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민희 Oct 11. 2018

#4. 장수보쌈

예측 가능한 담음새,  예측 불가능한 맛,  환상의 조합.

*겨울 막바지에 제작한 독립 출판물 '을지로 야옹이'를 매주 브런치에 소개합니다


#4. 장수보쌈



예측 가능한 담음새, 
예측 불가능한 맛, 
환상의 조합.




물에 빠진 고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 

고기는 역시 바싹 구워서 반짝이는 기름이 좌르르 흘러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흑석동에서 인생 보쌈을 만났다. 
구운 고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촉촉함이 있었다. 
근처에 살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갔고, 분당으로 이사 갔을 때나 강남에 있는 회사에 다닐 때도 일부러 찾아갔다. 


그러나 종로에서 회사를 다니는 지금, 흑석동은 너무 먼 곳이 되었다. 

한강 위쪽에서도 맛있는 보쌈을 먹고 싶어서 수소문해 찾은 게 을지로 ‘장수보쌈’이다.



‘장수보쌈’은 ‘원식당’, ‘원보쌈’으로 불리기도 한다.
간판에는 장수보쌈, 선간판에는 원식당이라고 적혀 있다.

주인 할머니가 보쌈계의 애플인 ‘원할머니 보쌈’의 초기 멤버라는 소문이 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감히 그런 질문을 하면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먹어.’라고 할 것 같은 포스의 할머니가 자리를 안내해주었기 때문에 그냥 궁금하기로 했다.


벽지에는 주인 할머니의 귀여운 취향이 묻어 있다.


“보쌈 2인분이랑, 막걸리 뭐 있어요?”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종족인, 맥주 반 잔에도 얼굴이 벌게지는 남자친구와 밥을 먹을 때는 술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막걸리를 꼭 먹고 싶다며 선전포고했다. 
‘장수보쌈’은 간판부터 인테리어까지, 막걸리를 주문하지 않을 수 없는 훌륭한 비주얼을 가졌기 때문이다.



주인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투닥대는 모습을 엿보며 쭈그러진 양은 막걸릿잔을 비우고 있으니 삶은 고기가 등장했다. 


숭덩숭덩 썰어 내키는 대로 쌓아 놓은 삶은 고기와 

빨간색 채도만 한참 높인 듯한 배추김치, 
편마늘과 매운 고추, 
얘들을 찍어 먹을 (손수 만든 것 같은)고추장, 
100마리는 담긴 것 같은 새우젓, 
밑반찬 조금이 나왔다. 

전부 이 가게와 너무나도 어울리는 담음새였다.


보통의 보쌈집은 기름과 살코기가 예쁘게 층을 이룬 고기를 가지런히 썰어주는데, 
여긴 정말 숭덩숭덩 외에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고기가 나왔다. 

일부러 퍽퍽하게 생긴 살코기를 한 점 집어 입으로 넣었다. 

일단 누린내가 안 났다. 
식감은 예상 밖으로 무척 야들야들했다. 

콧구멍이 커졌고, 막걸릿잔에 절로 손이 갔다.


겨울에 다시 갔을 때는 김치에서 굴  냄새가 났다. 해산물 헤이러인 나는 따뜻할 때만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 양념 없는 고기 맛을 봤으니 이제 짝꿍인 김치 맛을 볼 차례가 왔다. 
매운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새빨간 김치는 처음이었다. 
혓바닥 밑으로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입 속 가득 밀어 넣었는데 의외의 맛이 났다. 
너무 달았다. 

단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바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신기하게도 착 감겼다. 
과하게 달다고 생각했던 김치에서 시원한 맛까지 느껴졌다. 



보쌈의 핵심은 

잡내 없는 고기도 아니고, 
잘 익은 김치도 아닌, 
고기와 김치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보쌈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늘 고기가 맛있으면 김치가 평범했고, 
김치가 꿀맛이면 고기에서 누린내가 났다. 
흑석동의 보쌈집을 내 집처럼 드나든 이유도 찰떡 조합을 맛봤기 때문이 아닐까. 


온갖 콧소리를 내면서 먹는데 식탁 위 김치만큼 벌게진 남자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힘들면 안 마셔도 돼! 내가 다 마실래”

“아니야 그래도 같이 마셔야지~”

늘 이런 식이다. 


술도 잘 못 하는 주제에 나 혼자 마시게 두지 않고 끝까지 같이 마신다. 

왜 그런지 물으면 그냥이란다. 
난 혼자 마셔도 상관 없는데.


하루는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이거 완전 ‘데이트 폭력’이란다. 
반대로 생각해봤다. 
비린내를 못 참는 나에게 끼니마다 미역이 들어간 오이 냉국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세 번 만날 때 두 번 정도는 술 없이 술안주를 먹는 고역을 견뎠고,

남자친구는 세 번 만날 때 한 번 정도는 알코올을 섭취해 주량이 늘었다. 


더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독일까지 가는 나, 
매일 아침 원두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남자친구. 


우리도 장수보쌈의 고기랑 김치 같은 조합인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내 보조개도 쑥스러운지 볼 속으로 포옥 숨어버렸다.



TMI 1. 
이런 우리가 웃긴지 계산할 때 주인 할머니가 장난을 거셨는데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안 난다.


TMI 2. 
장수보쌈은 식당이 오래오래 잘 되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란다. 
장수보쌈 같은 우리도 장수를 빌어 본다.


TMI 3. 
보쌈에 눈을 뜨게 해준 흑석동 보쌈집은 
중앙대병원 사거리 ‘할미가’이다. 고기와 무 무침이 꿀조합이다.




장수보쌈
(원식당, 원보쌈)

을지로5가 사거리와  충무로5가 사거리의
중간 지점에 있는 버스정류장 앞

매거진의 이전글 #3. 경상도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