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의 꿈' 책소개_김상봉 저
철학자 김상봉(58·전남대 교수)이 발표한 저작들의 목록은 한 예외적 지식인의 지적 여정을 고스란히 가리킨다. 시작은 외환위기 무렵 ‘거리의 철학자’로 생활하던 때 전공인 서양철학을 친근하게 풀어쓴 대중서였다. 곧 ‘서로주체성’ 개념으로 대표되는 독자적 철학 이해로 나아간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모순을 성찰하는 드문 작업을 선보였다. 학벌주의, 재벌 개혁, 노동 등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발언도 아끼지 않았다.
김상봉의 곁에는 “그 덕에 고집불통의 주체적 학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출판 ‘동지’가 있었다. 김상봉이 단독으로 쓴 책 십여권 중 거의 대부분은 출판사 두 군데에서 나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한길사, 2000년대 중반부터는 도서출판 길이다. 한길사 기획실에서 근무했던 이승우 길 기획실장(50)이 연결고리다.
출판사를 가로지르며 근 20년간 ‘저자와 편집자’로 나란히 동행한 비결이 궁금했다. 지난달 중순 전남대 교정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는 학문과 책에 대한 둘의 마르지 않는 열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나절 가까이 진행됐다. 때로는 김상봉의 즉석 철학 강의를 방불케 한 대화 속에서 어쩌면 위태롭기만 한 국내 인문학술출판의 ‘오래된 미래’를 보는 듯했다.
-꾸준히 함께 작업을 해 온 이유라도 있습니까.
김상봉(김)= “저는 출판사라는 익명의 단체와 관계맺지 않아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책을 작업합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경우는 의미있는 기획을 가져왔을 때 뿐이고요.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왜 그런가요.
김= “인간에 대한 예의죠. 우리 출판사 책 쓰느라고 바쁠텐데 엉뚱한 짓 하는 것 아니냐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잖아요.”
이승우(이)= “새로운 책 작업에 대해 항상 먼저 이야기를 하세요. 언젠가는 정색하고 앞으로 나올 자신의 책에 대한 저작권을 일임하겠다고 하셨어요.”
김= “제가 매인 몸이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웃음) 일을 매개로 만났지만 20년 넘게 동지적 관계이자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까 서운함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2005년 전남대에 부임하기까지 김상봉은 꽤 오랜 시간 강단을 떠나 있었다. 독일 마인츠대학에서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해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있다 해직됐다. 철학 강의와 연구를 쉬지 않았던 그에게 한길사에서 철학 대중서 집필을 제안했다. 이승우는 20여년 전 김상봉의 <호모 에티쿠스> 원고를 처음 접했을 때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참에 원고를 받고 세 시간을 꼼짝도 않고 읽었습니다. 그전까지 국내 철학자들의 글과 전혀 달랐어요.”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1995년 한길사 기획실에서 일을 시작한 이승우는 “당시 일을 배우는 위치였지만 김상봉이라는 저자는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김상봉은 <나르시스의 꿈>,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등 잇따라 철학 저작을 냈다. 김상봉은 “한길사에서 학자로 대접을 받은 셈”이라며 “나를 먼저 알아 본 사람이 바로 이승우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는 당시 꼼꼼하게 원고 교정을 한 편집자 오동규씨(현 문학동네)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원고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오른쪽)와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김유진 기자
-두 분 관계가 한길사를 떠나서도 이어졌습니다.
이= “한길사에 있을 때는 너무 바쁘기도 했고요. 제가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됐다고 봐야죠.”
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니까(웃음). 술 한 잔 하는 사이가 됐죠. 원래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가요. 상대가 불의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이= “저도 저자와 한 번 맺은 인연을 잘 끊지 않아요. 선생님과 가장 오래됐지만, 사회학자 김덕영, 발터 베냐민을 전공한 최성만 선생님들과도 적어도 10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김= “제일 힘들었던 책은 고명섭 기자와의 대담집 <만남의 철학>이에요. 이승우와 저 모두 꼼꼼하지 못하고 즉흥적인 부분이 있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중구난방 브로맨스’의 절정판이랄까요.”
