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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5. 2018

차이와 반복

질들레즈 차이와반복_철학아카데미

20180604_철학아카데미

질들뢰즈 ‘차이와 반복’_김상환

들뢰즈 철학의 근본직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들어가기


들레즈는 1924년에 태어나서 1994년에 자살했다.

들뢰즈는 저작으로 볼 때 크게 3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국가박사학위 논문으로 ‘차이와 반복’, ‘의미와 논리’이다. 두번째는 68혁명 이후 가타리를 만나서 사회적인 실천의 문제를 논의한 ‘안티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이다. 세번재는 ‘감각의 논리’와 ‘씨네마 1,2’이다. 이때는 감각의 경험과 이미지들의 향연이 시네마에 대해서 천착하던 시기이다.  


들뢰즈의 철학의 근본적인 틀은 ‘차이와 반복’에서 드러나고 그 외의 책들은 그 틀안에서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의미와 논리 같은 경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언어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오늘의 강의는 들뢰즈 철학의 근본직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차이와반복의 역자인 김상환 선생님의 강의


들뢰즈, 근본직관


뢰즈의 근본직관은 크게 3가지의 물음에 대한 답이다.  첫번째는 ‘사물의 직관’은 무엇인가? 사물의 직관은 트렌스포머 혹은 시뮬라크르이다. 두번재는 ‘세계의 직관’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들뢰즈에게 ‘알’이다. 세번째는 ‘사유의 직관’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이미지 없는 사유’이다. 


플라톤, 사물


철학이란 어쩌면 시대마다 ‘사물’에 대한 직관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각주일지도 모른다. 사물은 예전부터 있었고, 그것들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되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서양철학사는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으로 구분해서 생각했던 전통이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를 형상하고 연결하면 ‘사물의 내제한 본질’이라고 표현했고, 사물의 바깥을 구성하는 폼은 형태나 껍데기로 표현했다.형상과 질료의 결합이 ‘thing’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을 eidos라고 했고 이것이 이데아와 같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사물은 이러한 이데아를 모방해서 현실에 등장한 것이라서 형태는 갔지만 그 본질은 이데아가 아니다.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eidos 지만 현실로 나타나면 eidoron 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방식이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있다. 플라톤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원형에 가까울수록, 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을수록 더 좋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변화하는 사물은 그 자체로 ‘본질’과 멀어져서 모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플라톤에게서 시작된다


들뢰즈, 사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사물들의 본질에서 뻗어 나와서 현실에 등장하는 방식을 ‘시뮬라크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현상에서 더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더 본질적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현실에서 변형되는 것들은 자기동일성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풍부한 원형’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뢰즈는 ‘트렌스포머’인 현상계에서 최대한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가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생각을 한국의 성리학으로 가지고 오면 ‘기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세계


들뢰즈는 세계를 알에 표현한다. 그리고 알의 구조를 가지고 세계의 형성을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알의 핵심인 노른자는 the virtual, multitude, the transcendental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반면에 알의 껍찔로 갈 수록 the emprical, the actual이라고 보았다.


알의 껍질과 노른자 사이를 the intensive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강도’이다. 들뢰즈에게서 세계는 언제나 3가지 층위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the virtual - the intensive - the emprical’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중간에 the insentive가 강조되어서 ‘강도’의 문제를 다룬다면 ‘의미와 논리’에서는 알인 ‘the virtual을 ‘사건’이라는 것으로 다룬다.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강도가 깊어질때이고 발생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면 다시 ‘강도’에 의해서 세련되어지거나 정제되거나 한다.


들뢰즈 철학의 핵심


들뢰즈, 논리


헤겔의 논리를 계속 비판하던 들뢰지는 자신의 논리를 3단계로 만든다. ‘연결conection - 연접conjuction - 이접disjuction’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셔 경험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연결은 짝짓기라고 보고 연접은 공명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접은 ‘강요된 노동’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질료가 순화되면서 ‘경험’의 세계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논리의 핵심적인 설명이다.


연결의 다양한 형태, 네트워크 이론은 들뢰즈의 이론에 빚지고 있다.


