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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1. 2018

전체와 무한

엠마누엘 레비나스_철학아카데미(문성원)

20180611_철학아카데미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_문성원

레비나스의 타자와 욕망 일기


들어가기


“우리가 알고 가진 것이 그 바깥의 무한과 닿아 있음을 깨닫고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이는 욕망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욕망의 혁명이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대해서 고민해 보면서 우리는 전체성 너머의 윤리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윤리와 종말론이라는 주제로 ‘전체성과 무한’의 서론을 읽어볼 것이다. 그 외에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욕망, 욕망과 혁명, 향유와 노동이라는 주제로 레비나스의 사상들을 살펴볼 것이다.


문성원 교수님의 강의. 지그문트바우만의 자유를 번역하셨고 이번에 전체성과 무한이 발간될 예정.


레비나스, 생애


마누엘 레비나스는 1906년 1월 12일 러시아 지배하의 리투아니아 지방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유대인 예일 레비나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모두 나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레비나스는 나중에 ‘나의 삶의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성경 교육을 받았으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등의 러시아 문학작품과 셰익스피어 같은 서유럽 고전들을 즐겨 읽었다.


1915년경에 가족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였다가, 1923년 가족을 떠나 독일에 인접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 철학을 비롯한 프랑스 철학뿐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을 배운다.


1926년에는 대학에서 모리스 블량쇼를 만나는데, 그와 블랑쇼는 이후 평생에 걸친 우정을 통해 영향을 주고 받는다. 1928년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가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강의를 직접 듣는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으며, 1929년에는 다보스 학술회의에서 벌어진 하이데거와 카시러의 유명한 토론을 목도하기도 했다.


레비나스에게 하이데거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넘어서야할 상대로 자리잡는다. 193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이름의 책을 출간하였다.  해 레비나스는 프랑스로 귀화한다. 1931년에는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스트라스부르의 동료와 함께 번역하여 출간한다.


이후 소르본 대학 등지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1934년에는 나치즘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히틀러주의에 대한 몇 가지 고찰’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1935년에는 나름의 독창적 사유의 단초를 담은 ‘탈출에 관하여’를 펴낸다.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만 곧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1946년부터 그는 유대인 교사 양성을 위해 설립된 동방 이스라엘 사범학교 교장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1947년에는 수용소에서 쓴 ‘존재에서 존재자로’와 장발이 운영하던 ‘철학학교’에서 한 강의를 엮은 ‘’시간과 타자’를 출간한다.1948년에는 예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실재와 실재의 그림자’를 발표했고, 이듬해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을 소개하는 논문들을 실은 ‘후설과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를 찾아서’를 발표한다. 1961년 그의 첫 번째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이 출간된다.


1963년부터 푸아티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65년 그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으며, 1967년 낭테르 대학 교수를 거쳐 1973년에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74년 두 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존재와 달리 도는 존재성을 넘어’를 내 놓는다. 1976년에 퇴임하는데, 소르본 대학에서 행한 마지막 학기 강의들이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이라는 책으로 붂여 1993년 출판된다.


그 밖에 레비나스의 주요 저작들은 ‘어려운 자유, 다른사람의 휴머니즘, 윤리와 무한, 관념으로 오는 신에 대하여, 주체바깥, 우리사이, 타자성과 초월’등이 있다. 1995년 12월 25일 파리에서 눈을 감는다.


문성원 교수님이 직접 쓰신 책을 모두 선물로 받았다. 쉽게쓰여진 읽기 좋은 책.


레비나스, 철학


레비나스는 자유주의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인 전제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자유에서 출발하는 폭력과 횡포를 문제 삼는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의는 자유보다 우선하며 그 정의는 타자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며 타자를 환대하는 데서 성립한다.


이것은 개인의 소유권을 불가침의 것으로 여기고 힘없는 자들에 대해 온갖 침탈을 일삼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보인다. 레비나스 철학의 고유한 특생은 무엇일까? 낯섦에 대한 관심과 감수성이 아닐까?


오늘날 타자의 지위는 달라졌다. 다르다는 것은, 낯설다는 것은 이전처럼 위협적인 것이 아니다. 낯섦과의 섞임은 일상이 되었고 피할 수 없는 방향이 되었다. 그러한 일상의 낯섦 가운데서 타자는 이웃이 되어서 돌아온다. 그 과정을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풀어내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 구성


‘전체성과 무한(1961)’은 레비나스의 출세작이다. 그 전에도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 같은 몇몇 저작이 있었지만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다. 레비나스는 1906년생이며 전체성과 무한을 쓰기 까지 꽤 많은 시간을 골몰하고 고민했으며 책을 쓰면서는 테레즈 골드스타인의 도움을 받았다.


