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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5. 2018

현상과 의식

후설 순수현상학_철학아카데미

20180605_철학아카데미

에드문트후설_양국현

순수현상학과 현사학적 철학의 이념들

10.영역과 범주, 분석적 영역과 그 범주들

11.구문론적 대상성과 궁극적 기체, 구문론적 범주


들어가기


1913년에 발표된 후설의 이념들은 1901년에 논리연구 이후에 나온 책이다. 그당시만 해도 후설이 이야기한 ‘현상학’이라는 것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후설은 이 책에서 순수현상학을 정의한다.

이전까지는 여러가지 강연으로 현상학을 논했지만, 이 책에서는 깊이있게 저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재가 순수현상학의 일반적 입문이다. 목적 자체가 현상학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현상학과 연결되어 있는 여러가지 학문들을 다룬다.



후설, 소개


후설은 독일의 메렌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수학자로 출발한 그는 브렌다노의 영향을 받아 심리학적 방법을 취했으나, ‘논리연구’(1901)에서 심리주의를 비판하고 의식체험의 지향적 본질구조를 분석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현상학은 엄밀한 이성비판을 통해 궁극적 자기책임에 근거한 학문적 이론과 실천적 삶을 정초하려는 선험철학의 이념을 추구한 것이다.


그 방법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사태 자체’를 직관하는 것이다. 이 선험적 현상학을 처음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념들’(1913)은 제 1권만 발표되었고, 당시 완성된 제 2권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다 제 3권과 함께 40년이 지나 1952년에야 출간되었다. 그래서 후설 현상학을 일관되게 발전한 총체적 모습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때그때 발표된 그의 저술로 ‘의식을 강조한 주관적 관념론’, ‘경험의 지평구조를 분석한 객관적 실재론’으로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던 기존의 편견에 철저히 얽매여 단절된 도식적 틀에 꿰맞춰 왜곡시키는 오해가 더욱 굳어졌다.


그는 그 당시 미처 다루지 못한 현상학적 철학 이념을 밝히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그 성과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어떤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8년 은퇴한 후 1904년 강의인 ‘시간의식’을 발표하는 한편, 나치 정권의 혹독한 유대인 탄압 속에서도 왕성하게 다양한 강연활동을 벌였으며,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등의 저술로 선험적 현상학을 끈질기게 모색해갔다. 후설 현상학은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가다머, 하버마스, 데리다 등의 현대철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문, 사회과학과 문화예술 심지어 영화, 체육, 의학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생생하게 끼치고 있다.



대상, 본질


만약 우리가 어떤 형상학적 학문, 예를 들어 자연의 존재론 속으로 이행한다면, 우리는 대상들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아래 종속된 본질의 대상들을 향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존재를 대할 때 존재들이 이미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설에게서 형상이라는 것은 아직은 물 그 자체이고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 때 대상은 여러가지이지만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형태들, 가령 ‘사물’, ‘속성’, 관계, 사태, 집합, 배열 등의 구조를 갖는다. 사물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고 스스로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서 근원적 대상성, 원점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대상성에 얼마나 사물이 접근해있는가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사물의 속성이나 관계 등은 그 형식적 체제의 한 단편이다. 우리가 앞으로의 고찰에서 전념할 이러한 해명으로부터 또한 영역이란느 개념과 관련된 중요한 범주라는 개념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칸트의 12범주


범주, 영역


범주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어떤 영역의 범주’라는 연관 속에서 바로 관련된 영역이다. 예를 들어 물리적 자연의 영역을 되돌이켜 지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그때 일정한 물질적 영역을 영역 일반의 형식으로 포함시킨다.


어떤 범주는 물리적으로도 동일성을 가지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놓여진 형식들의 범주인 ‘개념’에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리적 형식은 그 자체로는 순수한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되고 난 후에는 이제 정신과 의식의 일들이 시작된다. 칸트는 ‘형식없는 내용은 무모하고, 내용없는 형식은 공허하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형식만 존재하면 안되고 그 안에 내용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적, 종합적


우리가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제한한 의미에서 순수논리적인 것이 ‘종합적인 것’에 대립된 ‘분석적인 것’이란느 단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규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범주들 역시 기꺼이 ‘분석적 범주들’이라고 일컫는다.

