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 민스키_철학아카데미
20180403_철학아카데미
마빈민스키_조광제
마음의 사회_Marvin Mi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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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학기에 우리는 마빈 민스키의 ‘society of mind’ 1장을 살펴보았다. 민스키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작은 단위의 뉴런들이 아떻게 신경조직들이 되고 새로운 내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지이다.agent에서 acency로 그리고 마침내 society로 발전하는 개념을 부분과 전체의 논의에서 살펴보자. 비록 이번 한번의 시간으로 민스키에 대한 서론은 끝나지만 앞으로 원전을 찾아보면서 다중 퍼셉트론과 딥러닝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기계와 어떻게 다른지? 민스키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민스키, 책소개
인공지능을 앞세운 고도과학기술의 위세가 강력하다. 대전환기다. 인공지능의 정체를 그 근본에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1927〜2016)의 《The Society of Mind》(1985)가 교재다. 그런데 위 책 《The Society of Mind》에는 인공지능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마음을 발동하여 행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떻게 마음을 발동시켜 행동하는가를 저 습관화된 무의식적인 저변을 훑으면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마빈 민스키의 입장이다. 이러한 마빈 민스키의 생각들을 자료로 삼아 우리 나름으로 각종 철학적인 개념들과 생각들을 추출해 내어 여러모로 배워보고자 한다.
이 책은 270개의 기가 막힌 내용을 담은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학기에 이어 계속해서 강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번 봄 학기에는 2장의 <전체들과 부분들> 6개, 3장의 <충돌과 타협> 6개, 7장의 <문제들과 목표들> 10개, 그리고 8장 <기억의 이론> 11개를 읽고 분석하고자 한다. 마빈 민스키는 본래 수학자다. 그런데 인공지능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로서 활약하면서 MIT 인공지능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고 인공지능 관련 저술도 많이 했다. 인지과학과 심리철학 분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천재 철학자이기도 하다.
민스키, 마음의 사회
민스키가 고민한 ‘마음의 사회’는 사실 그렇게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의 사상을 공부하다가 보면 몸의 철학에서 자연스럽게 뉴로사이언스로 발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민스키는 일단 자신의 마음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의 구조를 복사한 다음에 기계에서 붙여넣기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mind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각각의 신경회로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구성하고 여러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경회로, 뉴런
뉴로사이언스의 입장에서 볼 때, 뉴런들이 결합하여 신경회로가 되고, 두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뉴런은 하나의 신경세포이고 정보를 수집하는 축색과 정보를 송출하는 수상돌기로 구성되어 있다. 수상돌기와 축색이 연결되는 것을 ‘시냅스’라고 부른다. 수상돌기의 하단에서는 분자가 이온화되면서 전자가 축색의 구멍으로 유입되면서 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냅스는 사실 서로 완전히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전자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연결된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략 세포 1개의 축색과 수상돌기가 각각 5000천개 정도가 된다. 그 말은 한번에 한개의 세포가 5000개 정도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편차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평균 5000개이지 최대 10만개 정도의 전자들이 이동하는 전자도 있다. 이러한 뉴런들이 시냅스로 연결된 것들이 바로 신경회로라고 한다. 청각을 담당하는 신경회로, 시각을 담당하는 신경회로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로 다른 신경회로들이 서로 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움직임은 한번에 여러가지의 신경회로들이 복합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경회로들의 연결을 neural network라고 부르면서 신경망이라고 부른다.
