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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14. 2018

재현과 생산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_철학아카데미

20180413_철학아카데미

질과 기억_류종렬

표상, 재생산, 이미지



들어가기


상징계적 코라에 붙어 있는 사람들을 베르그송은 ‘소박한 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했다. 왜냐하면 상징계적 코라를 내려가면 대칭적으로 기호계적 코라가 있고, 그 기호계적 코라 아래에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


실재는 절반정도 내려온 상징계적 코라가 아니라 그 차원을 더 내려가서 물질의 원료인 ‘마스’까지 다다라야 한다. 그래서 세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스펨트럼은 기본적으로 ‘관념론 안의 스펨트럼’을 포함한 실재론까지 가야 한다.


‘전제-관점-원리-실행-개별화’라는 5ps이론도 사실은 관념론 안에서 일자에서 코라로 내려오는 과정일 뿐 실재계는 아직 다루지 않았다. 실재계를 다루기 위한 ‘개별화’까지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5ps도 사실은 ‘관념론’에 속한다. 순수일자에서 상징계적 코라의 ‘소박한 실재론’까지 내려왔을 뿐이다.


관념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했고, 생철학은 스피노자에게서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순수일자인 ‘마스’(덩어리, 세포)에서 기호계적코라까지 가는 과정이다.


이로써 ‘순수일자인 신-상징계적코라-(노마드)-기호계적코라-순수일자인 덩어리’까지 전체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선생님이 직접그리신 심층철학과 형설철학.


본능, 인식


데카르트 이전까지 인간은 관념론이 항상 본성의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파브르를 인용하면서 ‘곤충’과 같이 지성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엄청나게 발전시켰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관념을 통해서 조작’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면, 곤충들은 자신들의 몸 자체로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본능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러나 이성은 항상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에 대해서 본능으로만 파악하는 방식을 잊어 버렸을 때 인간은 오직 언어와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베르그송, 이마쥬


생명은 지각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지각에서 이미지가 분리되면 생명이 아니라 물질이다. 물질에 기억이 포함될 때는 반응하고 반영하고 투영하는 ‘생명’이 된다. 생명이든 물질이든 모두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미가 지각할 때, 반응할 때는 생명이라고 부르자는 것이 베르그송의 이마주이다.


재현은 각각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표상represenation’을 살펴본다. 표상은 반응을 실재와 동일하게 반복하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경체계가 ‘기억’을 가질 때 표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재상산reproduction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물질은 계속해서 재생산을 하면서 생명을 지속한다. 이것이 가장 처음 그리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방식이다.이러한 물질의 지속방식에 표상하는 방식이 생기면서 생명이 된다.



Constitution, Compostion


Constitution은 구성하는 작용이다. 이것은 신칸트학파가 이야기하는 순수이성으로 쪼개놓은 관념들을 구성하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설명방식이 아니다. 물론 칸트는 이런 방식으로 물질과 세계, 생명을 설명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Composition은 관념을 가지고, 기억을 가지고, 이성을 가지고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위치를 잡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깐 들뢰즈는 관념이 먼저 있고 그에 따라서 물질이 구성된다고 보지 않았다. 다만, 물질이 위치지우는 과정 자체가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베르그송, 위상적 경험론


베르그송을 이해하려면 거리 개념, 즉 벡터 개념을 가지고와야 한다. 베르그송의 경험론은 총체적integral 경험론이라고 한다. 이것을 적분이라고 하지 않고 총체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로테르망이 자신의 개념 중에 local 과 gloval로 이해한다. 자신과 가까운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한다고 말하다면, 반대로 멀리 있는 것은 정체성과 반대된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전체를 먼저 인식하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게 된다면 총체적으로 열려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성적인 것, 다시 말하면 입자의 총합이 아니라 전체가 먼저 있고 그 사이에 우리가 인식하는 가운데서 입자가 보이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베르그송의 대한 다른 해석.



물질과 기억, 구성


1장은 표상을 위한 이미지들 중의 선택에서 신체의 역할을 살펴본다. 2장은 이마쥬의 재인식을 기억과 두뇌에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이마쥬의 잔존에서 기억과 정신을 다룬다. 4장에서는 이마쥬의 제한과 고정에서 지각과 물질을 다룬다.



1장, 구성


1장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구성된다. 실제적 행위와 가능적 행위에서 표상으로 넘어간다. 실재론과 관념론을 구분하고 이 사이에서 이마쥬들 중에서 이것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살펴본다.


표상과 행동관계는 이마쥬와 실재성에서 감각기관의 교욱과 이마쥬와 정념적 감각을 구분하여 살펴본다. 정념적 감각의 본성과 정념적 감각으로부터 고립된 이마쥬도 살펴본다. 이마쥬의 자연적 확장, 순수지각, 물질 문제로이행, 기억문제로 이행을 통해서 결국은 1장의 마지막에서 물질과 기억을 연결시킨다.


약간 다른 해석인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순수일자에서 상징께적 코라까지를 베르그송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실재적 행위, 가능적 행위


1장 표상을 위한 이미지들 중의 선택에서 신체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나의 신체는 실재적 행위는 신체라는 이마쥬이다. 그것은 가능적이고 잠재적인 행위들이다. 여기서 총체는 신체가 지각하는 부분들이다. 즉 신체가 현실적으로 행위하는 부분들의 영역이 물질인 셈이다.  잠시동안 우리가 물질에 관한 이론들과 정신에 관한 이론들에 관해, 외적 세계의 실재성이나 관념성에 관한 논의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보자.


