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May 22. 2018

말과 사물

미쉘푸코 말과사물_철학아카데미

20180521_철학아카데미

허경_푸코 ‘말과 사물’


들어가기


푸코가 말하는 ‘말과 사물’의 주요 핵심은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준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메타기준자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근대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근대의 특징은 이런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왜 ‘말과 사물’인가? 다시 말하면 단어와 사물의 연결관계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시대의 따라서 사물과 언어의 연결관계는 달라진다.


말과 사물’이란 이름은 푸코가 원래 이야기했던 ‘사물의 질서’에서 출판사의 의견에 따라서 달라졌다. 푸코는 ‘사물의 질서, 말과 사물, 세계의 산문’이라는 3개의 책 이름을 가지고 갔지만 결국은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으로 정해졌다. 재밌는 사실은 푸코는 자신의 책을 낼 때 하나의 학문을 구성할 만큼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면 그 책을 쓰지 않았다. 해설서나 인용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오늘은 푸코의 말과 사물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파헤쳐본다


이중, 사물


‘내부는 또한 분명 외부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1966년 푸코는 말과 사물을 발간한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푸코는 근대와 계몽에 대한 자신만의 명료하고도 야심찬 정의와 시대구분을 시도한다.


사실상 말과 사물은 이 시기에 대한 푸코만의 독특한 철학적, 역사적 관념을 발전시킨 저작이라고 볼 수 있다. 푸코는 고고학적 정신에 따라 우선 자신의 분석 대상을 시공간적으로 명확히 위치시킨다.푸코는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 대한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인용한 것으로 ‘말과 사물’을 시작한다. 모든 문화는 사물을 보는 혹은 보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물을 보거나 보지 않기 위하여 문화는 말을 필요로 한다. 말과 사물, 말과 사물을 잇기 위해 우리는 둘 사이를 이어주느 질서를 필요로 한다. 질서는 문화는 코드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으로 규정지어진 코드 안에서만 가능하다. 말과 사물 사이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현실적, 잠재적, 가능적 관계들이란 결국 각각의 문화드를 자신의 부분집합으로 갖는 하나의 전체집합이다. 푸코에 따르념 말과 사물 사이에는 ‘벌거벗은 경험’을 위한 하나의 영역이 있다.


이렇게 모든 문화 안에는 우리가 질서를 부여하는 코드들이라고 보를 수 있을 어떤 것의 사용과 질서에 대한 반성 사이에 존재하는 벌거벗은 경험이 있다. 이 연구에서 우리가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다. 문제는 16세기 이래로 우리의 것과 같은 문화의 중심에서 그 경험이 무엇이 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아카데미의 풍경, 보톤 10명 내외의 철학을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모여서 고퀄의 강의를 듣는다.


말과사물, 도입부


말과 사물의 도입부는 아래와 같은 텍스트로 시작한다. “이 책은 보르헤스의 한 텍스트에 그 출생지를 둔다. 그곳은, 이 텍스트를 읽으며, 우리를 위해 존재한느 방만함을 진정시켜주던 잘 정돈된 모든 표면과 모든 평면을 무너뜨리고, 동일자와 타자라는 천년에 걸친 우리의 실천을 오랫동안 뒤뚱거리게 만들고 불안케 만들어 버리며, 사유의 - 우리 사유의, 우리 시대와 우리 지역에 갖는 사유 - 모든 친근성을 뒤흔들러버린 그 웃음 안이다.


이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는 ‘중국의 어떤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동물들은 다음처럼 분류된다.’ 황제에게 속하는 동물들 / 방부처리된 동물들 / 길들여진 동물들 / 젖먹이 돼지들 / 인어들 / 전설상의 동물들 / 주인없는 개들 / 이 분류에 속하는 동물들 / 미친 것처럼 행동하는 동물들 / 셀수 없는 동물들 / 낙타털로 된 매우 세밀한 붓으로 그려진 동물들 / 기타 등등 / 방금 손잡이 달린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 멀리서 보아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들


보르헤스의 백과사전


이 분류법을 바라본느 우리의 놀라움 안에서, 우리가 단번에 감지하는 것, 이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사유의 이국적 매력으로서 제시되는 것, 그것은 우리 사유의 한계이다. 그것의 벌거벗은 사유 불가능성. 여기까지가 도입부이다. 이러한 도입부를 살펴보면 따라서 ‘말과 사물’ 혹은 ‘사물의 질서’는 하나의 문화, 다시 말해서 일정한 시기들에 있어서의 ‘우리 문화’와 에피스테메들 및 그 에피스테메가 사물을 배치하는 질서를 다루는 책이다. 푸코에 있어 그것은 지리적으로 유럽지역의, 시간적으로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근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시기의 문화, 즉 ‘우리의 문화’이다.



