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야기_기독연구원 느헤미야_김근주
20180426_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이야기1_김근주
창세기, 출애굽기
들어가기
출애굽기의 실제적인 집필시키는 창세기보다 앞선다.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들의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게 된다.
출애굽, 의미
출애굽기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창세기는 출애굽기를 먼저 읽고 보면 확실하게 현실의 문제로 인식이 된다. 우리에게 출애굽기는 하나의 스토리로 읽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책이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날 때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엑소더스’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엑소더스는 길(소더스)에서 엑크(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길을 떠난다, 이전에 주어진 운명을 떠난다라는 것이다.
어떤 길을 떠났는가? 이전에 종살이하던 국가나 제국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길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이유는 ‘영원한 다스림’을 이루기 위함이다. 출애굽기는 전반적으로 언약정형구covernanct fomula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의미
출애굽기에서 계속 등장하는 언약정형구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언약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영원한 다스림이 있는데, 이 다스림은 공동체적이라서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출애굽기의 이야기와 함께 결합해보면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부르심이 출애굽기의 주제이다.
창세기, 애굽
창세기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요셉과 이삭과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런데 과연 거기에 나온것만 있을까? 당연히 여러가지 사연들이 책으로, 이야기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인 하나님의 의중이라고 여겨야할까? 그것은 출애굽기를 읽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쉽게 해결된다.
출애굽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는 아마도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글을 쓰는 사람도 그에 따른 공감이 있어야 하는데, 역사상 가장 비슷한 시기는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바벨론 시기 이후라는 것이다. 물론 그전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포로기 이후에 하나로 뭉쳐진다. 같은 관점에서 일재시대의 경험이 우리가 출애국기를 이해하는 준거점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50장
12장 이후부터는 족장에patriarch에 대한 이야기가 50장까지 이어진다. 크게 보면 가부장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가진 지금현재의 핵가족하에서 가부장제도를 생각하지 않는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원시적인, 원초적인, 원역사primitive history와 같은 뜻을 가진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이 원시적인 복음은 다른 역사일반서적과 비교할 수 있는, 연결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신화와 같다.
창세기, 1장
원역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실 오경 전체에 대한 서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칠일 구조 속에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장엄하게 그려져 있으며, 제 칠일은 안식일로 규정된다. 그런데 안식일 규례가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그 이후에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창세기 1장은 단지 창세기만의 서문이 아니라 오경 전체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이 이르시되), 존재들의 형성(그대로 되니라), 평가(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간적인 틀(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이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의 표현들은 신학적인 의도로 쓰였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의도라는 것을 사실을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원문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신학적 선언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만물을 존재케 하는 근원이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조화롭게 형성되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가운데 모든 생물과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지음 받았다.
엿새째 되는 날에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인간은 채소와 과일을 먹도록 지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완성되었다.
창조과학, 창세기
젊은 지구론이 이야기하는 6000천년의 젊은 지구의 논리는 창세기 1장을 신학적으로 보지 않는다. 과학적인 잣대로, 세상에 진리를 증명해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의도로 창세기 1장을 보게 되면 창조과학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 장르자체가 합리가 통하는 장르가 아니다. 비유도 나오고 스토리텔링도 나오고 삶의 모든 부분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니다.
장르 자체가 문학인데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보면 어떤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싸워야하고 논쟁해야할 대상은 진화론이라기 보다는 진화론을 근거해서 해서 세상을 설명하는 해석인것이다. 사회적 진화론과 같은 경우 세상을 적자생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창조론을 근거로 볼 때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이끌어가지 않으신다라는 것이 창조과학이 해야할 일인것이다.
창조신앙, 하나님나라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창조신앙의 힘은 무서일까?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음으로 고백해 왔는데, 이에 대한 구약 성경의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주전 2세기에서 1세기 경에 쓰인 제 2마카비서이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박해로 순교를 목전에 둔 어머니와 일곱 형제의 순교 장면을 다루는 7장에서, 이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들을 격려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막내아들이 남았을 때에도,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순교를 격려한다.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주목할 것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신앙이 명시적으로 고백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고백이 박해와 순교의 맥락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무로부터의 창조는 핍밥과 박해를 직면한 하나님의 백서읃ㄹ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면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 여기서 1이상의 다수로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지었다고 할 때, 하나님이 복수로 공동체를 이미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인,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의 여러 이미지들 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
창세기 1장 27절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바드라는 단어이다. 아바드라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나오는 히브리어로 아바드는 work, labor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경작하다라는 땅과 연결된 노동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 사용할 때는 섬기다가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배를 드리다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에베드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경작하다가 더 깊이 진행되면서 ‘섬기다’라는 뜻으로 ‘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이 된다. 이 에베드라는 단어를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종’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에베드’ 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창세기, 영생
창세기에서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또한 영생에 대해서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세기는 기본적인 인간의 셋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생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백성됨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고대 근동의 많은 신화들은 영생을 이야기하고 영생을 위해서 여러 모험을 하지만, 창세기는 끊임없이 죽음과 타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생에 대한 이야기는 비로소 영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어떤 수단의 대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결과였던 것이다.
민네이션, 삼위일체
인격적이다라고 느끼는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이다. 특히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사이에서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격이, 인격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우리의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삼위일체는 원래부터 공동체였고,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민네이션, 비유
비유가 되기위해서는 처음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어떤 기준이 되는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를 다른 메타포와 연결해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이미지가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기본 이미지를 가지고 여러한 삶의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비유와 메타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삶, 새로운 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지 못할 때 사람들은 창조력이나 상상력을 가지고 새로운 삶에 대한 비유를 꿈꾸지 못할 것이다.
민네이션, 해석
이론자체를를 분석하는 것은 1에서 0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0에서 1로 나오는 것은 해석의 문제이다.해석의 문제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서 다른 결과를 나을 때는 다른 의미를 준다. 우리의 삶이 잘못된 해석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른 이론들이 존재할수는 있다. 그것은 인간의 창의성 안에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가지고 삶을 꾸려나가고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잘못된 해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문제가 발생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의 문제가 더 큰 문제가 되고, 그 해석을 가지고 어떤 법과 제도를 만드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민네이션, 질문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논리가 빈약해진다는 것이다. 빈약해진 만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도 약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부분타락에 대한 것도 전적인 타락의 결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어느정도의 일리는 있다. 그러나 오늘계속해서 논의되는 ‘해석’의 문제에서 있어서 기독교 강요가 이야기하는 칼빈의 해석은 과연 옳은가? 이것이 옳은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불경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