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406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철학_유종렬
물질과 기억_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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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첫번째 책은 언어가 없이도 우리의 의식에 무매개적으로 다가오는 ‘인상, 감각, 심리’에 대해서 쓴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물질과 기억’을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특징이 사실은 이중론을 보게 될 것이다.
물질, 기억
생리학도 철학도 정신과 물질 다시 말하면 영혼과 신체의 연관 문제는 늘 회피할 수 없었다. 베르그손은 이 문제를 기억과 두뇌 사이의 고나계를 다루는 실험이나 경험적 지평 위에서 제기한다. 그는 그 시대에 매우 잘 연구되었던 기억에 관한 질병을 낱낱이 연구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의식에 관한 열쇠를 줄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기억과 두뇌의 연대성만을 반복설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대를 평행론으로 이해한 해석은, 그 이름을 말할 필요 없이 어떤 형이상학에 속한다. 데카르트 이원론, 데카르트의 계승자 켈링크스와 말브랑쉬의 기회원인론, 스피노자의 양면론, 라이프니쯔의 조화론 등은 이우너론에 대한 해결을 위한 각각의 철학은 전개한 것이다.
인간, 이마쥬
사번적인 착각도 과학주의의 착각도 물리치고, 베르그송은 제 1장에서 그 시대에 매우 유행하고 있었던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비생산적인 대립을 넘어서서 생각과 관찰의 입장에 선다. 실재론과 관념론,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마쥬의 현전presence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체라는 이마쥬는 지각perception과 정서affection에 의해 동시에 주어지는 유일한 이마쥬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체와 기억이라고 부른다. 베르그송은 1911년 서문에서 관념론의 표상representation과 실재론의 사물chose사이에 중간쯤mi-chemin에 있는 것이 이마쥬라고 한다. 이 유일한 이마쥬에 의해서 우리는 다른 이마쥬의 행위작용을 할 수 있다.
나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은 나의 신체가 대상들을 향해sur les objets 가능한 행동을 반영한다. 그리고 나의 의식은 나의 신체의 행위가 덜 자동적일수록 더욱 범위가 크고, 의식이 앞에서 다른 대상에 대한 행위에서 행할 가능성은 더욱 넓어진다.
정서, 순수지각
정서적인 요소를 뿌리친 순수지각은 어떤 주관적 성격을 지니지 않고, 개읹거 기억과도 완전히 독립적이며, 모든 신비적 능력을 지닌 물질인 정신없는 나의 신체와 일치한다. 순수지각은 표면으로부터 내려갈 경우 신체 내적 첫 번째 층에 해당한다.그리고 더 내려가면 이 층과 연관이 있는 애정적 층이 있고 그 아래에는 총체적 기억의 층이 있다. 순수지각은 조건반사처럼 행하는 듯하지만 외적이 아니라 내적으로 반사하는, 물질에 직접적인 지각이다.
그래서 두 가지 가설이 제기된다. 그것은 중에 하나는 두뇌는 행위의 도구이지 표상의 도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순수추억은 근본적으로 본성상 지각과 다르며 정신이라는 기억에 속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2장
기억에 대한 세밀한 연구는 가설을 검증할 수 있게 한다. 제 2장에서 베르그손은 기억의 두 형식이 있따는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는 비인격적 운동 습관 즉 과목을 암송하는 기억이다. 다른 하나는 내밀하고intime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과거 기억이다.
내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자동적이 결코 아니다. 이 환기는 인접, 변죽, 암시, 넌지시 알려주는 방식등이다. 그러므로 사유되기보다 상연디는 순간적인 재인식과 추억-이마쥬를 재발견하고 확인하게 하는 소묘적 운동이 작용하는 주의깊은 재인식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의식의 수준을 구별해야 한다. 이 수준들에 따라 사람들은 기억 속에서 무매개적으로 유용한 것만을 찾아내거나 또는 그 속에 전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특별한 예가 말투parole의 예이다. 기억에 대한 여러 질병인 기억상실증, 싫어증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하였던 베르그송은 이미 알고 있는 말투의 운동 도식을 해석의 활동적, 능동적 기제로 밝힐 수 있었고, 추억들이란 현실화되기 위하여 운동의 보조자를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대담자와 마주하는 우리는 ‘우리 지적 작업의 말투le ton de notre trvail intellectue’를 규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해석이란 관념이 청각으로 가서, 그 다음에 질료적으로 지각된 소리와 재결합하기 위하여 연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기억, 3장
제 3장은 과거의 차원을 추억의 본질로서 제시하고, 추억을 모든 지각과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는 항상 현재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험된 경험의 총체성을 이용한다. 따라서 두 개의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다른 수준들이 있다. 여기서 기억의 수준이란 추억의 두께와 집적과정을 말한다.
