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14년 차가 들려주는 아주 개인적인 성장이야기
세 자매의 큰언니이자, K장녀로 자라던 나는, 2007년 만 15세에 나이로 미국 유학에 처음 올랐는데,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 사이에는 서사가 있었다.
서울, 경기도, 다시 서울, 그리고 마침내 경상북도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들과의 연락이 모두 끊어졌고, 초등학교 5학년쯤 이사 온 곳에서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집은 구미에서 30분 정도 차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원주택이었는데 개발이 많이 되지 않았던 곳이라, 자동차도 흙길로 다녀야 하는 소위 말하는 정말 시골 중 시골, 산 중턱 맑은 개울 앞에 위치해 있었다.
어렸던 마음에 건물이 높던 도심에서 살다가, 가로수도 없어 해가지면 칠흑같이 어두운, 근처 슈퍼도 걸어서 왕복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산에 살아야 한다니, 속상했던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다른 K장녀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경제적으로 생활이 힘들었던 우리 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시던 부모님을 알았기에, 공기가 맑아 좋다, 동물이 많아 좋다, 집 앞 개울이 좋다 이런 말들을 하곤 했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공기 좋고 물 맑은 산에 살며 자연과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서른 살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고구마 옥수수 하나를 사다가도 그 당시 순수했던 추억이 생각나면 삶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초등학교 5학년 그리고, 학기가 시작한 후에 전학 온 나는 당연하게도 친구들을 사귀는 게 힘들었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참 재미있게도 표준어를 쓰는 내 말투 때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서울말을 쓰는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보면 재수 없다고 느껴졌던 것 같은데, 국어시간 선생님께서 서울말로 글을 읽어보라며 다른 친구들은 조용히 시키고 글을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그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선생님들께서는 좋은 취지로 시키셨겠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더 재수 없어 보이겠구나 하고 체념하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사투리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경상도에서 서울말이란, 여행객, 잠시 방문한 손님,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그 시절 나는 같은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화와 언어 사이에서 참 많이 갈등하고 힘들어하곤 했다. 질풍노도의 시절, 용돈도 얼마 없던 내게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도서관과 책이었는데, 학교가 끝나거나 주말 혹은 방학기간 동안,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 하루를 보내곤 했다.
한국 고전 문학에서 시작해서 해외 문학작품을 읽다 보니, 내가 한국어로 고전 문학을 읽고 느끼는 것처럼, 번역이 아닌 영어 원문의 고전 문학들도 읽고 한국어처럼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그 당시 학교에서 나는 영어 공부와 국어 공부를 가장 좋아했는데, 그래도 영어를 마음대로 읽고 대화하고 능통하게 사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 다른 사교육은 아니더라도, 부모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꾸준히 나에게 영어공부를 시켜주셨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은 디즈니 영화들을 영어로 시청하던 것과, 영어 동화책들을 외우는 것이었다.
당시 영어학원을 운영하시던 근처 교회 목사님께서는 주말마다 영어 성경책으로 영어를 더 알려주셨고, 영영사전을 들고 다니며 단어를 외우기도 했고, 학교 영어 선생님과 함께 해리포터 소설을 영어로 읽는 동아리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이나 과외를 받을 환경이 아니었지만,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했기에 영어책 읽는 것에 욕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나는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기도, 억압된 시대를 거친 영혼들에 분노하기도 했고, 원할 땐 해외여행을 가기도, 우주여행을 가기도 했다. 울고 싶을 땐 슬픈 소설들을 읽으며 울었고, 웃고 싶을 땐 가벼운 연애소설이나 무협소설들을 읽으며 웃었다. 더운 여름날엔 일부러 도서관에서 공포소설들을 읽곤 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가장 좋아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영어 공부를 계속한다고, 과연 나의 영어가 얼마나 늘 것이며, 이것이 내 삶의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내 삶의 가치가 있는 일일까? 영어로 책은 읽고 외울 수 있다지만, 학교 영어 성적은 꾸준히 좋다지만, 나는 여전히 영어 대화에 능통하지 못했고, 내가 원하는 부분을 충당하려면 사실 공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사실 이렇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가야 하는데, 이렇게 영어 공부만으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어린 나이에 부모님께 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영어를 공부하러 미국유학을 가고 싶다고.
마침 2000년대는 미국 조기유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고,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알려져 유학에 대한 인기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이 먼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간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반대하셨고, 어머니는 이것이 본인 딸의 삶에 어쩌면 단 한 번뿐인 중요한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부모님은 항상 부모님을 이해하려 하던 딸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다고 조르는 것에 안된다고 말씀을 못하셨던 것 같다.
말씀은 안 하셔도 질풍노도 시기를 겪었던 나를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미국으로 유학 가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내 열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갔고, 미국 유학의 성공 사례들은 더욱 나를 부채질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영어를 잘했으니까, 난 이렇게 열정이 많은데 당연히 버틸 수 있다고, 꼭 성공할 수 있다고, 보내만 달라고. 부모님을 조르던 앞으로 겪을 고통과 외로움은 알 수 없었던...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무서울 것 없던 열다섯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