종합적인 것은 서로 다른 대상들을 더 큰 개념으로 통합하는 작업이고, 분석적인 것인 하나의 개념 안에 들어 있는 여러가지 개념들을 분할하는 것이다. 종합적인 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는 ‘규정적 판단력’이라고 볼 수 있고, 분석저인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 개념


우리는 범주들 아래 한편으로는 의미에 관한 뜻으로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 속에서 자신의 표현을 발견하는 형식적 본질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태, 다수 등의 ‘범주’는 후자의 의미에서 사태일반, 다수 일반 등의 형식적 형상을 뜻한다.범주가 다르면 의미도 다르고, 물질적 존재도 다르다.


범주 자체가 이미 의미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현상을 인지할 때 ‘사태 일반’을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바로 범주를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한 후설의 논리를 더 강화시킬수도 있고,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 강화시키는 논리는 그렇기 때문에 범주를 어떻게 만드냐가 중요한데 그 범주가 ‘칸트’는 이미 주어진 선험적인 것이라고 말했고, 후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는 자연철학자들은 전혀 새로운 범주의 물질들을 계속해서 보기 때문에 이미 범주가 주어진 선험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물질이 범주를 만들어낸다고 말하는게 낫다고 말할 것이다. 푸코는 이런 의미에서 ‘범주의 고고학’을 진행하면서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광기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전혀 이상한 동양의 범주


본질, 본질인식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은 크게 본질과 본질인식, 현상학적 근본고찰, 순수현상학의 방법론과 문제제기에 관해, 이성과 실재성으로 구분된다. 우리는 지금 본질과 본질인식의 한 측면에서 ‘사실과 본질’ 간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하고 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자연적 인식을 가지고 경험’을 하고 그것을 개념으로 만든다.


사실이란 그러한 경험이 이미 발생한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사물의 본질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서는 현상학사적으로 ‘본질통찰’이 있고 ‘개별적으로 본질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혹은 연결이 안될 수도 있지만 개별 사물에 대한 낮은수준의 개별적 직관’이 있다.

본질통찰과 상상의 관계를 본다면 ‘모든 사실인식에 독립적인 본질인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인식이 본질통찰로 바로 이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적 직관들이 어떻게 통합되고 종합되는지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에 관한 판단과 형상적 보편타당성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여기서 형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자체이고 그것이 본질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는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움을 얻고자 ‘몇가지 근본개념, 일반성과 필연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사실들을 종합한 사실학문과 본질들을 모아 놓은 본질학문은 서로 형식과 의미라는 측면에서 의존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제 영역이 생기고 영역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형상, 의식, 지향성이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영역 그 자체로 이미 본질과 근본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경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형상학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10. 영역과 범주, 분석적 영역과 그 범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영역이 먼저 있고 그 안에 범주가 있으며 분석적 영역은 영역 안에 놓여진 개념들을 통해서 확장된다.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에서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한다


구문론, 대상성


구문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서로의 영역이 규정되고 범주들이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범주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개념의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구문론적 대상성이란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라는 구문론 안에 총각이라는 대상에 대한 대상성과 결혼, 남자와 같은 대상에 대한 속성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술어는 이러한 범주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구문론 안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개념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대상 자체르 지시하는 순간 그 대상의 속성을 지식하는 효과를 가지고 온다.





