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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09. 2018

유물과 변증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협력의 종말 2장_박정하

20180709_철학아카데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협력의 종말_박정하

포이어바흐, 엥겔스의 유물론


이책으로 강의를 진행중, 아래글은 양재혁 선생님의 옮긴이 서문.


들어가기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분은 어떻게 해야할까?철학의 기초적인 세계관을 말할 때 관념론이란 유물론과 반대의 입장을 말하며, 세계를 설명할 때 물질에 대하여 의식을 마지막 기초로 강조하는 인식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관념론이란 정신이나 영혼을 감각의 ‘기초’로 보고 객관 사실의 총체인 물질을 종속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철학관이다.


관념론은 크게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련롬’으로 분류된다. 객관적 관념론이란 인간의 의식을 그가 살고 있는 역사, 사회적 기초로부터 독립식켜 독자적인 ‘객관적’ 본질로 변형하고 물질적 세계는 독립시켜 독자적인 ‘객관적’ 본질로 변형하고 물질적 세계는 독립된 의식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근본적 원리를 뜻한다. 이러한 예는 주자의 이학과 같은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은 인간의 의식을 절대화시키며 따라서 객관적 세계를 단순한 의식을 내용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주체로부터 독립된 외부 세계를 부정하려는 태도이다. 예를 들면, 불과와 왕양명의 심학을 예로 들 수 있다.



객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은 플라톤 철학에서 완성되었으며, 그것이 중세에는 기독교 사상(토마스 아퀴나스)으로 대표되었고, 근세 시민철학에서는 라이프니츠와 헤겔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현대 서구 철학에서 객관적 관념론은 신헤겔주의나 이른바 신토스주의, 새로운 존재론 등을 통해서 인간, 의식 밖의 절대적 신이나 이성을 전제로 하는 데서 나타난다.


관적 관념론은 18세기 초 버클리와 흄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었는데, 현대 서구 철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실증주의, 생의 철학, 실용주의, 실존주의 등으로 대표된다. 이 철학의 경향은 실제적 사물이나 객관세계를 주관적으로 의식하고 평가하고, 인식의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인식을 여러 단계로 구분하여,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고 본질은 선험적이라 알 수 없다는 칸트의 경우와는 반대로, 선험적 질서는 나, 즉 자기의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피히테나 바우어의 표현이다. 여하간 주관적 관념론은 현대로 전해 오면서 숙명적이고, 종교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사회와 연관되어서 엘리트이론으로 대표되고 있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사회적, 관념론


사회적 차원에서 관념론은 사회적 적대적 계급관계, 특히 정신노동의 육체노동의 심한 차등에서 더욱 예민하게 전개되었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물질과 의식이라는 두가지 요소로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사변적으로 절대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렴적 철학방법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특정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고, 나아가 교육을 독점하고, 사회적 실천을 천시하고 정신적 행위만을 우월하게 여겨 지배계층의 흥미에 영합하는 이데올로기에 작용하였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때문에 관념론과 유물론은 역사적 산물이다.


독일 후기 관념론에서 쉘렝Scheling의 경우 종래의 방법에 변화를 보여, 자연의발생을 긍정하면서도 또한 그것은 오직 정신적 산물이라는 이중적 체계를 시도하고 있으나, 헤겔은 그와 달리 자연의 관념성을 자기 철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관념론을 본유관념으로 보아 선험적인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감각론과 유물론을 한편으로 보고 그에 반하여 유심론, 합리론, 관념론을 같은 것으로 보아 다른 한편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독일 관념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체계에서도 구분하고 있다.