신경회로, 움직임
신경회로가 시냅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제 우리의 행동에서 신경회로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균형과 안정을 가지고 있던 신경회로들이 움직이면서 그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서 몰리게 된다. 몰린다는 마른 전자의 이동이 사건을 해결해야하는 신경회로로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무 큰 사건이 일어나면 트라우마가 되는데, 그 트라우마가 일어나면 너무 많은 신경회로들이 연결되면서 뭉치게 되고,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고 멈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뭉쳐있는 신경회로들이 기존의 평균적인 신경회로망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민스키, 이론
민스키는 행위자를 agent라고 불렀다. 이 agent들이 어떤 기능을 가지게 되면 agency가 되고 행위기구가 된다. Agency에도 하위행위기구가 있고 상위 에이전시가 있을 수 있다. 왜 마음을 민스키는 사회라고 하는가? 바로 이러한 agent들이 모여서 하나의 군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듯이 우리의 마음 전체는 수 많은 agency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을 생각해보자.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민스키의 이론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작동하지 않을 때는 사람이 죽은 것인데, 죽은 사람에게는 뉴런들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도 없다. 신경체계 안에서 마음의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생명이 사라져버리면 마음의 사회도 순간 붕괴하고 사라진다는 것이 민스키가 바라보는 관점이다. 민스키에게는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난해한 수학 알고리즘을 풀 때 보다 더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관계가 먼저이고,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전체, 부분
2장의 제목은 ‘전체와 부분들’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개별자들을 근친으로 만드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물질적인 원자들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로부터 마음이 건립되는데, 그 물질적인 원자들의 모양과 형식 또는 방식에서의 차이들은 모두 다 사소하다.’ 라고 했다. 민스키는 자신의 친구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글을 2장에서 가지고 오면서 마음이 관계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분들, 연결들
우리는 건축가의 솜씨가 갖기와 올리기라는 더 단순한 솜씨로 환우너될 수 있다는 것을 1장에서 보았다. 그런 뒤, 우리는 더 단순한 솜씨들이 어떻게 또 다시 더 작은 솜씨들로 만들어지는 가를 보았다. 갖기는 찾기가 방금 발결한 블록을 잡기하는 손을 움직이기하도록 하는 것을 필요로 할 뿐이다. 올리기는 손을 움직이기 하도록 해서 손이 탑의 꼭대기에 그 블록을 올려놓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의 모든 기능들이 더 단순한 부분들이 할 수 이쓴 일들로 ’환원’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 건축가는 찾기, 갖기, 올리기와 같은 부분들과 그 외 나머지 부분들의 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 행위자들이 적절한 상호연결의 망을 통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건축가는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예측
당신이 오른쪽 목록을 방금 쭉 읽었다고 하자. 그것만으로 건축가가 무엇을 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가?물론 불가능하다. 예측이 가능하려면 각각의 행위자들이 다른 행위자들에 대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공동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개인들이 각자 따로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있으려면 그들 개인들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크고 복잡한 일을 이해라는 데라면 다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우리는 각기 분리된 부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 부분들이 그것과 연결된 다른 부분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모든 국소적인 상호작용들이 그 체계가 하는 일을 어떻게 성취해내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두뇌, 세포
인간 두뇌의 경우, 이 세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선 우리는 두뇌의 세포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데 두뇌의 세포들이 수 백 가지의 유형들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각 유형의 세포들이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유형의 세포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상호작용들에도 수 백 가지의 다른 종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나선다. 그것은 수 십 억 개의 두뇌 세포들이 어떻게 조직되어 사회들을 형성하는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많은 새로운 이론들과 유기적 조직형성에 관련된 개념들을 재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두뇌가 다른 하등 동물들의 두뇌로부터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이 과제의 해결은 그 만큼 더 쉬어질 것이다.
홀리즘, 아토미즘
민스키가 이야기하는 것은 홀리즘이다. 사회는 부분들의 집합으로 전체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것이 아토미즘atomism이라고 한다. 여기서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고 할 수 있고, 부분을 넘어서는 전체는 없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체론 즉, 홀리즘은 전체는 부분들의 결합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것을 때로는 emergence라는 창발의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연결되다가 보며는 새로운 조합과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작은 원자단위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고 연결되어만 기능이 생긴다는 것이 홀리즘이고 민스키는 이러한 홀리즘을 바탕으로 두뇌 안에 존재하는 마음의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 정의
Auto-orgnization 혹은 autopoiesis라고 하는 자가발전을 생명의 본질로 보는 마투라나의 사상을 보자.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heteropoiesis라고 부른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관계나 조직들은 스스로 작동하지 못하고,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마투라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어떤 유입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위계, 병렬순환조직
보통 민스키의 이론을 따라가다가 보면 뉴련들이나 신경조직들이 위계적 질서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hierarchy로 움직이지 않고 heterarchy라는 병렬순환조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위계에 존재하는 상위뉴런과 하위뉴런이 막혀있지 않고 새롭게 계속 연결되고 움직이고 창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세포들은 사실 이렇게 계속해서 소통하고 연결하면서 격없이, 막 없이 네트워킹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따라서 이 개념이 바로 우리 세포의 민주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변론자, 환원론자
기존의 관념들에 의존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환원론자reductionist라고 부르고, 새로운 가설들을 옹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개변론자novelist라고 부르자. 환원론자들은 오랫동안 살아 남는 개념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 많다. 오래된 기존의 생각들은 그렇게 오래된 만큼 결점들을 드러낼 시간도 그만큼 더 많이 거쳐왔기 때문이다.
