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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9. 2018

이마지와 재인식

베르그송철학_철학아카데미

20180518_철학아카데미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_류종열

물질과 기억_이마쥬와 재인식


들어가기

우리의 기억은 2가지로 구성된다. 학습과 추억이다. 학습기억은 자동적인 패턴화로 이루어지고 추억기억은 계석해서 이미지를 접붙이면서 재인식을 해간다. 들뢰즈의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오늘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이미지들이 어떻게 재인식하는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보자.


이마쥬, 재인식


신체는 단지 운동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자신이 잡아두지 않을 경우에 어떤 운동기제에 전달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전도체에 불과하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생성일반 속에서 어떤 순간적인 절단을 행사하면서 매 순간 얻게 된다. 이 절단coupe 속에서 우리 신체는 중심을 차지한다.


1. 과거는 두가지 다른 형태로 존속한다. 그것은 운동기제들 속에, 독립적인 추억들 속에 존재한다.


2. 현재적 대상의 재인식은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주체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3.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배열된 추억들로 부터, 미세한 단계들을 통해 공간 속에서 그 것의 시발적이거나 가능적인 행동을 그리는 운동들로 이행한다. 뇌의 상태는 이 운동들에 손상을 입힐 수 있지만, 이 추억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기억의 두 형식, 학과추억


학과추억과 독서추억으로 기억은 구성된다. 학과추억은 외운 기억이고 독서추억은 본성을 변하게 하는 기억이다. 학과추억은 습관적이고 비인격적, 자동적이지만 독서추억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자발적이다. 학과추억은 암기하게 되면 마침내 전체로 조직화된다. 조직화되는 순간 자동적인 순서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학과추억은 암기하게된 습관 속에서 더이상 이미지들을 생산해 내지 않는다.


반대로 독서추억은 두 번째 읽든 세번째 읽든, 습관의 특성을 갖지는 않는다. 그 첫번째로 읽는 이마쥬는 기억 속에 첫 번째로 필연적으로 각인되고 그 후에는 자유롭게 구성된다. 이러한 독서추억은 본성을 변화시키는데 반복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들의 연결되어서 새로운 상을 떠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전의 추억도 기억 속에 있고 그리고 보태어진 추억에 의해 기억은 변화되며, 숨어 있더라도 노력하면 끌어낼 수 있는 이마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작동이 기억이다. 기억은 추억들이 보태지거나 부분이 신체를 통해 삭제되는 것도 영향을 받는다.



독서추억, 기억


독서추억은 우리 일상적인 삶의 모든 사건들이 펼쳐짐에 따라 그것들을 이마쥬-추억의 형태로 기록할 것이다. 이 추억은 어떤 세부 사항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 추억은 각각의 사실과 각각의 동작에 그 위치와 날짜를 남겨 놓을 것이다. 유용성이나 실재적 적용이라는 속셈이 없으며, 그 기억 속에 과거를 오로지 자연적 필연성의 결과로 축적될 것이다.모든 추억은 기억 속에 있다. 나오고 안나오는 것은 실용과 이해관계이다.



습관추억, 기억


습관추억은 신체 속에 축적되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경험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완벽하게 만들어진 일련의 운동기제들이며 외적 자극들에 점점 증가하고 다양화하는 반작용들과 함께 끝없이 증가하는 많은 가능한 질문들에 이미 준비된 답변을 동반한다. 우리는 이 운동기제들을 그것들이 작동되는 순간에 의식한다.


그리고 현재 속에 축적된 과거의 노력들 전체에 대한 이러한 의식도 물론 역시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서추억과는 심층적으로 다르다. 언제나 작동을 향해 있으며 현재 속에 자리잡은 채 단지 매리만 바라보고 있는 기억이다.



이마쥬, 기억들


이미 본 것의 감정을 섦여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적 지각을 재인식하는 것은 그것을 사유에 의해 과거의 화노경 속에 삽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재인식하는 작용이란 현재적 지각 이전에 그것과 인접하여 주어진 이마쥬를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올바르게 관찰하였듯이, 다시 나타난 지각이 원초적 지각에 동반하는 상황들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원초적 지각이 우선적으로 자신을 닮은 현실적 지각에 의해 환기될 때만 가능하다.



습관, 기억


습관적 기억은 습관추억이고 이것은 운동기제와 연결된 생물학적인 기억이다. 운동기제라는 것은 신경, 근육과 같은 기능을 가진 조직들에서 일어나는 활동인데 이것은 어떤 손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겪기도 한다. 따라서 습관적 기억은 손상에 의해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인식은 모두 눈으로 들어오지만, 그것이 표현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든것은 무한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들어온 이미지들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거나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진단 다음에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은 신체 전체에 있다’라고 표현한다.생각해보라 우리의 신체는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이며, 두뇌의 활동에 손상이 입어도 알아서 움직이고 있는 조직들이 있지 않는가?