이= “늘 선생님 머릿 속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책을 만들면서 어린 시절이나 사유방식, 삶의 변곡점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김=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아까운 책이지만, 차차 많이 읽힐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트남에서 번역되기도 했어요.”
-평소 어떤 식으로 작업하시나요.
김= “(이승우가) 사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편집자가 내용에 개입하면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인문학 서적을 출간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학문 자율성을 전적으로 존중해줘서 좋습니다. 편집자가 인문학자의 조수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혼자서 다 합니다. 물론 어떤 책을 쓰든지 간에 편집자가 첫번째 독자니까, 그의 첫 반응이 내게는 바로미터입니다. 요란한 코멘트가 아니더라도, 말 한 마디나 표정을 보면서 감을 잡는 거죠.”
이= “편집자가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에요.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해 알고 있어도, 해당 저자와 논쟁할 수준은 아닙니다. 다만 흐름을 아니까 어떤 책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거죠.”
이승우는 김상봉이 “가장 큰 저자이자 스승이다”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문제의식이 다른 책을 기획할 때도 지침이 됩니다. 관심 갖는 주제가 있으면 좇아가야 합니다. 가장 큰 저자이자 지적 스승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요. 중세사상, 클래식 공부를 그렇게 시작했어요.” 이승우를 ‘제자’라고 생각하느냐는 우문에 김상봉은 “한국 주요 저자들을 꿰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떤 주제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까지 손바닥 보듯이 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학자로서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책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한결같은 프로”라며 “학자들에 대한 배려심이 커서 나 뿐 아니라 힘든 학자들을 기꺼이 도와주려는 모습이 고맙다”고도 했다.
-만나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나요.
김= “공부 이야기죠. 내 속의 학문적 열정을 거침없이 토로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수들끼리도 잘 하지 못해요. 잘못하면 선을 넘는 것으로 여기니까요.”
이= “일을 하다가 침체되거나 느슨해질 때마다 선생님을 뵈러 옵니다. 방학 기간 머무는 제주의 거처에도 가고요. 밤새워서 대화를 나눈 적도 여러 번인데, 이를 통해 편집자로서 받는 자극은 값어치를 매길 수가 없어요.”
김= “한번은 경제경영서를 내 볼까 하는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결국은 안 했지만, 열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지요. 그렇게 격려하면서 20년이 흘렀어요.”
두 사람은 현재 함석헌 사상 연구서와 데카르트의 첫 저서 <음악입문> 역서를 진행 중이다. 함석헌 책은 원고지 약 2000장 분량으로 예상하는데, 절반 정도 집필한 상태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말 내지는 내년에 출간하는 것이 목표다.
-함석헌 연구를 계속 해 오셨죠.
김= “스스로를 함석헌의 ‘사도바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과 예수의 관계처럼 함석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고요. 바울이 없으면 예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민주화운동에 대한 공로만 부각된 측면이 있는데 철학자로서 함석헌을 조명하려고 합니다. 함석헌 사상에는 우리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이 포함되어 있어요. 외국 철학자들의 말은 결국 남의 이야기에요. 철학은 보편학문이지만 결국 문맥으로부터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칸트가 5.18을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동안 쓴 논문을 묶으면 책 한 권이 나오지만, 그렇게는 하기 싫습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1987년부터 써 온 철학 공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철저성을 중시하는지, 모든 내용을 문헌학적 근거로 뒷받침합니다. <음악입문> 역서가 늦어지는 것도 각주와 해제 때문이에요. 서양철학에서 음악과 수학의 관계까지 담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 “시나 소설과 달리 음악은 음의 자기관계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양 정신의 핵심인 홀로주체성을 표상하는 것이죠. 서양철학에서 새로운 이론이 나올 때는 항상 새로운 음악이론이 탄생했고, 음악이론은 수학에 뿌리가 있습니다.”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지난 1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함석헌의 ‘사도바울’이라고 여기고 함석헌 사상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며 “음악학과 뇌과학, 물리학, 수학 공부도 계속해 생을 마감할 때는 음악학자이자 과학자이고 싶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함석헌의 ‘사도’를 자처하는 김상봉 역시 스승처럼 사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치열한 사유를 펼쳐 왔다. 학벌중심주의 타파(<학벌사회>)와 기업 민주주의(<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저작에서는 철학은 물론이고 사회학·역사학·경제학·경영학·법학 등을 아우르는 작업을 했다. 김상봉은 “학계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며 “현실적합적 학문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인가,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학문을 해서 그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몇 년전에는 광주시 사회통합지원센터장을 겸직하며 노사 상생모델 ‘광주형 일자리’를 연구했으나, 취지 왜곡 등을 비판하며 그만뒀다. 그는 “대통령이 이재용을 인도에서 만나고, 수소경제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정권이 재벌 개혁을 할 것이란 기대를 접었다”며 “최저임금 문제도 재벌은 건드리지 않고 자영업자만 쥐어짜다보니 을들의 싸움을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나요
김= “함석헌 책을 마무리짓는대로 음악에 관해 책을 쓸 계획이에요. 음악학자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요즘은 뇌과학, 물리학을 공부합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과학적 연구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성할 때가 이미 지났습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 학문은 실체, 입자만을 보는데,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만남이거든요. 만남이라는 철학적 존재 이해를 통해 미시, 초거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연구년을 얻게 되면 수학 공부까지 해서, 죽을 때는 과학자로 죽고 싶습니다.”