푸코, 분석


푸코의 분석은 당연히 전통적인 과학사 혹은 관념사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인식과 이론이 가능할 수 있었던 무엇’을 찾으려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작업은 담론의 공간, 역사적 아 프리오리, 한마디로 주어진 일정 공간 내에서 주어진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찾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로 인해 오늘 우리의 과학이 마침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을 어떤 객관성을 향한 진보로서 묘사되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적 장인 에피스테메이다. 이곳에서 합리적 가치 혹은 객관적 형식들에 근거하는 모든 기준의 외부를 지향하는 인식은 자신의 실증성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점증하는 완전성의 역사가 아니라 차라리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 갖는 하난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드러내야만 하는 것은, 지식의 공간 안에서, 경험적 인식의 다양한 형식들을 탄생케 한 배치들이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역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고고학이다.



푸코, 고고학


고고학은 주어진 한 시대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자, 영역을 정확히 위치지음을 목표로 삼는 연구이다. 더욱이 “주어진 한 문화의, 한 순간에는 , 모든 지식의 가능조건을 규정하는 오직 하나의 에피스테메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의 이론 안에 스스로 드러낼 수도 혹은 하나의 실천 안에 소리 없이 투여되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이곳에서 푸코는 자신의 근대 개념에 대한 정의 및 시기구분을 행하는데, 1966년의 ‘말과 사물’에 등장하는 이 규정들은 푸코의 마지막 날까지 큰 수정 없이 기본적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고학적 탐구는 서양 문화의 에피스테메 안에서 두 개의 단절을 보여준다. 고전주의 시대를 연느 17세기 중반 경의 단절, 그리고 우리 근대성의 문턱을 이루는 19세기 초의 단절이다.


고고학적으러 형식들의 기원을 파헤친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

고전주의와 근대 사이의 에피스테메적 분할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사이의 약 50년간 갑짜기 발생했다. 한편 이 우리의 근대를 가능케 한 이 인식론적 단절은 시간으로 1775-1825년의 사이에 존재하며, 이 시기 안에서도 1795-1800년을 기점으로 하는 두 개의 연속적인 작은 시기들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로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이시기는 우리의 근대 혹은 근대성의 연대기적 영도를 구성한다. 이 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의 인식론적 장을 송두리채 뒤흔들고 변화시킨 하나의 변화, 불연속, 단절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근대성의 문턱이 건너 뛰었던 것이다.

푸코에 따르념 16세기 이후 유럽의 거대한 인식론적 단절은 다만 두 차례만 일어났을 뿐이다. 첫 번째는 고전주의 형성시킨 17세기 중반의 단절이며, 두 번째는 우리의 근대성을 확립했던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단절이다. 이제 우리는 각각의 시대에 대해 그것의 에피스테메를 지적해볼 수 있다. 중세 말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이다. 17세기 중반으로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이다. 19세기 이래 아직도 우리가 빠져나오지 못한 근대의 페피스테메는 역사 혹은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이다. 여기서 푸코가 각 시대의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노동, 생명, 언어의 세가지 영역이다.



말과 사물, 근대개념

말과 사물의 다른 부분에서도 푸코는 고고학적 구분을 여러차례 반복한다. “이렇게 분석은 고전주의 시대를 통틀어서 표상, 언어, 자연적 질서, 부와 가치의 이론들 사이에 존재했던 일관성을 보여줄 수 있다.

19세기 이래, 와노전히 변화한 것은 바로 이 배치이다. 이러한 변화는 ‘칸트적 비판 이후의 일이며, 18세기 말 서양 문화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 즉 새로운 유형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18세기의 마지막 몇 년은, 17세기 초 르네상스의 사유를 파괴한 단절과 대칭을 이루는 하나의 단절에 의해 와해되었다.

19세기 이후 보편수학의 통일성은 와해되었다. 본질적인 것은 19세기 초에 하나의 지식배열이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18-19세기의 전환기에 근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생성되었던 거대한 단절을 요약하면 18-19세기의 전환기에 변화하고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된 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 사이의 공유 및 선결 존재 양식으로서의 지식 자체’이다.


권력이 지식을 종속시킬 때 일어나는 일


푸코, 세가지 기준

이제 이 18-19세기의 전환기에 일어났던 전체적인 변화를 각 부분별로 간략히 살펴보자. 첫번째는 노동의 영역이다. 노동의 영역에서, 부의 분석은 정치경제학으로 변화하였다. 리카르도의 ‘조세와 정치경제학의 원리’1817를 보라.

두번째는 언어영역이다. 언어영역에서, 문법은 문헉학으로 변화했다. 보프의 ‘산스크리트어의 체계’1816와 ‘비교문법’1833을 참고라라.