전체성의 1부의 제목은 ‘동일자와 타자’다.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1부가 아마 가장 ‘전체성과 무한’다울 것이다. 3부에서는 얼굴과 외재성, 4부에서는 얼굴넘어를 주제로 다른다. 얼굴 넘어세는 에로스, 번식성, 자식성 같은 주제를 다룬다. 2부는 ‘내면성과 경제’가 제목인데 전체성과 무한의 부제가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라고 보면 2부는 전체 주제를 떠 받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에서는 향유, 거주, 노동, 작품 등의 개념이 등장하고 소외문제에 해당하는 전개가 진행된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 마르크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동일자로 만드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타자가 대칭적으로 존재할 때이다.


낯섬, 끌림


끌림이라는 것은 낯섦에 대한 감수성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낯설다라는 우리말이 프랑스어보다 더욱 레비나스가 말하는 낯설다라는 것과 비슷하다. 타자의, 낯선 이의, 낯선 얼굴의, 낯선 창의 호소에 응답하라고 한다. 낯선 얼굴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책임이고 선함이다. 이 선함은 타자를 향한 욕망과 통한다.


낯섬이 선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낯섦은 위험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부정적인 것, 선과 반대되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레비나스는 낯섬을 다룰 때 그 초점이 위험성에 있지 않고 소외의 문제의식에 있다.


소외가 내부화하면 그것은 동일자의 논리가 된다. 그러한 동일자들은 낯섬을 위험으로 여길 뿐 아니라 타자의 도움 없이는 그 동일성의 내면성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헤겔이 말한 소외의 개념을 가지고 오면서 낯설게 함이란 주체의 외화와 자귀복귀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르킨다고 말한다. 이 같은 소외는 동일성 내부의 문제이다. 자본의 폭력적 낯섦이건 관료제의 폭력적 낯섦이건, 그것은 왜곡의 소산이고 지양의 대상이며, 따라서 잠정적인 낯섦, 결국 낯설어서는 안되는 낯섦이다.



낯섦, 내부화


낯섦의 내부화가 낯섦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배경이었다고 할 때 내적 낯섦과 외적 낯섦을 염두해두는 것은 내적 낯섦과 외적 낯섦을 연결하는 선이다. 대부분의 위험은 내적인 것이 되었고, 외적 낯섦의 타자는 이제 내적 포결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에서 벗어나 있느 ㄴ것으로 취급된다. 낯선자, 타자는 약한자, 가지지 못한 자다. 아감벰의 호모사케르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섦, 감수성


낯섦의 감수성에는 보다 적극적인 면도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낯선자가 이웃이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타자가 이웃은 아니다. 그러나 타자가 내게 나타나는 방식은 이웃으로 다가오는데 있다. 모든 타자는 이웃이 될 수 있다.


모든 타자가 현재 내 이웃이 아닌 것은 내가 한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 이웃은 모두 타자고 낯선 자다.

그는 유한을 벛어난다. 낯섦은 언제나 내 곁에 다가와 있고, 이 낯섦은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 낯섦 면에서 친숙한 면으로 이행 이것이 바로 방향전환이다. 나로부터 가족, 친지, 지역, 국가, 세계로, 이런 확장의 원심성으로부터 탈피이다. 섦이, 타자성이 내게 파고든다. 내게 다가온 타자, 내이웃인 타자는 나득한 낯섦을 지닌다. 2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 이웃인 오늘의 상황은 우리에게 낯섦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 여성성


레비나스에게서 낯섦은 초월적이지만, 여성성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여성성은 내면성의 계기다. ‘전체와 무한’에 나오는 에로스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서술 속에서 여성적인 것은 약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초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여성적인 것은 존재 너머가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 관계하며, 표현이나 의미가 아니라 표현에 이르지 못하는 비-의미의 관계이다. 여성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시각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여성성은 내밀하지만 낯설지 않다. 타자가 여성일수 있지만 타자가 타자인 것은 여성성 때문은 아니다.



레비나스, 실존주의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을 쓰면서 존재와 시간에 관심을 기울였다. 후설의 저작에 도움을 얻고, 마르틴 부버나 가브리엘 마르셀을 참조했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도 서문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또한 베르그송의 의식과 시간의 개념을 참조했다는 것도 드러난다. 실존주의 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앞서서 형이상학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레비나스, 타자


이미 인간은 타자화되어 있다. 하이데거에게 타자는 ‘나’라는 실존에 대칭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니깐 동일자의 논리인데, 나를 대칭해서 존재하는 타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있고 타자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전체성의 시작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는 타자가 먼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타자로 인해서 존재한다.레비나스에게 자유란 응답이다. 타자의 존재, 얼굴,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응답할 수 있음이 바로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내어줄 수 있는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읽었던 윤리와 무한. 그리고 너무나 어려웠던 시간과 타자.


