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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05. 2018

운동과 체계

루트비히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_박정하

2018702_철학아카데미

루트비히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_박정하

1장 헤겔 관념론과 변증법의 의의와 한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강좌 1_마르크스 철학 입문>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함께 읽기


청년헤겔좌파의 입장에 선 마르크스와 엥겔스.


강좌, 소개


이 강좌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되는 첫 번째 강좌로서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가 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을 함께 읽고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고자 하는 강좌이다.


총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문고본 분량의 이 짧은 책은 마르크스철학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헤겔의 변증법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를 간략하지만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번역본으로 이 책을 직접 함께 읽으면서, 독일철학전통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철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핵심 주장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시도해 볼 것이다. 가을 학기에는 마르크스의 저작인 [공산당 선언]과 [고타강령비판] 등을 함께 읽는 ‘기념강좌2’가 개설될 예정이다.


철학-정치경제학-과학적사회주의의 마르크스 구상.


들어가기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구조에 대해서 보자. 가장 바닥에는 ‘철학’적 배경을 세계관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것은 첫번째는 역사유물론이고 그 다음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서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해서 접근한다. 세계는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한 철학적 구조이다.  두번째 철학적 배경 위에는 정치경제학이 있다. 정치경제학은 현실분석의 차원에서 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세번째는 과학적 사회주의로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생각한 ‘처방’에 속한다.


첫번째 철학적 기반을 만들었을 때는 마르크스가 청년때여서 독일 고전철학 ‘청년헤겔주의’노선에 있다가 처방으로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다룬다. 철학적 기반이 다져지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서 중년의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푸리에나 생시몽 등의 소위 공상적사회주의자들과 만나서 논쟁을 하다가 결국은 현실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직감하고 그와 반대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이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경제학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게 된다.


그 후에 마르크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산업혁명의 변화를 보면서 현실에 대한 분석을 더해서 ‘자본론’을 쓰게 된다. 논리적으로 보면 철학-정치경제학-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볼 수있지만 시간적으로는 ‘철학-과학적사회주의-정치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은 헤겔에게서 배우고, 유물론에 대해서는 포이에르 바흐에게서 배운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는 엥겔스가 사용했고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말했을 뿐이다.


메타인지로 정리해주신 박정하 선생님


요약, 마르크스


1. 세계관, 철학, 독일, 역사적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세계, 인간, 자연,사회회

2. 현실분석, 정치경제학, 자본주의, 현실분석, 영국, 경제학

3. 처방, 과학적 사회주의, 프랑스 사회주의


머릿말,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글


다음의 머릿말은 1888년 2월 21일 런던에서 엥겔스가 쓴 서문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1859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째서 우리 두 사람이 1845년 브뤼셀에서 ‘독일 철학의 관련론적 견해에 대립되는 우리의 견해(즉, 주로 마르크스에 의해 완성된 유물사관)를 같이 완성하기로 결했는지를 밝혔다.즉 사실상 우리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철학적 확신을 결산하기로 한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계획은 헤겔 이후의 철학을 비판하는 형태로 수행되었다. 두 권의 두꺼운 8절판으로 된 최고를 오래전 베스트팔렌에 있는 출판사에 맡겼으나, 그 후 우리는 사정이 달라져서 출판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이해한다는 주요한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에 그 원고를 쥐들이 갉아먹는 비판에 맡겨 두었다.”


그때부터 40여 년이 지났고 마르크스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나나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논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헤겔에 대한 우리의 전해에 대해서는 이곳저곳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한 일은 있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포괄적으로 전체를 취급하지는 못했다. 포이어바흐는 여러모로 헤겔 철학와 우리 견해 사이의 매개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도 다시 토론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르크스의 세계관은 독일과 유럽의 경제를 멀리 벗어나 세계의 모든 발달된 언어권 내에서 신봉자들을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 독일의 고전철학은 외국, 특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 조차 그곳 대학들에서 철학이라는 명목하에 공급되는 절충주의라는 거지 죽에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나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헤겔 철학과 우리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할 때라고 생가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헤겔 철학에서 출발했고, 또 어떻게 헤겔철학와 인연을 끊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


정치경제학, 명제


정치경제학 비판(1859년)에서 생산관계가 그 사회의 토대라는 것을 밝혀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동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자연을 대상화시켜서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념을 노동을 통해서 현실화시킨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생산관계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노동은 ‘임노동’이고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해서 생산해내는 관계이다.