세번째는 생명의 영역이다. 생명의 영역에서, 자연사 혹은 박물학은 생물학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예는 퀴비에의 ‘비교 해부학’1801-1805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푸코, 붕괴

19세기로의 전환기에, 이전 고전주의의 ‘모든 가능한 질서의 일반 조건’이었던 표상의 체계가 붕괴되고 역사 혹은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사물들이 오직 자신들의 생성에 대해 이해가능성의 우너리만을 요청할 뿐 표상의 공간을 포기하고 다만 그 자신들의 위로 똬리를 튼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제 인간이 처음으로 서양 지식의 장 안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부터 인간에 대한-반은 실증적이고, 반은 철하적인-일반적 반성으로 간주되는 ‘인간학’의 모든 안일함, 모든 새로운 휴머니즘의 환상들이 탄생한다.



푸코, 이중의 사유

근대사유는 푸코에 따르면 이중의 사유, 이중의 놀이이다. 그것은 ‘각각의 요소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탈이중화되는 이중의 놀이이다’ 푸코는 이미 ‘광기의 역사’에 나타나는 가장 시적인 동시에 가장 수스께끼같은 하나의 문장을 통해 이러한 사유를 표현한 바 있다.

“이 광기의 언어느 이제 서정적 폭발로서 다시금 태어난다. 우리는 인간 안에서 내부는 또한 분명 회부이며, 주체성의 극단이 대상의 즉각적인 매력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모든 끝은 되돌아온다는 완강함에로 약속되어 있다.”



푸코, 문화

문학은 이중으로서만 기능하는 언어의 놀이이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언어의 놀이, 말놀이이다. ‘언어는 놀이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놀이의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문학은 근대적 정신의 형식적 육화이다. 근대는 말, 언어, 이중, 놀이 그리고 동일자의 시대이다. 근대 문학은 이중의 놀이를 펼치며 언어의 존재를 드러내는 문학이다. “그것은 망, 파롤의 진리도 역사의 계열도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오직 언어라는 단 하나의 아 프리오리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망 속에서 구성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문학은 점점 더 무엇이 근대 사유의 본질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유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나타는다. 푸코의 입장에서 문학은 다름아닌 근대의 영화이다.



푸코, 말과 사물

말과 사물은 동일자 혹은 이중에 관한 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차이는 동일자의 이중체 혹은 분식으로서 이해된다. 이전의 광기의 역사가 타자의 역사로 간주될 수 있다면 말과 사물은 동일자와 유사성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말과 사물의 서문을 보자. “광기의 역사는 타자의 역사, 동시에 한 문화의 내부 및 외부에 속하는, 즉 이타성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감금함으로써 내부의 위험을 쫓아내기 위해 배제시켜야 할 어던 것의 역사일 것입니다. 사물의 질서의 역사는 동일자의 역사, 하나의 문화에 있어서 분산된 동시에 연결된, 따라서 표지들에 의해 구별지어져야 하는 동시에 그 동질성 안에서 모아져야 한느 어떤 것의 역사일 것입니다.”한편 근대는 동일자가 근본적으로 언어, 말 그리고 동일성의 놀이 안에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정의의 놀이의 시대이기도 하다.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근대성의 놀이는 본질적으로 문화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모든 정의들이 오직 주어진 언어학적 혹은 문화적 통일체의 내부에서만 타당한 정의들의 놀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민네이션, 에피스테메

푸코는 결국 ‘말과 사물’에서 인식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보는 법이 바뀌면 ‘사물들의 질서지움이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보는법을 바꾸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칸트는 인간의 유한성을 제한이라는 관점에서보지 않고 가능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인간이 유한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조건들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무한하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고, 이 과정에서 ‘한계의 조건’들을 바꾸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홉스는 기존에 ‘계약’의 관점을 바꾼다. 원래는 인간과 하나님의 계약관계를 구약과 신약으로 이해하고 있던 중세를 ‘인간과 인간의 계약’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인간의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국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로크는 이러한 국가안에서 존재하는 계약들을 꿰뚫어 보고 그 계약을 어기는 왕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제시했다. 헤겔은 칸트가 이야기한 유한성을 정신의 개념으로 가지고와서 무한의 개념을 덧입혔고, 그 무한은 ‘변증법’에 의해서 무한한 시뮬라크르를 만들어게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관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칸트의 보는법과 헤겔의 방식을 뒤집어서 사물이 먼저 있고 그 사물들의 질서에 따라서 인간이 가진 생각의 질서가 바뀐다는 표현으로 근대의 거대한 혁명을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푸코는 그시대의 담론들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들이 지배적인 담론이 되기까지의 ‘보는 방법’을 분석한 후에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보편성을 특수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푸코


민네이션, 푸코의 기획


푸코가 고고학적으로 에피스테메를 이루던 기준들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말과 사물’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근대’개념을 파괴하고 ‘현대’개념을 가지고 올려고 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18세기를 중심으로 보편성의 개념을 파괴하고 싶었다. 특히 18세기까지 너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던 ‘인간의 시대’를 깨뜨피기 위해서 푸코는 모든 인간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공격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정의가 시작된 계몽주의의 시작인 데카르트-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보편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푸코는 이렇게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내는 장치로서,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열어내는 기제로서 자신의 학문을 사용한다.