포이어바흐를 넘어서 이제 모든것에 변증법을 적용한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는 ‘포이어 바흐’에 관한 첫 번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은 포이어바흐를 포함하여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을 다만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성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기 때문에 행위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하여 관련론에 의하여 추상적으로만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관념론은 현실적, 감각적 행위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이든지 우주의 창조를 승인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우주의 창조는 철학자들, 예컨대 헤겔의 경우에는 기독교에서보다도 더 혼란되고 황당 무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하였다. 관념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표현은 원래 위에서 말한 이외의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하이네


자연, 과학


옛날에 과학이 현대와 같이 발전되지 못하였을 때의 사람들은 자연 속의 알 수 없는 물리, 화학, 생물학적 변화들을 모두 막연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신의 기적이나 위력을 빌려서 설명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산업의 발달과 함께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이 급속도로발전하고 자연의 생명 변화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설명되면서, 자연의 변화, 즉 생성, 변화, 소멸 작용이 신의 창조물이란느 이제까지 철학이 담당했던 허망한 이론을 합리화하는 역할은 막을 내리게 된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유물론을 거론하면 적대적 이단으로 배척하고, 한편 관념론만이 진리인 양 잘못 배워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관련론이 중세 이후 봉건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체제에 철저하게 봉사했던 사실에서 유래했다. 하늘의 명령을 받은 왕이 지상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전통 철학은 오늘도 여전히 지배체제 합리화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도 사회 발전에 자연과학적 방법(유물론)을 적용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유물론을 기독교를 비판함으로 입증한다.


엥겔스, 저자


엥겔스가 1886년에 이 책을 쓸 때의 목적은 그 때까지 관념철학으로 세계를 걺여하던 것을 새로 발견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 이론으로 대치하려던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유물론이란 자본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똑같이 그들의 육체에 영향본을 공급하여 생활하게 하는 현대의 역사과학을 지적할 뿐이니, 우리들은 이제 유물론이라는 학문방법에 대해서 어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선입견도 버려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다같이 이데올로기화되었던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불식시키고자 엥겔스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이라는 작은 책을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역자)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나야 비로소 모순 개념이 나오게 된다


포이어바흐, 엥겔스 해석


포이어 바흐의 발전과정은 헤겔학파의 한사람이 유물론에 이르는 발전과정이다. 이러한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포이어바흐는 자기 선배의 관념론적 체계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포이어바흐는 불가항력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식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서 헤겔의 절대이념이 천지개벽 이전에 존재하였다든가, 우주 생성 이전부터 ‘논리적 범주가 이리 존재했다’라는 것 등은 피안의 조물주에 대한 신앙의 환상적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또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인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적 세계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아무리 초감각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 육체적 기관인 뇌수의 산물이다.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정신이 물질의 최고 산물에 불과하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순수한 유물론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러 포이어바흐는 돌연히 발걸음을 멈춘다. 그는 보통의 철학적 편견, 다시 말해서 ‘유물론’의 본질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이라는 명칭을 꺼리는 선입견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새로운 변증법을 만들어낸 엥겔스와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유물론


포이어바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물론은 나에게는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지식이라는 건축물의 기초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유물론은 생리학자나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자, 예를 들면 몰래쇼트가 주장하는 그런 유물론은 아니며, 그들의 견해나 그들의 전문직업에 따라 그들이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유물론이 아니다. 즉, 내가 주장하는 유물론은 건축물 자체는 아니다, 뒤를 향해서는 나는 유물론자들과 완전히 일치하나, 앞을 향해서는 그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포이어바흐는 여기에서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이해에 기초한 일반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과 18세기라는 일정한 역사적 단계에서의 이 세계관의 특수한 표현 형태를 혼동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일반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과, 그것의 천박하고 비속화된 형태를 혼동하고 있다.


18세기의 유물론은 오늘날 이러한 천박하고 비속화된 형태로 자연 과학자나 의사의 두뇌 가운데 존속하고 있으며, 1750년대에는 행상식 설교자 뷔히너, 포크트 및 몰레쇼트가 바로 이러한 형태로 유물론을 포기했다. 그러나 유물론도 관념론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발전 단계를 거쳐왔다.


헤겔과 청년들.