이 수준의 차이로부터 우리의 인간 성격의 여러 다른 전형들, 일반관념의 구성, 유사와 인접에 의해 추억자체들 사이의 연합등을 이해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4장
제4장은 결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과 신체의 통합의 문제를 다시 발견한다. 왜냐하면 두뇌는 추억을 환기하는 필수적 기관이긴 하지만, 기억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행동의 기관인 두뇌는 폐쇄막obturateur과 같아서, 추억들 중에서 유용한 추억만을, 그리고 유용한 형식으로만 통과하게 한다.
유용한 형식으로 통과하는 것은 꿈 만들기 하는 작은 자아moi의 능력faculte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은 자아는 유용과 실용에 관여한다. 과거는 정신의 차원영역이며, 지속으로 부터 온다. 과거의 총체는 기억의 총체이며, 이 총체는 현재에 있으며, 현실에 영향ㅇ르 미치고 있는 지속이며, 한 인간의 고유한 인격이다.
운동을 분석해보면, 운동 속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에 본질적인 연대성이 있다. 무한정하게 나눌 수 있는 동질적 공간espace은 구체적이고 불가분적인 부피와는 다른 기호로서 나타난다. 지각은 의식과 물질 즉 영혼과 신체의 접촉 장소이다. 사실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는 종합적 이원론도 사람들은 어떻게 정신이 물질에 근거하며, 또한 순수지각의 작용에서 물질과 연합될 수 있는 지를 이해하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다시 형상주의라는 상층의 관념론과, 심층주의라는 심층의 실재론의 사유를 시작했다. 메타인지를 가지고 위 아래를 다 들여다 보는 시간들 가운데 인간의 존재와 사회, 과학과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물질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데카르트의 방식처럼 일정한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대상object를 조작적으로 늘어뜨려서 순서를 지우고, 연역으로 정리하는 방식은 실제적이지 않다.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고, 붙어 있고 덩어리져 있다. 우리의 신체도, 언어도, 생각도, 먹는것도 다 하나의 몸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러한 덩어리들은 지속을 가지고 생명을 연장해 간다.부분을 끼워 맞추면 전체가 나오는가? 모든 것들을 늘어 뜨렸다가 하나로 다시 뭉치면 전체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의 연속성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미분과 적분 사이에 있는 것이 존재와 생명이 아니다.
민네이션, 분할
고대에는 상층의 관념론만을 다루었고 계몽주의 이후에 과학주의가 성행하면서는 심층론만 다루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이원론이라고 할 수 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신체와 기억, 물질과 기억에서 이원론이 아니라 ‘이중론’을 보여준다.
사물은 서로 대비되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정확히 겹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칭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축회전을 해야만 겹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겹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것을 찍어서 나눈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생동하고 발생하는 것은 원래부터 하나에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에서 계속 하나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질을 실제로 자르는 실험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분법은 분할하지만 실제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할하지도 않는다. 이게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층에서는 상층을 생각할 때 거짓말 혹은 상상계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라캉
베르그송의 도식으로는 라캉의 신체는 기호계적코라에 붙어 있고, 타자는 상징계적 코라에 붙어 있다. 그리고 큰 타자는 형성철학의 일자와 비슷한 상태로 계속 커지고 있다. 무의식Moi는 심층철학의 일자에서부터 기호계적코라까지 뻗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송이 볼 때는 큰 사물Soi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주이상스인 큰 사물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라캉의 세미나 7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아는 큰사물과 만나서 무너지고 다시 자신의 욕망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호계적 코라에 붙어 있는 자아가 자신의 방식으로 형성철학의 영역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연결되는 부분은 덩어리에서 만들어지는 발생학, 생기론이 자신의 상상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도 베르그송도 지속하는 생명 가운데 만들어지는 인간 주체를 상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