-출판, 특히 학술출판이 위기라고들 합니다.
이= “돈을 강조하다보니 저자들에게도 계속 이렇게 써야 잘 팔린다, 너무 학자스러워서 시장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식으로 했죠. 그러면서 폐허가 됐습니다.”
김= “저자의 개성적 문체를 살리는 것이 편집의 본령이 아닐까요. 글이 평준화, 일반화되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 “어렵지만 출판계가 학문적 세계에서 독자성을 갖고 힘들게 공부하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저라도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학술출판이 그나마 실핏줄처럼 남아있게 될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도 인문 학술출판만 똑바로 해도 존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요.”
김= “출판은 학문의 역사와 같이 발전합니다. 100년 가는 출판사는 100년 가는 철학과 함께 갑니다. 둘이서 함께 보여주고 싶습니다.”
김상봉을 만난 날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오래간만에 피아노 레슨을 받고 왔다”고 전했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피아노를 시작한 그에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연주하겠다는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 평도 안 되는 책상, 거기가 제 싸움터이고 현장이라고 생각했지요”(<만남>)라던 그가 이제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는다. 20년지기 출판 동지와 만들어갈 책 만큼이나, 철학자가 뭉툭한 손가락으로 빚어낼 선율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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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집 밖에 나가지보 않은 상자속에 갖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같다. 안톤체호프의 소설 '상자속에 갖힌 사나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자신이 주체subject라는 관점에서 한번도 바깥으로 나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1950년대 미국 메카시즘의 이분법처럼 될 것이다. 혹은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선'의 정치를 이야기할 것이다.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항상 기본 뿌리로 생각하면서 자유를 이야기하고 인권을 이야기하고 경제발전과 국제질서를 이야기하는 정신 속에서 우리는 항상 '대상'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서양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은 다시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리라.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그럼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생각의 차원에 돌입해야 '주체'로 인정을 받는가? 쉽게 자본의 소유로 정체성을 쥐어주는 경제적 관점을 넘어서자고 하면서도 다시 '홀로 주체성'으로 돌아오는 지식인들의 범주는 항상 서양정신에 대한 답습과 함께 사대주의적인 유토피아주의가 숨어 있다.
겨우 베르그송이나 들뢰즈 정도가 바깥의 철학을 이야기할 뿐 세계적인 포퓰리즘 현상에서는 다시 '정체성과 주체성'의 실타래가 엮이고 있는 측면도 있다. 서양의 주체성은 요요현상처럼 다시 강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가 이야기 하는 홀로주체성을 넘어서는 서로 주체성이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미국, 유럽을 벗어나야 하는가? 이이제의'의 방식으로 대답해야할까? 아니면 이것 말고 다른 범주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무엇인가에 '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의 주체성 개념을 빠져나온 것일까? 1930년대의 지식인들처럼 부유하는 액체 근대 속에서 왜라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번 'why?'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홀로 주체성'에서 빠져나와 '서로 주체성'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