물리학, 심리학
많은 과학자들은 화학과 물리학을 심리학이 닮아야 할 이상적인 모형으로 여긴다. 결국 두뇌속의 모든 원자들은 다른 모든 형태의 물질을 지배하는 전 포괄적인 동일한 물리법칙들에 종속된다. 그렇다고 그 동일한 기본 원리들에 입각해서 우리의 두뇌가 실제로 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수십 억 개의 두뇌 세포들 하나하나가 각기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두뇌가 하나의 행위기구agency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일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의 법칙들은 두뇌 세포들의 속성들에 의거할 뿐만 아니라 두뇌 세포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그 방식들에 의거해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 연결들은 물리학적인 ‘일반적인’ 기본 법칙들에 의해 확립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우리의 유전자들 속에 들어 있는 수백 만 비트의 정보들의 특정한 배열에 의해 확립된다. 물론 ‘일반’ 법칙들은 모든 것에 적용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반 법칙들은 특정한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심리학이 물리학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그 나름의 법칙들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다른 법칙들의 문제가 아니다. 상위수준의 조직연관에서 어떤 부가적인 종류의 이론들과 원리들이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다. 건축가가 하나의 행위기두로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건축가에 속한 하위 수준의 행위자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상충할 필요도 없고 상충해서도 안 된다.
상위, 수준
각각의 상위 수준에 대한 기술은 하위 수준에 관한 지식을 대체해서는 안되고 거기에 덧붙여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수준’에 관한 생각들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과학들은 그들이 다루는 주제들을 정말 몇 안되는 원리들로 성공적으로 환원했다. 심리학은 그렇게 성공한 과학들을 과연 닮아야 할까? 대압은 ‘몇 안되는’ 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에 달렸다. 물리학의 경우, 아마도 12개의 기본 원리들에 입각해 설명을 수행해 왔다. 심리학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이론들을 결합해야만 설명이 될 것이다. 물리학자들에 수백은 너무 큰 숫자로 여겨질 테지만, 인문학자들에게 수백은 너무 적은 숫자로 여겨질 것이다.
독일철학, 신체
독일철학 특히 훗설 철학에서는 leib가 신체이고 그 다음 seele라는 심리였고, 마지막으로 geist정신으로 다다른다고 생각했다. 신체에서 감각되는 것들이 심리를 만들고 이것이 정신으로 발전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민스키에게서 mind는 seele심리와 geist 모두를 일컫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심리와 정신을 합쳐서 민스키는 마인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식이라는 것은 정신의 영역으로 가게 되면 개념이 되고, 감정의 영역으로 가게 되면 심리가 된다. 지각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gestalt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게슈탈트 이론은 figure라는 형상과 배경의 합으로 지각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어떤 배경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부분, 전체들
우리는 어떤 전체들은 ‘그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는 이 언명이 ’전체론적’ 그리고 게슈탈트’와 같은 경건한 용어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학술적인 풍모를 지닌 이 용어들은 명료하고 확정된 관념들을 지시한다는 함축을 깔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용어들의 실제 기능은 무지함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데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사물들이 결합되어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때 그 작용을 일컬어 ‘게슈탈트’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일에 의해 방심의 허를 찔렀을 때 그래서 생각했던 것만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전체론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래 두 다발의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첫 번째 다발의 질문들은 ‘주관적’이고, 두 번째 다발의 질문들은 객관적이다.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 하나의 선묘를 그 하나하나의 선들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인격은 기질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 되는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문화는 관습들의 단순한 결집 이상의 것이 되는가?’이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이 하나의 탑을 개개 블록들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가? 왜 하나의 사슬은 그것의 여러 고리들 이상의 것인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벽은 많은 벽돌들의 집합 이상의 것이 되는가?’이다.
질문, 해석
두 번째 다발의 객관적인 질문들은 왜 첫 번째 다발의 주관적인 질문들에 비해 덜 신비하게 느껴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입각해서 그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들을 확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이라든가 탑이 어떻게 작동하여서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경우, 우리는 그저 개개 블록들이 서로 이웃하여 중력에 의거해서 어떻게 제 자리를 지키는가를 지적해 주기만 하면 된다.