임노동은 사실 중세봉건제, 노예제를 넘어서 임금이라는 연결관계에 따라서 운영되는 제도이다.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임노동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만약 임노동이라는 제도가 생산력을 증가시키지 못하면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있다.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생산관계를 토대로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만들어지고, 이것에 대응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법적/정치적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평행하는지 아니면 수직관계로 존재하는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생산관계-법적/정치적 구조-이념’으로 구서오디는지 아니면 생산관계-법적/정치적구조’와 생산관계-이념’이 서로 평행하는지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헤겔, 하인리히 하이네


칸트에서 헤겔까지의 여정을 보자. 칸트는 대학교수였고, 그 당시 철학자들과 다르게 제도권 내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이 당시의 관주도 학문에 대한 이해와 함께 누가 철학적 담론을 만들어내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헤겔까지 오면서 관주도 학문의 측면에서 ‘국가’를 유지하거나 만들어내는 형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다분히 국가적 관점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도, 자유주의자들도 간파하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하인리히 하이네가 밝혀낸다. 헤겔에 대해서 하이네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라는 명제에 집중한다. 당시 철학 명제 가운데에서, 헤겔의 유명한 명제만큼이나 정부의 감시와 그에 못지 않게 근시안적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없었다.


헤겔 이전의 칸트는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고 그것이 서로 ‘두 왕국’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헤겔에 와서는 변증법을 통해서 존재-당위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존재의 중요성을 가지는 쪽이 헤겔 우파이고, 당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이 헤겔 좌파가 된다. 청년헤겔좌파에 마르크스가 있었다.


헤겔의 정반합 모델.


헤겔, 명제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보자. 실로 이 명제는 확실히 현존하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전체주의, 경찰국가, 전제 재판, 검열 등에 대한 철학적 축복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와 같이 생각하였고, 그 신하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무조건 현실적이기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성이라는 속성은 동시에 필연적이기도 한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자신의 전개 과정에게 현실성은 필연성임이 입증된다’라는 명제를 보자.


그러므로 헤겔은 정부의 이런 조치를 무조건 현실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필연적인 것은 결국 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헤겔의 명제는 그것을 당시의 프로이센 국가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데 불과하다.


이 국가는 그것이 필연적인 한 이성적이며 이성에 상응한다. 그런데 만일 국가가 우리에게 악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존속한다면, 정부의 악은 그 악에 상응하는 신민의 악으로써 정당화되어 설명된다. 요컨대 당신의 프로이센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는 그러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성은 헤겔에 의하면 임의의 시기, 임의의 정세 아래 주어진 임의의 사회제도와 정치제도에 내재하는 속성인 것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반대이다.



헤겔, 현실


로마 공화국을 몰아낸 로마제국도 역시 현실적이었다. 프랑스 군주제는 1789년에는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군주제는 헤겔이 언제나 매우 감격에 넘쳐서 이야기하던 대혁명에 의해 전복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군주제가 비현실적이었고, 그 혁명이 현실적이었다. 또 이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현실저깅었던 모든 것이 발전함에 따라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자기의 필연성, 자기의 존재 권리, 자기의 합리성을 상실한다.


사멸하는 현실성을 대신해서 새로운 생동력 있는 현실성이 나타난다. 이 현실성은 낡은 것이 충분한 사려를 가지고 저항하지 않고 사멸하는 경우엔느 평화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이 새로운 필연성에 저항하는 경우에는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 자체에 의하여 그 대립물로 전환한다. 즉, 인류 역사에서 현실적이었던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그 본성 자체로 보아 이미 비이성적이라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당초부터 비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 안에 있는 이성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현존하는 외견상의 현실성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현실ㅈ거인 것이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헤겔의 사유방법의 모든 규칙에 의하여 다른 명제, ‘존재하는 모든 것음 멸망하여 마땅하다’라는 명제로 바뀐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적 존재론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완성된 존재로서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과정’에 진리가 발견된다는 변증법의 어느지점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변증법이 과연 처음부터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과정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은 아닌가?