기억, 재인식


재인식이란 무엇인가? 우선 극한적 경우 순간적인 재인식 즉 어떤 명백한 기억들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체만이 할 수 있는 재인식이 있다. 이것은 표상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두 가지의 극단적 조건들이 있는 하나는 지각이 그것을 동반하는 한정된 운동들을 아직 조직화하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 동반적인 운동들이 나의 지각이 무용하게 될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는 경우이다. 일상적 대상을 재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데 있다. 이것은 너무나 적절한 말이어서 우리가 아는대로 환자들은 사실은 재인식을 현실로 확장하지 못하는데 이거은 재인식이 불가능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행위불능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재인식은 조직화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재인식이 조직화되는 것이 바로 행위라고 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행위는 항상 재인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 정신


물질과 정신이라고 할 때, 이 두가지는 실재로 ㅇ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극한의 추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은 뒤나미스, 히포케이메논, 실체, 힘, 중력, 에너지, 과양자 등이라고 하든 지각불가능한 것이다. 정신은 이데아, 에이도스, 정령, 정신, 지식, 인지 저보, 빅데이터등이라고 하든 인지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지각하지만 말로 전부 다를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영혼과 신체가 있다.


이는 실증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 물질과 정신의 양쪽 추상어라고 한다면 영혼과 신체는 현실적으로 탐색과 검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베르그송은 영혼과 신체에서 영혼의 부분은 추억과 기억으로 다룰 수 있고, 신체의 부분은 감각과 지각으로 다룰 수 있다. 영혼과 신체가 첫째 인식은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자료이다. 둘다 흐름인데 전자의 흐름은 비형체적이고, 후자의 흐름은 형체적으로 보인다. 영혼을 다루는 의식의 상태와 신체를 다루는 의식의 사태들은 마치 스피노자의 스스로되는 것과 스스로 되어진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영혼, 추억


영혼과 추억과 기억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검토하고 신체는 감각과 지각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검토한다. 이 양자의 관계는 평행도, 번역도, 거울 반사도 아니고 회로의 비대칭적 이중성이다. 그러면 양자의 매개적 위치에 있는 두뇌는 무엇인가? 두뇌는 신체 이미지의 일부이다. 신체의 총체적 자룔르 신체의 일부를 통해 전하는 전도체와 같다.


의식이나 영혼도 신체도 자체 안에서는 절단되어 있지 않으며 덩어리이다. 전자는 비형체적 덩어리이고 후자는 형체적 덩어리이다. 이를 전자에서는 점들의 집합으로도 후자에서는 분자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전자에서 상호침투적인 만큼이나 후자에서 상보적이고 반투명적이다식이 신체의 행동과는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이 왜 별종, 미치광이, 빨갱이등으로 오인되거나 배제되어 왔던가?




민네이션, 탈영토화


베르그송에게서 행위는 곡선에서 만들어진다. 정해진 곡선위에서 행위하는 인간에게 점점에서 조금씩 다른 궤도로 이끌어오는 사람들이 바로 탈영토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잠정적 유토피아’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이미 정해진 방향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진입할 때 만들어진 영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영토로 진입하는 것이다. 새로운 영토에서는 또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난다. 이것은 순환적인데 새로운 행동이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운동은 또한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낸다.


민네이션, 기억


베르그송에게서 기억은 단지 두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이 생명을 지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명이 붙어 있는 순간 인간의 몸은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다고 있는 것이 단지 생각만아 아니라 몸이 기억하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운동기제 혹은 학습추억이고, 이러한 학습추억은 자동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새롭게 들어오는 이미지들을 모두 자동화되어 있는 구조에 붙인다. 들뢰즈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영토를 더 확장시키는 것이다. 러나 독서추억은 새롭게 만들어내는 기억이다. 이미지들이 새로운 이미지들을 붙여내고 상상해서 자신의 영토를 떠나게 만드는 기억인 것이다. 이러한 기억이 다시 이야기하면 심층에서 투사하는 새로운 현실적 이미지라는 것으로 보면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비슷하다.


민네이션, 대칭


수평적으로는 대칭이 가능하지만, 수직적으로 위와 아래의 대칭은 없다. 두날개는 수평적으로 대칭이지만, 머리와 다리는 대칭일수 없다. 대칭의 개념을 잘못적용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과 이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직은 확장이나 축소로 표현할 수 있다. 두가지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시작하는가에 따라서 확장이되거나 한쪽은 축소가되거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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