민네이션, 지식


보는 법, 관점을 바꾸는 것이 바로 패러다임 시프트 혹은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보는 법을 바꾸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들인데, 이러한 지식인들을 조종하는 사람들은 권력자인 정치인들이다. 푸코는 이런식으로 보았고 이러한 고민을 ‘감시와 처벌’에서 ‘광기의 역사’에서 풀어내고 있다.


인식을 바꾸는 것, 질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정치의 영역이다.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그래서 그 가치의 우선순위들을 어떻게 매길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이 과정을 토론과 협의 과정으로 결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여기서 지식의 중립성은 없다. 지식은 항상 가치편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으로 매김되는 모든 것들은 편향적이고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편향적인데 편향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지식이 편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도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법은 바뀔 것이다.  


오늘 강의를 해 주신 허경 선생님.


민네이션, 질서


사물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사실 자신이 주관적으로 부여한다. 그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토론도 있고, 설득도 있고, 명령도 있고, 속임수도 있다. 질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인간의 머릿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질서들의 현실화되면서 어떤 방향과 구조를 만들게 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질서는 부여된 것이고, 부여된 질서는 항상 사물들 사이의 이음새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이 또한 푸코의 고민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러한 주관적 질서를 타자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서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질서를 정한 사람과 정해진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질서를 함께 정하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함께 ‘질서’를 정하는 것이고, 이 때 중요한 것은 세련되고 질서를 함께 정하기인 것이다. 사물의 질서를 함께 정하는 것은 그 질서를 따르는 사람의 ‘자유’를 발전시킨다. 발전된 자유를 가지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인간됨을 느끼기도 한다.



민네이션, 철학자


처음 철학을 하던 순간, 내가 처음 읽었던 철학책은 존롤스의 ‘정의론’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법과 정치’수업을 들으면서 법의 기본적인 조건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정의의 형식’을 정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정한 질서도 아니었고, 정의라는 것을 내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10년이 지난 어느날 참여연대에서 정의론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런데 왜 이렇지?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철학이라는 것, 그것은 어쩌면 철학이론과 다른 것이다. 삶을 최대한 조깨어 보고 쪼갠 사물의 질서를 다시 자신의 질서로 정리하는 작업이 철학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박사는 다 철학자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 매우 쉬운 일이다. 아니 매우 실제적이고 항상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먼저 생각한 사람들의 연결관계를 배워나가는 과정은 철학공부이다. 이것은 철학함이 아니라 철학공부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의 역사를 배우는 시간이지 ‘철학함’은 아니다.


철학함이란 사물을 자기의 방식으로 쪼개어보고, 연결되어 있던 것들을 끊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붙여가는 과정인데, 여기서부터가 재밌어지는 과정이다. 흔히 ‘제로 투 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바로 창의성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쪼개어보는 과정을 비판적 사고라고 하고, 잇는 과정을 창의적 사고라고 한다.


이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끊고 연결하고는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때 사물들의 질서를 마음대로 규정하거나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향과 구조 안에 들어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 생각하고 존재함에 대한 고민을 하는 ‘더 잘 철학하게 된다.’ 철학을 더 잘 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쪼개기와 잇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창의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실재로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 때 생각과 몸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 온다.


기독교적 용어로는 ‘말이 육신이 된다는 성육신의 논리’가 된다. 모든 것들은 철학적이다. 쪼개어보면 연결이 보이고, 연결해보면 쪼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푸코가 정리한 근데 에피스테메


민네이션, 문제화


푸코에 따르면 모든 것들의 시작은 ‘문제화’이다. 혁명은 문제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문제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정상과 비정상이 섞여 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서 의식하는 과정에서 과연 정말 그러한가를 문제시했을 대 멈춰진 것들은 흘러가게 되어 있다.


사실은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매번 우리의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이 항상 보이는 것도 아니다.

문제화시킨다는 것은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고, 끌어내는 것이고, 멈추는 것이다. 멈추는 것에서 다시 흘러가는 것으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가는 과정인 것이다. 문제를 품기 시작할 때 세상은 비로소 멈추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강의 후 모습


민네이션, transformatiom


푸코의 목적은 ‘history of formation’에서 ‘history of transforation of the self’이다. 형식들의 역사를 자아를 위한 변형으로 만드는 작업은 결국 나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정상적인 것들을 정상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 오히려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주어진 기준들에 대해서 다른 기준을 제시하기 전에 기준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변형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푸코가 정리한 담론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들
매거진의 이전글 이마지와 재인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