질료적인 깊이에서 ‘현상’인 경험으로 나올 때 연결-연접-이접이 일어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경험 이후에는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언어들의 철학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미와 논리에서는 ‘깊이-표면-높이’로 되어 있어서 질료의 세계는 ‘연결-인접-이접’으로 ‘깊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위쪽이 경험세계이고 아래쪽이 질료의 세계 즉 감각의 세계이다. 생성적 경계가 바로 감각이 경험으로 보여지는 현실이다.



들뢰즈, 사유


들뢰즈에게 ‘사고’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에서 schizo-cogito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이미지 없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의 반대는 기존에 데카르트가 말하는 cogito와 ‘이미지 있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사유의 측면에서는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good sense나 commom sense를 코기토라고 하면서 이것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먼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명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이미 초월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에서부터 초월된 것들이 경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심리적인 강도와 이미지가 먼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념이 있고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먼저 있고 개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미지 없는 사유가 먼저이고, 이미지 있는 사유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경험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것들이 초월적인 것들을 만들고 그리고 다시 경험으로 반복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일 뿐.


칸트, 숭고


들뢰즈는 칸트의 논리를 반박하면서도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의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숭고란 크기가 크고 자신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근접에 있지않고 무엇이가 느껴지는 것들에 있다. 이러한 숭고의 개념이 바로 ‘사물’이 먼저 존재하고 ‘개념’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미학의 개념을 말하고 있는 ‘아름다운 숭고의 존재’들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들이 다시 인간에게 이미지로 작용하면서 논리를 만들어내고 언어를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르시스의 꿈’을 말하는 김상봉 교수가 서양철학의 기본적인 홀로주체성의 근원이 호메로스에서 부터 시작해서 ‘칸트의 숭고의 개념’까지 온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정신의 우위에서 사물의 우위로 넘어오는 서양사 전체는 사실 혼자서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고, 증명할수는 없는데 서양철학은 이미지나 감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지성의 힘을 빌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칸트나 들뢰즈나 베르그송도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이성 개념


들뢰즈, 차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강도’에서 모든 차이가 생긴다고 말한다.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차이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통해서 사물은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 차이가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사물은 새로운 사물을 생성해 낸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올려고 한다'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들로즈가이야기한 '알'과는 의미는 비슷하다




민네이션, 사물


왜 플라톤은 이데아이론을 만들었을까? 자신이 보는 사물에 대해서 왜 다른 원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플로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을 갖는 원형을 알고 싶었다. 사물의 원형과 멀어질도록 자기동일성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더 알수록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변화하는 것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원형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원형이라는 것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동일성들은 존재해야만 같은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미시적이면 세포단위가 되지만 거시적이면 생태계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 68혁명 이후 가타리와 함께 사회적인 고민으로 발전하는 들뢰즈를 볼 수 있다.


민네이션, 들뢰즈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의 이론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사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로서 근원을 설명한다는 힌트를 가지고 베르그송의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의 근원이 현실로 투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질의 근원을 들뢰즈는 알의 노른자라고 생각했고, 그 노른자에서 부터 현실로 나아오는 것을 스피노자의 형상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물의 변증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물의 노른자(원형)가 정이라면 사물의 껍질은 반이고 그 가운에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점액질인 사이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자.


 

들뢰즈를 이해하는 도식



민네이션, 이미지


모든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방식은 일단은 이미지이다. 이미지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분할되는가에 따라서 존재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지가 없는 사유는 그럼 무엇일까? 들뢰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전의 ‘깊이’에서 이미지가 없는 사유를 말한다. 이미지가 없는 사유는 다시 말하면 ‘강도’와 ‘심리’이다. 이것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를 ‘오감’으로 인지한 ‘인상’이다. 이러한 인식론은 베르그송에게서 왔다.


