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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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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04. 2018

미래와 진보

진보가 나아가야할 길_비그포르스에게서.


비그포르스, 베른슈타인


비그포르스는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일까?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기초를 객관적 과학이 아닌 윤리적 이상에서 찾고 그러한 이상을 온 사회가 공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비그포르스도 베른슈타인과 같은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비르포스스의 생각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윤리적 이상의 차원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윤리적 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상을 사회 전체에 설득시키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내 놓지 않는다. 윤리적 이상이라는 것이 ‘서로 돕고 사는 정의 사회 구현’ 운운하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김빠진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구체적 내용을 담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의 차원으로 확장되지 못한다.

1909년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노동자 연합과 사용자 연합의 대립에서 노동측의 비참한 패배를 보면서 ‘사회주의와 도덕’이라는 책을 낸다. 여기에서는 ‘린드하겐’이 이야기한 베른슈타인류의 계급을 폐기하고 이성과 정의감에 호소하는 수정주의 입장을 강하게 반대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들이며, 이 개인들의 도덕적, 윤리적 판단 기준은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각자의 물질적, 계급적 이익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보편적 도덕과 이성이 본디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호나상이다. 비그포르스는 사회민주주의의 운동의 목표가 온 사회가 사회민주주의의 윤리적 이상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출발점은 계급 투쟁이라는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내 걸어야 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 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반아들이도록 만드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회민주주의 운동이다. 이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 스스로 자본가들보다 더 높고 더 이상적인 도덕을 사회 성원 모두에게 내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비그포르스의 주장이었다.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

비그포스는 스웨덴 사민당이 온 사회 성원들 앞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그럴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유토피아 일반까지 부정하고,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운동뿐’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비그포르스가 보기에 진정한 사민당의 운동은 노동자와 근로 대중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마음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 성원의 동의를 얻은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 운동과 사회민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혀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현가능하면서도 일관된 모습을 갖춘 하나의 총체적 사회가 제시된 위에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침으로서 배치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 유토피아를 제시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잠정적 유토피아라도 내거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임무라는 것이다.


_홍기빈_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유토피아 




사회가 변화되고 있다. 유물론적 방식으로 치자면 2차산업혁명을 지나서 탈공업화의 기간을 지났다. 정보지식이 중요시되는 3차 산업혁명도 지나가는 영역과 국가들이 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은 어떤 희망과 이미지, 변화를 만들어낼 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운동하고 있고 그 운동은 어디로든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동flow와 체계stock 중에서 어느것 하나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오직 시간 위의 존재들은 항상 새로운 움직임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어떤 흐름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람의 윤리적인 가치판단을 가지고 그 흐름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라는 고민을 해야 한다. 


비그포르스와 그와 함께한 이들에게는 마르크스가 놓쳐버린 혹은 종속변수로 놓아둔 이념에 대해서 다시 고민한다. 그것은 젊은시절까지 영향을 미친 이상주의적 인본주의의 뤼드베리의 영향이기도 하겠다. 인간의 윤리적인 정신은 '국가의 집'에서 한손과 만나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는 토대구조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변화도 있지 않고 공상적 유토피아적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 사회공학'의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게 비그포르스, 칼레뷔, 뮈르달, 한손까지 이르게 되는 1930년 변화의 주역들의 생각이었다. 


비그포르스와 함께한 사민당의 정치인들




나는 여러번 비그포르스를 읽는다. 언제나 도전을 받는다. 나의 안주하는 세계에서 나갈것인가? 이런한. 그래서 항상 고민이다. 그럼 어떻게 한국의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낼까?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인간은 윤리적인 이상과 점진적인 토대변혁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개량주의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념이나 진영논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정말로 사람들이 잘 살고,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주어진 자원과 시간, 환경을 제대로 개발시키고 효과적으로 공유하기를 원한다. 성경과 같이 매번 새로운 이야기처럼 영감을 주는 이 책을 통해서 오늘도 '잠정적 유토피아와 한국의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시작인 건 알겠는데, 아직 너무 멀어서 아무것도 안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개발독제, IMF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비그포르스 이전에 칼폴라니까지 가야 한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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