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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29. 2018

틀과 툴

틀에 맞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나는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사물이 곧이 곧대로 보이지 않았다. 상징으로 ‘단어’들 안에 숨어 있는 수 많은 의미와 역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은 길을 가다가 한 참을 되돌아보고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전봇대에 시선이 어리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단어는 안에는 텅 비어 있고 구멍이 숭숭나 있어서 벌집속에 벌들이 드나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의미들이 벌집같은 단어들을 헤집고 나가면 더 이상 그 단어는 나에게 상징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의미의 상징에 내가 스스로 만든 상징을 넣어 놓고는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의 약속이자 날것의 규칙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뒤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상징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고 스스로 붙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언어 체계를 이루고 하나의 집을 만들어서 다른 단어들을 초대 했다. 내면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날에는 마치 웅장한 성에 수 많은 인파들이 가면을 쓰고 들어서는 무도회장처럼 온갖 단어들이 휘날리는 춤을 추었다. 밤새도록 추고 또 추고 그러면서 나는 혼자서 방하늘에 밤하늘의 성좌들을 그리면서 잠들곤 했다.


어느순간, 나는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이것’이라고 말하면 그 때부터는 수만송이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의미의 개현이 일어나서는 그들이 만든 틀의 연결고리들이 보이지 않은 만큼 꽃들이 만발했다. 그래서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연결해 놓은 상징체계들을 따라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8살이 되어서도 한글을 떼지 못했고, 한글이 가지고 있는 초성, 중성, 종성들이 각기 연결되는 방식도 의아해 하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겨우 내가 그린 그림을 단어로 인정을 해 주었는데, 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삼라만상을 표현하지 못한 채로, 비밀로 간직한채로 받아쓰기에서 겨우 반타작을 했더랬다. 지금이야 그 순간을 표현한 상징들, 언어들, 단어들을 조금이나마 통제할 수 있기에 이렇게라도 언어의 형체를 빌리고 있긴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5월의 송화가루처럼 날리던 내면이라서 다른이에게 이 느낌, 이 감각, 이 생각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다만 아주 가끔식 기호들이 상징이 되기 전에 그 기호들을 잡아내서 도화지에 그리고 나면 미술선생님은 이상한 내 그림을 보고서는 ‘너는 먼거 새로운 것을 보고 있구나?!’라고 칭찬인듯한 판단을 하곤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움을 더욱더 숨기고서는 또다시 눈치를 보면서 남들이 하는 만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녁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면 방하늘에 수 많은 기호들이 날아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서로 만나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곤 했다. 너무 졸린 나머지 ‘얘들아 내일 하면 어떨까?’라고 하면서 잠들었던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더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 왔는데, 그것은 ‘구구단’이라는 녀석이었다. 1부터 10까지 세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는데 구구단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곱셈을 몇백개씩 만들어놓고 내게 요구했다. 9와 9의 연결은 81이라고. 그러고 나서는 나는 한참을 하나하나 돌이켜보면서 왜 그런거지?라는 고민을 하고서는 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는 ‘아 그렇구나 그럼 이런 때는 81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구나!’라고 이야기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넘어가도록 나는 구구단을 못 외웠고 어머니는 부진한 아들의 지능이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노심초사 하셨다. 물론 나는 또 숫자들의 배열을 외워서 구구단을 외우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더하기와 빼기는 본능적이고, 곱하기와 나누기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었기에 내가 그렇게 '구구단'을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학교생활에서 '숫자'와 연관된 나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5학년때는 반장을 했는데 반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책을 세고 있었는데 항상 30번 이상을 넘어가면 더 이상 셀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세었던 책들의 이미지가 계속 남아 있어서 30번 이상이 되면 이미지들을 저장할 공간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매번 책을 세는데 애를 먹었다. 혼자만의 비밀이기는 하다. 




세상이 만든 틀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때이다. 하나의 기준이나 관점은 사실 사회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제도적으로 정해진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부터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규칙도 누군가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서 어떻게 문명화가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궁전의 에티켓이 일반적인 문화적 현상으로 등장하는지도 보게 되었다. 구별짓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간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배우게되고, 정치적인 제도가 역사적 분기점에서 갈리게 되면 그것이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도 배웠다. 8세기말부터 기독교의 중세화로 인한 이슬람학문이 발전하면서 숫자에 대한 깊은 철학자들이 그리스철학과 융합되었다는 것도 배우고 그렇게 해서 15세기를 넘어서면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문주의가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탄생하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나서 내가 왜 이세상이 만든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틀을 유지하고 영위하기 위해서 만들어가야할 툴에 대해서도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나에게 맞는 툴을 만들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던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사실은 모든 사람이 누군가 만들어준 틀에 맞게 살아가라는 것이 제국주의적이지 않은가?한다. 




과거의 문화로 현재의 문화를 해석하고 그것이 진리인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한다.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유지하는 틀과 툴은 대부분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측면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바뀌어야 하지만 '변화'라는 것은 빠르지가 않다. 그래서 이전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낀 사람들은 언제나 압사를 당하거나 가랑이가 찢어지거나 했다. 나는 그래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새로운 틀과 툴을 만들어보고 싶다. 그것이 매우 긴 작업이면서 애매한 부분인 것은 알지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비동시성을 동시성의 작업에서 다시 해석해서 새로운 융합과 새로운 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마도 남은 과업이지 않을까 한다. 아웃라이어로 살아온, 물론 내면에서만 그런적이 많았고 대부분은 인사이더처럼 행동했지만, 나의 인생에서 새로운 변환점과 미션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다. 이길을 가다가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유로 걸어가는 즐거운 걸음이겠고 항상 돈키호테 같은 모험이겠지만 언제나 세기와 세기에 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발견과 발명의 기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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