나는 이미지들의 현전 속에 있다.


그러나 내가 지각들에 의해서 밖으로부터 알 뿐만 아니라, 정념들affections에 의해서 내부로부터도 안다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이마쥬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이마쥬가 있다. 그것은 나의 신체이다. 나는 이 정념들이 산출되는 조건들을 검토한다. 나는 정념들이 언제나 내가 밖으로 부터 받아 들이는 진동들인 감각적 운동과 내가 행사할 운동들인 신체적 운동들 사이에 와서 삽입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기적 세계의 어디서나 이 같은 감성sensibilite이 다음과 같은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본다고 믿었던 것을 상기해본다. 그것이 나타나는 정확한 순간은 자연이 생명적 존재에게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능력을 부여했기에, 종에게는 감가에 의해 그것을 위협하는 일반적 위협들을 알리고, 개체들에게는 위험에서 피하기 위해 미리 대비할 것을 일임하는 때이다.


결국 나는 나의 의식이 정념 속에서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는 역할에 대해 나의 의식에게 묻는다. 나의 의식 속에 정념 만으로 일워진 역할이 있는지, 아니면 지각과 감각의 영향에 의한 정념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념의 작용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것이다. 모든 일이 진행되는 모습을 볼 때 내가 우주라고 부르는 이 이마쥬의 총체 속에서, 그 이마쥬의 유형이 내 신체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특별한 이마쥬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산출될 수 없는 것 같다. 어떤 특별한 이마쥬들은 추억을 암시한다.


이미지들은 각각 다른 재생산을 통해서 탈영토화를 한다. 그래서 반복하지만 차이가 발생한다.


신체, 역할


대상들을 움직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상인 나의 신체는 따라서 행동 중심이다. 그거싱 표상을 생겨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은 그것들에 대한 가능적 행동을 반영한다.

나는 이마쥬들의 집합을 물질이라 부르고 나의 신체라는 어떤 결정된 이마쥬의 가능적 행동에 관련된 이 같은 이마쥬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민네이션, 차이와 반복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수평적으로도 읽을 수 있고, 수직적으로 읽을수도 있다. 수평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물질은 재생산을 하는 과정에서는 반복되는 것이긴 하지만 차이를 가지고 반복된다. 그러나 수직적인 것은 물질은 재생산하면서 차이를 만들어내고 표상이라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 반복되는 것을 상정한다.



민네이션, 생각


관념과 실재의 전체 스펙트럼에서 볼 때 인간은 그 어느곳에만 속하지도 않고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관념인 이데올로기와, 실재인 토대구조에서 인간은 두 세계를 잇는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노마드라고 할 수 있다.


관념과 실재를 계속해서 왔다갔다하는 flow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지속의 변증법’이다. 지속적으로 변증법을 해 나가는 것, 다시 말하면 지속은 생명인데, 생명이 계속해서 두 세계를 왔다갔다 하면서 연결하는 ‘지속의 변증법’을 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왔다 갔다 한다는데 있어서 노마드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에서 시작해서 마빈 민스키를 따라가다가보면 인공지능이라는 물질이 기억을 가지게된다.


민네이션, 뇌


인간의 눈은 빨아드린다. 모든 것을 일단은 흡수하고 inception하면서 두뇌로 전달한다. 두뇌는 inceptione된 정보를 다시 표면으로 투사하는데 그 과정에 가장 가까이에 전해질이 가진 감정이 있고, 전두엽이 가진 인지가 있다. 그 인지와 감정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해마의 작업이다.


베르그송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해질에 먼저 전해지는 정보를 언어이전의 지각이라고 해서 ‘비매개적인 것들에 관한 시론’을 쓴다. 그리고 이 다음에 물질을 기억하는 방식은 인지로 가기 전에 ‘전해질에서 해마’로 가는 작업이 일어난다는 것을 ‘물질과 기억’에서 표현했다.


칸트는 기억된 선험적 지각을 가지고 ‘감각을 먼저, 인지를 나중에 하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이야기 하게 된다. 선험적 지각은 해마에 기억된 정보인 것이고, 순수이성은 전해질의 작용, 실천이성은 전전두엽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식의 도식이 가능하다


민네이션, 위상학


위상학이라는 것은 위치에 따라서 상이 변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자신은 어느 지점에 포함되어 있다.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거리가 생긴다. 상대적인 개념에서 멀고 가까운 개념은 방향과 함께 기억을 통해서 적과 동지, 친구와 선생과 같은 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이 위상학적인 입장에서는 작은 것들의 합이 전체를 이룰 수가 없다. 이미 전체가 존재하고 존재하는 전체 안에서 어느 위치인가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명은 어떻게 되는가? 베르그송에서 생명은 총체성 안에서 재생산을 하면서 새로운 위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실재적으로 재생산은 전체의 합을 늘리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새로운 위치를 만들어내고 전체의 위치지움을 변경시킨다. 그래서 ‘지속’의 개념에서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과정에서 총체적 경험론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면 ‘열린 총체성’의 관점에서 물질은 재생산하고, 그 안에서 관념은 재현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은 철저하게 물질의 입장에서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네이션, 이미지


모든 것들은 이미지들의 연속이다. 행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미지들은 노마드이다. 계속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위치지어진다. 이미지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기억이 반영되는 것에 따라서 생명체의 여러가지 형태가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수 많은 이마쥬들의 잔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이마쥬 이후의 물질과 기억의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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