


반복되는 것들과 존재하는 것들, 자연적인 것들과 역사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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