변증법, 부정


헤겔이 보는 현실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항상 긍정과 부정을 가지고 있었다. 부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가지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현실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형화되고 멈춰있게 된다. 그러나 시간 속에 존재들은 멈춰있을 수가 없다.  변증법은 따라서 부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대화라는 것은 항상 2사람이 서로를 부정해야만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체계, 모순


엥겔스의 따르면 체계와 방법 사이의 모순이 가장 큰 헤겔의 문제이다. 체계는 정해져야만 하는데 변증법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오면 체계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헤겔우파는 체계를 선택하여 존재론으로 가고, 헤겔좌파는 방법론을 선택하여 변증법으로 간다. 헤겔은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동일한 것으로 놓았고 그것을 동일하게 놓을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개념과 사유, 역사적으로는 사실과 세계의 논리인데 그것은 사실 존래론의 측면이었다. 그래서 우파들은 이것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고 싶어하는 헤겔의 이념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좌파는 그것은 모순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체계에 따르면 헤겔철학이 완성되고, 자신이 속한 세계과 완성되고, 프로이센 국가가 완성이라고 말해야하는데 변증법적으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특한 점은 유물론과 관념론을 대비시켰다는 것이다.


헤겔, 엥겔스


엥겔스는 헤겔좌파의 입장에서 헤겔 우파를 공격한다. 그것은 인륜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국가를 붕괴시키는 변증법을 통해서인 것이다. 엥겔스는 헤겔을 분석할 때 변증법 자체에 집중했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 현실은 자본주의인데,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공산주의가 이루어졌을 때 ‘변증법’은 결국 멈추게 되는가? 여기서 이제 새로운 갈림길이 나온다. 이루어진 공산주의는 과연 변증법이 존재하지 않는가? 어디까지 변증법을 주장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이다. 엥겔스는 헤겔을 속물근성에 연유해서 당시의 시대를 완정한 체계 혹은 인륜성의 완성이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 레닌


레신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라고 한다. 노예제-봉건주의-사회주의’로 발전은 사적소유의 발전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것은 소유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상태는 금방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 과도기에 사회주의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레닌은 이러한 사회주의 이후에 공한주의의 완성이 온다고 생각했다.


헤겔학파, 헤겔철학


헤겔학파는 해체되었지만 헤겔 철학은 아직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못하였다. 슈트라우스나 바우어는 각각 헤겔 철학의 한 측면을 끄집어 내어 그것만을 논쟁의 무기로 삼고 서로 갑론을박하였다. 포이어바흐는 체계를 분석해놓고서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떤 철학을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민족의 정신적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준 헤겔 철학과 같은 그러한 위대한 창조물을 그저 간단히 무시함으로써 그 철학을 제거할 수는 없다. 헤겔 철학은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은 의미에서 ‘지양’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철학의 형식은 비판적으로 폐기되어야 했지만, 이 형식을 통하여 획득한 새로운 내용은 살려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과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는 추후에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는 동안 1848년 혁명은 포이어바흐가 헤겔을 밀어젖힌 것처럼 모든 철학을 거리낌없이 밀어젖히고 말았으며, 그러자 동시에 포이어바흐 자신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알려진 평전 중에 가장 평가가 완벽한 이사야벌린의 평전.


마르크스, 포퍼


마르크스 주의에서도 헤겔이 상정한 ‘종결점’으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역사주의에 따라서 법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회공학으로 풀어내면서 유토피아를 설정한 것은 포퍼가 보기에는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자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비판적 합리주의에서 포퍼가 이야기하는 점진적 사회공학이라는 것을 핵심적으로 보면 변증법적 사회공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점진적 사회공학은 ‘추상적 선의 실현보다 구체적 악을 제제하는 방식’이라고 포퍼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발전을 상정하고 그 발전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포퍼의 ‘열신사회와 그 적들’에서 역사주의와 함께 목적론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포퍼의 구체적 점진주의는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개량주의로는 전체적인 구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헤겔, 변증법


헤겔 변증법의 핵심은 끊임없는 부정의 과정이다. 이렇게 변증법을 보게 되면 모든 것들이 상대적인 것들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변증법과 반대에 있는 형이상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형이상학은 메타피직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상 배후에 본질과 실체가 있다는 측면에서 고정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개체를 중시하게 되고 이것은 더더욱 자유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변증법은 형이상학과 반대로 과정과 관계를 중시하는 구조주의에 속하게 된다. 인간이 생산관계에 의해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되면 계급에 속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계가 더 발전하면 ‘전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전체의 관계를 바라보는 전체성으로 발전하면서 공동체주의나 전체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헤겔학파, 붕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기성 종교에 대한 투쟁의 실천적 요구로 인해서 아주 과감한 수많은 청년 헤겔학파 학잗르이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으로 경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자기 학파의 체계와 충돌하게 되었다. 유물론은 자연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지만 헤겔의 체계에서 자연은 절대 이념의 ‘외화’, 말하자면 이념의 퇴화에 불과했다.