들뢰즈 이론과 베르그송의 이론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혹은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민네이션, 칼포퍼


칼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인상깊게 읽은 것은 몇년전 독서모임을 하면서였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칼포퍼가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역사주의의 교주는 플라톤이었고 그것을 근대에 부활시킨 사람은 헤겔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사용하고 있는 사고의 방식은 ‘정신주의적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고가 먼저 있고 그 사고가 현실의 모습을 띄는 것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로 한다면 개념으로 ‘알’이 있고 그 알이 사물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연주의적 정신주의’는 들뢰즈와 같이 물질의 구조를 정신으로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의 방식을 사고의 체계로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 강의에서처럼 ‘알’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사고의 구조’를 겹치게 하는 것이다.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정신의 구조 자체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지금이야 들뢰즈와 데카르트나 헤겔의 논리의 싸움이지만 이 싸움은 결국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싸움이고 교부철학의 핵심 논제였다.


칼포퍼는 이러한 차이 사이에서 ‘인간의 규범’과 ‘자연의 법칙’을 나누고 이것들의 연결관계에 대해서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위적인 과정이지 절대로 자연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그렇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비판적 합리주의’ 혹은 ‘반증가능성’이다. 두가지의 연결관계가 맞을려면 두가지다 자신의 본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본체를 하나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연결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박할 수 없고, 논증할 수 없고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된다고 포퍼는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를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열릭사회의 적들인 것이다.


민네이션, 유기체


내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유기체적 정치체제’이다.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체제의 근원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판단 기준이 ‘생명’이라는 것과 함께 존재하기 위한 ‘코나투스’로서 화합과 평화와 연결과 배치를 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기체라서 정신과 사물을 연결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인간의 삶은 물질이 우선되는 것 같지만 생각이 절대로 뒤쳐지지 않는다. 유기체는 언제나 변화하고 ‘인과모델’로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정치는 그런 의미에서 ‘유기체’의 가장 숭고한 활동이면서 시간의 놀이이다. 흘러가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의미를 발현함으로써 자신의 형체를 만들어가는 놀이 말이다.


유기체라는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서 접근하지 않으면 정치는 금색 그 근본인 생명을 잃게 된다. 여기서 생명은 zoe라는 생존이 아니라 bios라는 생명의 삶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무엇인지? 생명체는 무엇인지? 생명체들간의 관계는 무엇인지가 고민이 된다.


유기체적 정치체제의 큰 그림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심층철학에서의 ‘연결-연접-이접’과 함께 헤겔이 말하는 정신현상학에서의 ‘정-반-합’의 과정이 유기체 안에서는 복합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들뢰즈의 말처럼 계속해서 정신도, 물질도 반복해서 자신의 이전시간의 모습을, 개념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보면 정치학에서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인과론’ 혹은 ‘input-output’ 모델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자유주의 / 현실주의 / 마르크스주의라는 하나로 정리되지 않고 어찌보면 웬트의 ‘구성주의’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시각각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생성하면서 생명을 이끌어가는 ‘유기체적 정치체제’에 따라서 법과 사회와 운동이 변화되어가는 것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제를 바꾸었고 원리는 시스템이론이다. 시스템을 시시각각 만들어가면서 생명은 자신의 생각과 존재를 유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스템이론에서는 정지해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들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생명을 유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시스템이론으로 보면 니클라우스 루우만의 ‘일반체계이론’을 기반으로 1차원에서 5차원까지의 시간변화에 따른 상태의 변화와 인식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론에 따른 원리가 법으로 발전하면 법사회학이 되기도 한다. 법과 사회가 서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면서 계속 변화하는 것 말이다.


한 사회가 어떤 요인에 의해서 변화하는가를 밝혀내면 그 요인이 어떤 변화를 거치는가에 따라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유기체적 정치체제는 바로 이러한 요인을 분석하고 만들어내고 종료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향성은 당연히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생존을 영위한다고 하면 그것은 ‘두려움’에 기바하는 것이지만 ‘생명’이라고 한다면 복잡해진다. 이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유기체적 정치체제’는 ‘유기체론’으로 전락하면서 독재로 빠지게 되거나 우생학 혹은 민족주의로 축소되어 버린다.


 

나름 철학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정리하고 있는 사상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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