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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24. 2018

예언과 역사

이사야, 예레미야 구약의 숲_김근주

20180523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의 숲_김근주

이사야서, 예레미야


들어가기


이사야서가 쓰인 목적은 무엇인가?이사야서의 저자는 누구인가? 이사야인가? 제2의 이사야, 제 3의 이사야가 있는가?동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자들을 전제로 할 때 그들이 현실에서 겪어야 했을 모욕과 기대는 어떤 것일였을까? 묵시와 예연을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



이사야서, 머릿말


구약 예언서들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면, 대체로 첫머리에 예언자와 시대 배경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개가 없어도 예언서들에 실린 말씀은 충분히 강력하고 은혜롭고 능력있기에, 우리 대부분은 크게 첫머리의 소개에 개의치 찮고 읽는다.


이 소개의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 특정한 사람과 시대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볼 때, 어떤 신비스러운 계시가 갑짜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니고 이스라엘의 특정한시대와 연관되어 제시되고 알려진 말씀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의 그가 느끼고 깨달았을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본문을 읽어갈때, 우리는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와 오늘날 우리 시대가 겹쳐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이 어느 시대에나 보편 타당한 진리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특정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 주어졌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는 이렇게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그러니, 이 땅의 역사는 덧없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땅의 덧없고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땅의 덧없는 역사야 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진리의 계시와 능력이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함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사야서, 배경


이사야서 1장에서는 남왕국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치세, 주전 8세기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웃시야와 요담이 다스렸던 68년간은 유다의 번성기였다. 군사적으로 매우 튼튼하여 외적을 물리치고 정복하기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농업과 무역이 번성하였던 시기였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시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아하스왕의 시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시기였다. 팽창하는 앗수르의 기세로 고대 중동 지역 전체가 그 앞에 굴복하던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에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유다에도 협력을 제안하지만, 아하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스라엘과 아람은 먼저 유다를 침공하여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왕을 세우려고 하였으니, 이 전쟁이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


이사야는 두 왕의 침략에 대해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말라 권면하지만,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원조를 청하기로 결정한다. 팔레스타인을 침략할 틈을 노리던 앗수르는 즉각 이 지역에 진군하게 되고, 이스라엘과 아람을 멸망시켜 버렸을 뿐 아니라, 유다의 많은 지역까지도 차지한다. 유다는 살아 남았지만, 이제 앗수르는 조공국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히스기야 왕의 시대 역시 앗수르 위협이 계속되었다. 히스기야는 애굽과 바벨론과 뜻을 모아 앗수르로부터 놓여 나기를 시도하지만,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는 무기력하였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ㅇ르 구하며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선느 예루살렘을 보호하셨고, 강력하던 앗수르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이사야서에는 유독 전쟁이 많다


이사야, 역사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의 평화롭고 부유하던 시대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이점은 예언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겉으로 보이는 현실이 큰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사야서는 1절에서 전체 제목을 ‘이사야가 본 계시’라고 적는데, 직역하면 ‘이사야가 본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사야가 보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랐던 것이다.


결국, 이사야가 보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랐던 것이다. 부국강병과 평화의 노래가 울려퍼지지만,, 이사야가 보고 듣기에 그 시댄느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과 눈물, 억압과 착취가 드세던 시기였다. 그가 시대를 달리 보게 된 것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보았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에 근거하여 시대를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예언자가 살던 시대는 그야말로 나라의 격동기였으며, 앗수르라는 강력한 열강의 위협 속에 어떻게 나라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지 문제되던 시기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구원과 평화만을 위한 말슴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생존을 결정 짓는 것이기도 하다.



이사야, 메시지


이사야의 메시지는 주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담고 있다.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통치, 여호와의 종, 새하늘과 새땅과 같은 주제이다. 하나님이 통치는 공평과 정의로우며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 이사야서 전반부까지이고 후반부에는 고통당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새롭게 열려진 새하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서 미래를 보고 이스라엘에게 다가올 미래를 예연자적 상상력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어떤 환상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구성이 이루어진 것처럼, 8세기 문서예언자들은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통사적으로, 몇세대를 지나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예언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심지어 몇백년이 지나야만 그 성취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본다면 그 당시 예언자가 담당하고 감당해야했을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말할 수 없다. 바로 적용되는 예언이 아니라 세대를 수 많이 거슬러가서 이루어지는 예언의 기간때문에 문서로 남겨져야 하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사야서가 기록된 사해사본


예레미야, 멸망의 시대


멸망의 시대를 살아간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보자. 예레미야 1장을 보면 그는 아나돗 지방에 거주하던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다. 아나돗은 솔로몬 즉위시에 반대파를 지지했던 연고로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이었다.


실로 성소의 제사장이던 엘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 그 가문의 몰락이 예고되었고, 이것이 아비아달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엘리가 기반을 두었던 실로 성소 역시 그 이후의 어떤 시기에 오나전히 파괴되고 버려졌다. 예레미야서 첫 머리에 이러한 정보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중심부 인물이 아니라, 주변부에 존재했던 제사장 가문 출신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만 언급되는 실로 성소의 파괴에 대한 기억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제사와 성소의 무익함을 절실히 이해하게 하였을 것이다. 달리말해, 본질이 없는 형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야 심삽전(주전 626년)부터 마지막 시드기야 왕 십일년(주전 587년)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요시야는 말씀에 근거한 개혁적인 임금이었고, 예레미야 역시 그를 일러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이방 신을 향하며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였다.