여하튼 사유와 이 사유의 산물인 이념이 이 체계에서는 1차적인 것이며, 자연은 이념이 거기에까지 하강함으로써만 존재하는 파생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그들 체계의 모순 속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포이어바흐, 유물론


그러한 때에 포이어바흐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이 나왔다. 이 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다시금 유물론의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그 모순을 일격에 해소해 버렸다. 자연은 어떠한 철학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존재한다. 자연은 다름아닌 자연의 산물인 우리 인간이성장하는 기초이다. 자연과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적 환상이 조작한 최고의 존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질의 환상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주문은 파괴되었다. ‘체계’는 붕괴되어 포기되고, 모순은 다만 상상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간단하게 밝혀냄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저서의 해방적 작용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순식간에 포이어바흐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가 얼마내 새로운 견해를 환영했으며, 또 그가 이 새로운 견해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하는 것은 ‘신성가족’(마르크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가지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마르크스 주의의 특이한 점이다.


철학사, 유물론


철학사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이 반대였다. 중세의 유명한 보편논쟁은 바로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결이었다. 사람이라는 보편개념은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없다면 개별자가 있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사람이 되는 방식인 nomianlism이 되는 것이다.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결과 함께 실재론과 관념론과의 대결이었는데. 엥겔스는 유물롼과 관념론을 대립시킨다. 이것은 철학사로 볼 때 매우 특이한 대립이었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와 막스의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방법과 체계의 모순’을 유물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 유물론


영국에도 유물론자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론자는 홉스였다.홉스의 유물론의 결정론이 바로 ‘리바이어던’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는 자기보존의 욕망인 관성을 핵심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다. 유물론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전사회나 인간의 조직이나 관계에 투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에서 발견한 원리인 자기보존의 원리를 가지고 국가를 유물론적으로 구성하기에 이른다.




민네이션, 헤겔


헤겔에 대한 이해가 먼저이다. 헤겔이 이야기한 ‘정-반-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정이다. 시대와 현상을 부정할 수 있는 힘 이것이 바로 헤겔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보다 헤겔의 방법론을 시행했을 때 만들어지는 체제는 그럼 어떻게 체제 혹은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거싱 바로 헤겔 우파와 좌파의 싸움이었다.


헤겔에게서 나는 무엇을 볼 것인가? 변증법을 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현상학으로 규정된 ‘체계’를 볼 것인가? 이에 따라서 정해진 존재론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리이자 방법론인 변증법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헤겔에 대한 독해를 통해서 사회주의의 방법론도 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칸트


칸트와 헤겔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정해진다. 다시 말하면 정해진 존재론을 집중하면 칸트가 되고, 변화하는 세계를 보면 헤겔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보이는 사실적인 것들은 순수이성의 구성요소로 보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당위의 문제로서 실천이성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이 두가지는 절대로 서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고 인간은 당위의 존재냐 사실의 존재냐로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은 현상과 만나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신과 그와 반대되는 현상이 만나서 새로운 정신현상학이 만들어졌고 이거싱 바로 만물이 만들어지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엥겔스는 청년헤겔주의 좌파의 입장에서 이러한 변증법적 원리를 종결짓는 절대진리소서 체계는 변증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러나 헤겔의 정신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의문이다. 종결만이 의문이 아니라 시작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시작을 다시 보게 되면 종결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랙탈원리에 따른면 하나의 완성된 체계가 프랙탈로 완성이 되어서 유리수인 ‘1’로 표현되면 그것은 3으로 가기 위한 원료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완성이 다른 차원의 변증법으로 발전하는 방식이다.



민네이션, 플라톤주의


우리의 정신과 사물은 어떤 관계인가? 사물은 정신의 외화에 속하는가? 아니면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오히려 사물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지는가? 바로 여기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의 차이가 발생한다. 플라톤주의적으로 볼 때 존재는 정신인 이데아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고, 정신의 본질을 사물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의가 끝난 뒤 걸어나오는 길에_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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