유일성, 유일성


유일성으로부 부터 유일성이 바로 초월이다. 모든 매개 밖에서, 영역 밖에서 존재하는 타자는 유일하다. 동일하다고 잡아낼 수 있는 범주개념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매우 후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설이 이야기하는 범주와 영역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 말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서 벗어나서 오히려 후설의 현상학으로 돌아가는 레비나스는 마침내 하이데거가 읽은 원전으로서의 후설을 극복하고 자신이 해석한 후설 현상학으로 부터 형이상학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레비나스, 존재론


서구의 근대적 이성은 세계를 통일적 원리로 파악해내고 이를 통해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넓히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성의 빛’은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영역을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식민지 지배와 이익 추구 경쟁을 통한 제국주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이성과 계몽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니체나 하이데거의 철학처럼 한편에서 계산적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했던 철학들도 히틀러의 파시즘에서 보듯 전체주의에 이용당하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레비나스는 그 까닭이 그러한 철학들도 여전히 존재론을 앞세웠던 데 있다고 여긴다. 존재론은 세계의 근본적인 됨됨이를 통일적 원리로 파악해내려는 시도다. 그럼으로써 암묵적으로 노리는 바는 그러한 원리를 통해 장악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을 앞세우는 철학은 지배를 지향하는 자기 중심적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존재론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를 테면 니체처럼 고정된 상태를 깨뜨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내세우든, 하이데거처럼 존재자들의 규정에 앞서 차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를 내세우든, 결국 동일성이 철학이 되고 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한 파악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동일성의 확장과 지배이며, 다양한 개념들과 사유 방식들은 거기에 봉사한다.


https://youtu.be/au58U4x87t0

레비나스 강의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들어보자



자크데리다, 대안


자크 데리다의 철학은 이른바 해체론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데 동일자의 철학을 파괴시키는 존재론이다. 개념과 체계가 지배의 확장과 전체화를 획책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개념이나 체계든 자체 안에 허점과 모순을 안고 있음을 드러내어 ‘해체’해 버림으로써 그러한 지배의 시도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의 사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상, 개념과 체계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해체론에 따를 때 우리에게 남겨진 방도는 해체와 재구축의 끝없는 되풀이일 수 밖에 없다.



레비나스, 주체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는 강점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을 일깨운다는 데에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해체 이전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존재론에 앞서기 때문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우리의 삶은 어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주체 자체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성립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어떤 주체를 설정하고 그 주체에 의해 의미 세계가 구성된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레비나스의 견지와 큰 거리가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무게의 중심은 동일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게 놓인다.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만남이 우리를 주체로 분리시키고 자리잡게 한다.나의 삶은 타자의 호소나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반응이 먼저이다. 그 반응은 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기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감성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이성에 우선한다.


인식에 따른 규정은 응답을 통해 성립하는 분리된 존재가 자신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일반화하기 위해 생겨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전체적 파악으로서의 존재론은 이런 인식을 체계화한 것이니만큼, 타자와 맺는 근본적 관계인 윤리에 앞설 수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954 후설의 현상학 강의가 도움이 된다




민네이션, 소외


레비나스에게서 소외의 개념은 재미있다. 헤겔은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 문을 닫을 때 내적인 소외가 일어난다고 하면서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외재성이라는 세계에 대한 소외를 가지고 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는 헤겔의 소외 개념을 빌려와서 타자, 낯섦, 알지못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내적인 자아는 소외를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섦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소외에서 벗어나게 해주면서 동일성과 내재성에만 머물르지 않도록 도와주는 그런 타자말이다.


이러한 타자가 바로 이웃이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서 레비나스는 동일자가 아닌 낯섦을 가진 자들이 사실은 ‘이웃’이라고 말한다. 이웃이라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보다는 친근함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얼굴


레비나스는 ‘얼굴’의 개념에서 신비의 개념을 가지고 온다. 신비함이란 정의내일 수 없음이고, 정지할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신비함이라는 것은 자체로 ‘미스테리’인 것이다.우리 몸의 가장 신비한 곳은 얼굴이다. 얼굴은 가만이 있지 못한다. 눈꺼풀이 떨리고, 입술이 실룩거리고, 우리의 마음이 온통 얼굴에 ‘유동적’으로 유연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서 우리는 신비함을 느낀다. 타자의 얼굴을 보라. 우리는 타자를 정의내릴 수 없다. 타자를 ‘이름’하나로 모든 속성을 담아낼 수 없다. 타자는 신비다. 타자의 얼굴은 신비다. 타자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은 신적인 속성에 가까운데, 그것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는 외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타자를 섬기도록 만들어졌다.