예레미야, 요시야 이후


요시야 이후의 이스라엘은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와 같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르지만, 애굽은 그를 포로로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을 왕우에 세웠다. 애굽과 바벨론은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겨루게 되었고, 주전 605년 여호야김 4년 되던 해 갈그미스 전투의 승리와 더불어 바벨론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그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여호야김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악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고 왕궁을 커다랗게 짓는 일에 힘썼기에, 그의 시대는 불의가 넘쳐나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극심해지던 시기였다.


그의 사후,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다.(주전 597년) 팔레스타인의 불안정함을 제압하려고 이 지역에 진군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가면서,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바벨론의 앞잡이로 유다 왕위에 세웠다. 시드기야는 그의 치세 중 주변국가들과 연합하여 바벨론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던 것으롭 보인다.


그러나 여호야긴 때보다 훨씬 두려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느부갓네살이 다시금 진격하여 일 년 반 동안을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끝에 마침내 주전 587년 함락시켰다. 시드기야는 장님이 된 채 포로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모두 처형당하였고, 성전과 왕궁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러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말았다. 바벨론은 이제 새롱누 왕을 세우기보다는 바벨론에 협조하는 유다인을 총동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였다. 그댜랴 시대에 짧은 평화가 임하지만, 권력의 암투 속ㄱ에 공도엧는 붕괴되고, 남은 이들은 애굽으로 피신하게 된다.



예레미야, 예언


나라가 완전히 기울어가던 시기를 살면서, 예레미야는 이 민족에게 다가올 두렵고도 무서운 심판과 멸망의 날을 선포하였다. 그 시대에도 평화를 전하는 수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정말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예언이었기에, 심판과 멸망을 전하는 예레미야의 삶은 이미 고난이 예견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현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가 아니라, 그가 전한 심판이 임한느 것을 전부 다 몸소 경험하면서 살아갔고, 그가 전한 메시지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였다.



예레미야서, 구성


1장~25장은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26장~45장은 여호야김부터 시드기야에 이르는 시대의 상황과 그 속에서 사역하는 예레미야가 나온다.

46장~51장은 열방을 향한 말씀을 예레미야가 전한다.

52장 후기에는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 여호야긴의 석방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25장에는 대체로 예레미야의 설교들과 그의 고백들이 실려 있다. 그에 비해 둘째 부분에는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배경으로 예레미야가 선포한 내용들과 그가 겪는 고난이 묘사되고 있다. 백성들로 회개하라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선폰느 여호야김 4년을 기점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고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찢어서 불태운 여호야김을 다루는 36장이라고 할 수 있다.다가올 재앙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할 때 이를 듣지 않았던 유다는 바벨론에 의한 심판이 선포되자, 끊임없이 바벨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예레미야, 중심주제들


1. 뽑고 건설하고 : 예레미야가 뽑고 파괴해야 했던 중요한 대상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언약이라는 두개의 기둥이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여호와의 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성전을 위해 먼 곳에서 귀한 향품과 유향을 구해와서 바치기도 하며, 성전에 와서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다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2. 예레미야의 고백 : 참으로 예레미야는 긴 세월에 걸쳐 어깨위의 짐을 내려놓아 버리지 않은 채 자신의 사명을 한결같이 감당하였다. 그리고 이 사역의 기간은 한결 같은 고난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는 점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비난과 공격 속에 살아가야 할 예레미야의 삶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3. 참예언자와 거짓예언자 : 예레미야와 달리 그 시대의 대부분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평화를 외치고, 번성과 부귀를 누렸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공격하고 그의 말을 무시하라고 부추기며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들의 대결이 첨예하게 드러난 것은 나라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었다.


4. 예레미야 수난기, 고난의 예언자 : 예레미야의 사역 내내 그의 삶에는 고초가 떠나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삶 자체가 민족에게 임할 환란을 보여주고 있고, 그의 삶 자체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 점에서 예레미야서는 다른 어떤 예언서보다 예언자 개인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이라는 점도 이와 연관된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만, 본디 이 책은 예레미야의 말이었다. 예레미야라는 특정한 개인과 특정한 상황에 결부된 말이었기에, 이 글에는 예레미야가 드러나고 부각되어 있다. 여화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 말씀을 전하고 살며 고난을 감수했던 한 사람의 삶과 고백, 기록은 훗날 신앙 공동체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느브갓네살왕




민네이션, 역사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요즘들어 전쟁이나 미래에 대해서 예언서나 묵시를 가지고 와서 직접적으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마치 역사가 평행이론처럼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현재로 재현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계시록도 마찬가지도 다니엘이나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가지고서, 그것도 한 구절을 가지고 나와서 적용하고서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거나 자기 자신도 속이기도 한다. 구약 이후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셨고, 더욱이 부활하시고 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계시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이지 않는가?


역사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선포된 예언서를 가지고서 현재라는 역사 안에 던져 놓는 것은 너무 몰상식하면서 무책임한것이 아닌가? 자신도 모르는 일을 그대로 다른이들도 속이는 것은 아닌가? 더욱이 성령의 능력이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있지 않은가?



민네이션, 예언자적 상상력


예언자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보라. 그 상상력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현실의 어두운 암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예언자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간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마치 방치되어져 버린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것인가?


하나님은 악과 구조 가운데 어떻게 나를 부르시고 함께 일하자고 하시는가? 이런 고민들은 예연자적 상상력이 없으면 절대로 시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상상력을 가지고 현실을 열어야 한다.



민네이션, 시대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오늘 본 것과 같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이 어떤 제국을 경험하고 어떤 포로생활을 경험하고 있는가? 내가 사는 시대는 자본과 신자유주의라는 전세계적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하였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기술들이 인간의 근본까지 흔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기회도 있고 가능성도 있지만, 이러한 문화와 기술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예언자와 같이 삶 자체를 메시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잊어먹을 것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나는 어떤 예언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 것인가? 그러나 한가지는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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