사슬-고리들이 왜 따로 떨어지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각각의 사슬-고리가 자신과 연결된 다른 사슬-고리들에 어떻게 이웃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끼어 들어가는가를 진술할 수 있다. 성인들이 듣기에 이 설명들은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아이였으 ㄹ때 이 설명들을 들었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배우는데, 예를 들어 두 대상이 어떻게 해서 동일한 위치를 점유하지 못하는가를 배우는 데 여러 해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러한 지식을 배워 획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관, 난해
그렇다면 선묘나 인격 그리고 문화적인 전통 등에 대한 우리의 반응들을 설명하는 일은 왜 이보다 훨씬 어려운 것처럼 보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주관적인’ 종류의 질문들은 그 속에 우리의 마음들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곧 대답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선 우리의 마음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 뿐이다. 주관적인 반응들 역시 사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다른 점은 주관적인 반응들의 경우, 우리가 외부 세계의 대상들에 관여하지 않고 우리 두뇌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이나 기질 그리고 생활양식에 과한 질문들은 실제로 아주 미묘하다. 이 질문들은 우리의 마음들에서 행위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과학들이 역시 전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사안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조만간 때가 되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론적인 이라든가 게슈탈트’와 같은 사이비 설명 용어들을 고집한다면 대답을 듣게 되겠지하고서 기다리는 시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때때로 사물에 이름을 부이게 되면 풀려고 하는 신비한 일에 대해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름 붙이기를 통해 이름 자체가 의미를 정밀하게 만든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면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기론, 베르그송
생기론이라는 것은 vitalism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생명이 물체 안에 들어갈 때 생기가 된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하고, 그 생명이 물질과 만났을 때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 자체를 따로 본다는 의미에서 생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스키는 생기론 자체를 부정한다. 당연히 부정한다. 물질과 생명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작용방식, 정보처리 방식이 생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마음의 사회’라는 것은 내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bio-politics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내면의 민주주의라고 할 때 민스키가 이야기하는 agency들의 민주적인 운영방식을 사회로 투사해 낼수도 볼 수 있다. 프랙탈개념으로 나는 이것들이 서로 같은 동일성을 가질려고하고, 그러한 동일성은 1, 2, 3차원으로 가는 완전성을 가지고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차원의 논의에서 1차원에서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2차원에서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내가 풀어야할 숙제가 있다. 바로 영혼과 마음의 문제, 초월성의 문제와 선험성의 문제이다.
인간의 영혼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가? 과학이 이야기하는 21그램도 안되는 영혼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에서는 초월성 자체를 부정성으로 둔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 영혼, 귀신과 같은 것들은 과학주의에서는 타부시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은채로 존재를 증명해내야하는 과정에서는 물질이나 인식이냐라는 차이만 있다.
내가 해결하고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시간의 개념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bio차원은 사회를 이루어서 유기체인 organic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것들이 모여서 eco를 이룬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병렬순환조직
여기서 중요한 것, 아니 내가 해결하지 못한 부분은 헤겔로 치환되는 위계질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세포들 그러니깐 단위로 치면 bio 차원에서부터 세포들은 병렬순환조직, 상호참조조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말은 위계는 존재하지만 서로 참조하면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는 머리가 있고 팔다리가 하위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병렬순환조직으로 존재하는 뉴런, 세포, 분자, 원자, 네트워크들은 중요도라는 개념이 없다.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은 autopoiesis적으로 계속해서 민주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전체
민스키가 말하는 ‘전체가 항상 부분보다 크다’라고 하는 것은 칸토어의 정리에서도 이야기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럼 그 전체는 어떤 수준에서는 확장이나 창발을 정지할 텐데, 그럼 그러한 잠재성은 언제 설정이 되었는가? 다시말하면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로 간다고 해서 큰 단위는 이미 전체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이것은 언제 전체가 정해지고, 어떻게 정해지는가? 민스키의 이론으로 보면 작은 단위들이 물론 상호작용하기는 하지만 큰 단위로 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는 않은가? 세포들도 어느순간이 되면 분열을 멈추고, 조직들도 어느순간이 되면 멈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그 세포들은 어떤 제한에 의해서 적정수준을 넘어가지 않게 되는가? 이런 고민이 생긴다.
민네이션, 프랙탈
민스키 역시 6개의 정육면체의 상자를 만들 때 하나씩 연결된다고 해서 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6개가 연결되었을 때만 상자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랙탈 방정식에서 1차원으로 가지 못하고 0.9정도의 차원에서는 작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사회에서는 바로 이러한 자기 완정성의 원자들이 서로 사회를 이루지 못한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스키의 이러한 이론을 받아들여서 퍼셉트론은 그 자체로만 기능하지 않고 다층 퍼셉트론이 만들어져서 네트워킹이 되어야만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민스키에게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인공지능이 판단하려면 일단 ‘선’이라는 것이 감각과 경험을 수만번 쌓은 다음에 패턴을 만들어서 ‘개념’이 잡히면, 그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는 여러갈래를 파악해야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선’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재 속에서 다시 ‘악’이라는 개념이 잡혀야 하고, 다시 선과 악이 연결되는 방식을 파악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는 가운데서 가치와 가치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사회가 점점 고차원적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민스키가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지만 몸과 생명이 같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는 아직도 의문이 많이 생긴다. 낭만주의자들을 ‘생기론적 범신론’이라고 하는데, 민스키는 철저하게 다른 차원에서 자신의 논의를 발전시켜서 결국에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