민네이션, 연역


영역이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사물들이 범주에 따라서 구성을 달리한다. 책상이 먼저 있고 그 책상 위에 컵들의 종류가 놓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컵들은 물리적으로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들이 ‘개념’ 속에서 다른 것들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생각은 알렝바디우가 말한 ‘사건’ 이후에는 수 많은 양태들이 이미 놓여진 ‘연역’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물을 엎지르게 되면 물을 엎지른다에는 ‘컵에 물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물이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엎질러 졌다. 그래서 컵에는 물이 이전보다 적게 담기게 된다’라는 연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역의 충만함을 바디우가 수학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역과 범주 그리고 연역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개념’들은 생성되고 유통되고, 사용되고 발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용적으로 우리가 어떤 개념을 만들려고 하면 이러한 연역적인 논리를 갖추어야만 그 개념이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개념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범주 안에서 ‘영역’에 포함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영역’을 만들게 된다.


혁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개념이고, 이것을 들뢰지는 ‘탈영토화, 재영토화’ 같은 개념으로 이야기를 했다. 죠지프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는 바로 이러한 영역을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민네이션, 현상학


의식과 지향성을 재료로 해서 눈을 감았다 떠 보자. 그럼 우리의 의식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고,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자이면 의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면서 저것은 ‘의자’라고 물질의 영역 속에서 범주를 꺼낸다.


모든 현상은 이런식으로 구성된다. 이미 본질적으로 물질이 있고 그 물질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것의 사용이 달라진다. 여기서 스피노자와 데카르트가 나뉘고 후설과 스피노자가 싸운다.


근본적으로 형식적 존재론들은 자연적인 존재론 혹은 물질적 존재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대문에 물질들이 스스로 구성되어가는 범주는 하등하다고 본다.

현상학은 칸트의 이론을 가지고 더 발전시켜서 현상들을 ‘영역화, 범주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나 베르그송은 이개념을 반대로 섦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범주


잘 생각해보면, 철학의 역사는 범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범주를 정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인이고 모른다는 것 속에서는 범주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주를 만들 수 있다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으로 범주의 위대함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형상이원론으로 이데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는 범주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모든 존재한는 것들은 현상세계의 범주에 넣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이데아의 세계로 범주화시켰다.


아리스테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들 안에서만 범주를 구분하였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물질 자체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범주를 통합시켰다. 그리고 그 사용에 따라서 4가지의 범주로 나눈 것이다.  칸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눌 때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범주와 의지나 당위로 받아들이는 범주를 정하고 이러한 범주들을 정해주는 것은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범주가 우리 의식에 주어져 있다라고 정의내렸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범주가 12개라고 말하고 그 12개의 조합으로 감각이 의식이 새로운 범주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하나의 범주는 ‘변증법’을 통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범주들이 확장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변증법이 시작하는 순간에 범주 안에서만 가능한 ‘보수적인’ 경계를 정했다. 반대로 들뢰즈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속성은 이해하나 그것들이 연결되고 인접하고 이접하는 방식을 통해서 ‘천개의 고원’과 같은 새로운 범주들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하는 후설은 헤겔이나 칸트의 입장에서 현상 자체를 우리의 의식이 이해할 때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를 형식적 존재가 이미 범주를 담고 있고 그것들이 의미를 논리적으로 연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관없는 신체


민네이션, 언어


이미지와 언어의 싸움이 일어난다.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개념과 대상성을 사용한다.다시말하면 의식을 통해서 어떤 본질과 연결되는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장들을 만들어낼려면 먼저는 영역이 있어야하고, 그 안에서 범주가 있어야하고, 그 범주들 안에서 의미들이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이미지가 그 자체로 연결될 수는 없고 언어를 통해서 서로 연결관계가 된다는 것이 현상학자인 후설의 논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베르그송이나 들뢰즈는 그렇지 않고 우리 내면에서 어떤 지점에서는 이미지와 감각만으로 연결된 ‘신체없는 기관’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은 존재론의 싸움이다. 존재론이 설정되면 그 다음에 인식론이 등장하고, 그 다음이 학문으로 발전하면서 윤리학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후설의 노력이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후설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라는 것이고, 이미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은 객관적 표현 안에서이다.

현상자체로 주어진 것들은 결국 우리의 의식에 다가온다. 그 의식을 돌아보는 작업이 후설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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