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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Feb 25. 2024

진단명은 번아웃.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고요?


똑똑똑. 상담실에 내담자가 왔다.      

"선생님, 저 개학할 때가 되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어떤 부분 때문일까요?"

"그 분위기. 열심히 해야 하는 그 분위기 있잖아요. 그 경쟁적인 것도 싫고.. 걱정되는 건, 지난 학기도 겨우 버텼는데 이번 학기에는 어떻게 버티죠? “     


똑똑똑.      

“선생님, 저 불안하고 긴장돼요.”

“무슨 일 있었을까요?”

“뭔가 해 놓은 것은 없는데, 뭘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요.”     


3월.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시작이 두렵고 힘들다. 개학을 앞둔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가 다가오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사업 운영 기간이 3월로 맞춰진 기관 근무자들 역시 마음이 조급해진다. 2월까지 지난해 결과 보고를 부랴부랴 마감했는데, 3월부터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해야 한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것이 버겁다.          

      

문득,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며칠 전, 남편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 나 요즘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시간만 멍하게 보내고 있는 기분이야." 할 일은 쌓여 있는데, 최대한 미루고 있다. 일도 재미없고,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다. 없는 에너지를 끌어모아 겨우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당신의 진단명은 번 아웃."     


번아웃 burnout       

∙명사 :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이다. 한자어로 소진(燒盡)이라고 한다.

                                                              -네이버 사전-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신 생각해 봐. 당신은 열심히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야 하는 사람인데, 그게 벌써 몇 년째야."     

꼬맹이가 18개월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꼬맹이가 9살이 되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겠다고 평생교육원에서 심리학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원 입시 공부를 했고, 이후 합격해서는 일을 빨리 시작하고 싶었기에 동기들보다 빠르게 수련을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수련을 같이 했다. 논문 쓰고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안 되자, 자원봉사로 상담 일을 이어갔다. 무급으로 일을 하지만, 상담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받아야 했기에 내 돈을 써 가며 상담 잘하신다는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교육을 받았다. 나는 돈을 쓰며 배우고, 상담은 돈을 받지 않고 했다. 그나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기쁨에 출, 퇴근 시간만 2시간 반이었지만, 그래도 출근하는 시간이 좋았다. 상담 쪽에서 알아주는 대학원을 나왔고, 상담사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 학생센터에서 일을 했다. 내 나이에 대학에서 일을 한다는 건 드문 경우였기에 그 뿌듯함과 자부심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2년 정도의 수련 생활이 끝날 무렵, 토가 나올 정도로 준비해야 하는 서류 시험도 통과하고, 기출 자료 하나 없는 (물론 떠돌아다니는 불확실한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필기시험도 붙고, 눈알 하나 잘못 굴리면 부정행위로 간주되는 면접시험까지 겨우 통과해서 자격증을 땄다.       


두둥. 드디어 나도 현장에 데뷔하는 건가. 오은영 선생님은 30분에 얼마를 번다는데~ (실제로 친정엄마, 시아버지, 형님, 내 친구들, 남편 친구들 등 많은 이들이 내 수입을 궁금해하고, 그들이 더 행복해한다.)      

앉아서 듣기만 하고 그 정도 벌면 완전 좋은 직업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입을 다 꼬매버리고 싶다.)     

예상했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담실 밖에서의 상담사 모습을 사람들은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상담사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지는 않는다. (돈 때문이었으면, 분명 이 나라에 상담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다룰 일이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다는 것 때문이다.) 결국 인풋 대비 아웃풋의 문제인데, 나 역시 알고 시작했지만 지치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풋은 '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공부와 반복되는 훈련 그리고 부르는 게 값인 교육비. 이런 과정을 10년? 정도 하면 그때서야 아주 조금 앞이 보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마흔 넘어 새롭게 시작한 공부였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미친 듯이 버텨왔다. 따뜻한 상담사이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열심히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열심히'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다. 단순히 결과의 문제는 아니다. 과정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시작하기가 두려운 거다.      


그래서 나는 번아웃. 그리고 너도 번아웃.

공부 열심히 한다고 천재 되는 것도 아니고, 일 열심히 한다고 회사 내 것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태울 때까지 하다니.     



  

“선생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쉬셔야죠. 내가 힘들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쉬셔야 합니다.”

“쉴 수가 없는 상황인데요.”

“아, 그렇긴 하죠.” (맞아요. 저도 못 쉬어요. 저 코로나로 한 주 상담 쉬었다가, 후폭풍 장난 아니었어요. 별의별소리를 다 들었죠. 저 때문에 망했고, 저 때문에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고. 죄인 됐어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사람마다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은 다 다르니, 누구님에게 맞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 볼까요?”     



   

출근하려고 나서는데, 남편이 갑자기 부른다. 그리고 꼬옥 안아준다.

“이렇게 하면 힘이 난데.” (남편은 요즘 <감정 유산> 책을 읽고 실천 중이다. 저자님, 감사합니다.)

“고마워, 여보”

“퇴근하고 오면 또 안아줄게.”

“응”     


나는 지금 충전 중이다.

그동안 에너지 소진이 가장 많았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책임감이 느껴져 잘 마무리하고 나오고 싶었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나의 에너지를 좋은 곳에 쓰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세상에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러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막 좋아진다. 재미있는 일을 할 것을 생각하니 신난다.     

내가 에너지를 채워가는데, 남편과 친구들의 도움이 있듯이, 혼자 안 될 때는 누군가에게 말을 해 보자. 의지해도 괜찮다.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방법을 같이 고민하다 보면, 3월이던 7월이던 그 새로움이 주는 두려움은 금방 날아간다. 휘리릭.


     

저, 그리고 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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