유물론, 헤겔


유물론은 주로 기계론적 유물론이었지만 헤겔의 등장으로 변증법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헤겔에게서는 변증법은 공간에서는 일어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정신의 발현이 물질들은 공간적으로 드러나지만 시간적으로는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 안에서도 유물론들이 변증법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제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에게 모두 적용된다는 것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관이 되는 것이다. 무생물은 물질, 식물은 물질과 생명, 동물은 물질과 생명 그리고 영혼이 연결되었고, 인간은 물질과 생명과 영혼에 더해서 정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진화론은 세포 즉 생물의 차원에서 식물, 동물, 인간을 하나로 묵었다.유물론은 진화론에 물질을 더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이 모두 변증법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것이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엥겔스는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헤겔도 포이어바흐도 유물론을 기계론만으로만 연결했고 변증접적으로 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유물론, 관념론


엥겔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유물론과 유심론’ 그리고 인식론의 차원에서 ‘관념론과 실체론’의 구분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을 대립시킴으로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대립을 보여준다. 이것은 엥겔스가 하고 싶었던 작업이 ‘세계관’의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고 이것은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 실천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새로운 연결방식이 바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는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실천을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다.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을 세상을 보는관점을 바꾸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지식 구분


Episteme는 이론적인 앎으로서 이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Nous는 직관적인 앎이며 이것도 역시 실천적인 이성은 아니다.

Techne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파악하는 것이다. 테크네는 노동으로 대변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정신과 물질의 결합이 테크네의 입장에서 볼 때

Phronesis는 비판적 이성, 목적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이고, 이것은 도덕적인 부분이었다. 당연히 이 영역에서는 칸트가 되었다.


알튀세르에게서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앎으로 실천적 이론을 강조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각 영역에서 서로 영향을 받고 서로 영향을 받는데 최종심급은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마다 어떤 심금이 궁극적으로 그 역할을 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경제라고 말했다. 경제가 정치를 최종심급으로 만들기도 하고, 경제가 종교를 최종심급으로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강조한다. 노동, 도덕, 이론과 독자적으로 의사소통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알튀세르를 제외하면 도덕과 노동의 범주에서만 실천적 영역이 발휘되었지만 의사소통이라는 범주를 만든 것은 하버마스의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실천이성을 만들어낸 하버마스




민네이션, 칸트


칸트의 인식론을 엥겔스와 레닌은 잘못이해했다. 인식될 수 없지만 인식 안에 있는 것들은 칸트에서 실천이성의 범주에서 실천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것을 아예 인식 밖에 있는 것이여서 의식자체를 아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칸트를 이해했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의 영역 안에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자아가 스스로 실천하면서 알아보내는 사물을 positive라고 했고, 가만히 있어서 내게 들어와서 수동적으로 등장하는 사물을 nagative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인식은 자신의 의식의 자동적인 발현인 결국 의지를 통해서만 바깥으로 투사하게 되기 때문에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인식은 자신의 의식을 침범하여 수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의지의 개념이 아라 감각의 개념이다.


이것들을 판단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영역이고 판단력의 영역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인식론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인식불가능한 것들은 제거하려고 했다. 그거싱 바로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존재인 신과 영혼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들은 인식 바깥에 있는 것들을 인식 안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말하게 하는 것임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변증법의 원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논리


민네이션, 유물론 이해


유물론은 처음에는 작은 범위에서만 적용되었다. 처음에는 물질에서 즉 무생물에서만 적용되었다. 그 다음이 인간의 정신인 헤겔의 시각에서 유물론이 정신적으로만 등장하였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에 있어서는 생물과 물질의 모든 영역까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그 당시의 유물론의 견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체 영역까지 발전하지 못했고, 기계론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유물론을 발전시키려는 세속화된 혹은 속류적인 방법론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포이어 바흐의 사물과 존재 전체까지 영역을 발전시키고 거기에 변증법을 적용하여 모든 사물은 ‘변적법적 유물론’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물건, 식물, 동물, 인간은 모두 변증법적 유물론의 측면에서 발전하고 진화하고 진보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사 역시 진화하고 발전하는데 그것은 바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여기에 변증법을 가져왔다는 것은 헤겔이 정신에만 적용하려던 변증법을 육체와 사물 일반에도 적용했다는 의미에서 세계관 혹은 진리의 영역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유물과 관념의 우선순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1강 강의 내용은 아래 내용을 참조

https://brunch.co.kr/@minnation/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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