타자는 더욱이 이웃이기에 이웃을 섬기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웃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가면을 씌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신비한 타자의 얼굴이 가려지고서는 정지해 있는 동일성의 얼굴, 내 얼굴이 비친 거울리 되어 버린다. 그래야 타자를 무시하거나 죽이거나 타락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타자의 얼굴을 지우는 법을 매우 많은 부분에서 배우고 익힌다.


타자의 얼굴은 그 자체로 신비이다.



민네이션, 차이


레비나스의 논리에서 동일성은 나쁜것이다. 인간적이지 않고 전체성을 가진 것이다. 차이는 오히려 동일성을 벗어나게 해 준다.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같은 것’을 먼저 찾고, 그 후에 ‘다른 것을 찾는다’ 다른 것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들은 동일성과 거리를 두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리는 낯섦의 일종기는 하지만, 위험, 위협, 불안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다른 것’을 전제하고서 ‘같은 것’을 찾아갈 때, 그것도 웃연히 찾아갈 때에는 완전히 다른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는 기다림이고, 애무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면서도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리이다.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우선순위에 따라서 타자를 레비나스로 읽을 것인지, 하이데거로 읽을 것인지, 들뢰즈로 읽을 것인지, 칼 슈미트로 읽을 것인지가 정해진다.



민네이션, 형이상학


들뢰즈, 베르그송과 완전히 대비되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살펴본다. 현상학이나 하이데거의 논리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에 있다면, 레비나스는 완전히 형이상학인 ‘윤리’를 바탕으로 존재론보다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초월’의 개념과 ‘무한’의 개념이 인간 의식에 바탕이 되며, 이렇나 초월적 무한의 개념을 신에게서 가지고 온다.


초월성을 가진 타자와 무한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대화와 레토릭 그리고 함께 행동하는 것, 다시 말하면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에서 ‘향유’가 일어날 때이다. 타자와 함께 공유하는 경험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기본적인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이 먼저이고, 이러한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인간은 전체성의 테두리 안에서 동물적인 습속으로 전락해 버린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민네이션, 애무


타자를 느낄 때 어떻게 느끼는가? 타자의 신체와 나의 신체가 만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레비나스는 ‘애무’를 그러한 타자와 만나는 사랑의 향유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전혀 상대방을알지 못한다. 타자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타자를 애무하는 것을 통해서 감각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남녀사이에서 애무는 그래서 섹스보다 더 중요하다. 섹스는 하나님됨인데 그 하나님은 타자가, 낯섦이 서로 하나가 되는 신비함의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성기의 삽입만으로 쾌감을 느끼는 동일자적인 습관이 아니라 애무를 통해서 상대방의 신비를 느끼고 감사하는 것에서부터 사랑의 관계는 더 깊어진다는 것이 레비나스 논리이다. 상대방을 애무할 때, 얼굴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애무를 통해서 신비를 경험한다.


민네이션, 관계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타자와 공존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이다. 한가지는 같은 몸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주체가 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다른 타자가 한몸이되는 연인의 관계이다. 타자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현상학적 관계'들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의 현상학을 보고 있는 것이고, 부부관계를 통해서 완전히 다른 주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시간 안에서 타자가 서로 '사랑함'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레비나스를 좋아한다. 레비나스가 가지고 있는 개념중에 '환대'의 개념은 '사랑'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네이션, 스피노자


레비나스와 스피노자는 같이 신의 개념을 이야기하지만 그 출발점이 다르다. 현상학적 경계에서 출발해서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으로 상승하고, 스피노자는 물질에서 현상학적 경계에 도달한다. 후설은 그 경계를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들에게서 찾아내서 언어로 만들었다면, 거기서 출발해서 형이상학을 만들어가는 레비나스는 ‘현상학적으로 이웃이 내 의식속에 있다’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게 바로 윤리이다, 그것도 타자에 대한 윤리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형상화하면서 모든 것이 신의 속성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도는 각기 다 다르다. 그러니깐 종착점은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현상학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타자가 이미 존재하고 그것 가운데 윤리가, 관계가 발생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761 스피노자 강의를 곁들여서.



민네이션, 질문의 위상학


레비나스의 개념에서는 응답하는 자가 위상학적으로 높이에 있다. 타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타자에게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다.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는 존재자체로 이미 무엇’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타자는 우리에게 대해서 ‘응답’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타가가 먼저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사실은 더 위상학적으로는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전체성은 질문하지 않는다. 또한 질문을 받아주지 않는다. 전체성에서 타자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




https://brunch.co.kr/@minnation/668

김선하 교수님의 강의와 연결해서 더 이해가 풍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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