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책솔이로 신청했던 책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왔다. 첫째 숙제 때문에 필요한 책이라 급하게 도서관에 들렀다. 칼퇴를 못하고 오늘도 늦은 퇴근에다 저녁준비도 해야 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책솔이책만 빌려가기 너무 아쉬워 데스크 바로 옆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 코너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그림책과 그래픽노블 각 1권씩을 집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땐 긴 호흡의 책은 잘 안 잡힌다. 그렇다고 책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할 순 없으니 짧은 시간을 들여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택한 것이다.
때마침 내겐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첫째가 학원 가고 둘째가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의 시간! 거기다 오늘까지 소진해야 할 커피쿠폰도 있었다. 밀려있는 집안일도 있고 카페까지 걸어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포기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학기 초에 너무 바빠 마트 기프티콘 3만 원어치를 날린 후였다. 갑자기 이건 꼭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 관련해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아까 빌린 그래픽 노블만 챙겼다.
<숨을 참는 아이>
'벨기에 문학상 만화 부분 최고작품상',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그래픽노블 최종후보', '브뤼셀 국제만화축제 그래픽노블 최고작품상', '프랑스 올해 최고 만화책상 최종후보'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책이었다.
이야기는 1983년, 불어, 독일어, 네덜란드어의 3개 국어를 사용하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국왕이 있는 벨기에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범한 아이라고 소개된 주인공 열한 살 루이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숨어 다니며 자기만의 기준에 맞춘 점수를 정해 자기의 행동을 통제한다. 횡단보도에서 하얀 선을 밟지 않고 건너면 60점, 어아 생각을 안 하면 200점, 검은 자동차를 앞지르면 500점 등 말이다.
또 긴장하면 코를 1, 2, 3번 두드리는 걸 반복하고 말을 더듬는다. 루이는 생각이 많고 혼잣말도 많이 한다. 그런 루이에게 조상들은 자꾸 나타나 루이를 비난하거나 루이가 두려워할만한 이야기를 꺼낸다. 가장 친한 친구는 말을 탄 벨기에 국왕인 '필리프'인데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루이는 자기 방에 수많은 카드를 넣어두고 그 안의 것들을 공부한다.
루이는 학교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는, 개인적으론 최근 들어 매년 만나는 강박과 자폐 성향을 가진 학생들과 많이 닮아있다. 그 아이들은 자기만의 기준에서 생각하며 행동하다 보니 통제력을 상실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일이 왕왕 있다. 특히 게임활동에서 지거나 복불복 상황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울고 친구들을 원망하다 결국 자책하곤 한다. 혼잣말도 곧잘 하고 간혹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동작도 하기 때문에 많이 달라 보이지만 기본이상 학습도 잘 따라오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는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이런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땐 그 독특한 행동들이 이해가 안 돼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아이가 루이처럼 자기 방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 자체로 아이를 이해하게 됐다. 아이를 제대로 알게 되니 함께 지내는 게 편해졌다. 아이도 점점 내게 마음을 열어갔고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만화작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한 작가는 서막을 시작으로 막이 닫히기까지 총 7막의 이야기를 구성했다.
1막이 시작되기 전 내레이션에서 "무대 위에 권총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총을 쏜다"라는 체호프의 말이 등장하고 뒤에도 반복된다. 이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 복선인 것처럼 '진드기' , '바나나 껍질' 등과 같은 작은 것들이 반복되던 루이의 조용한 삶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
잘하고 싶은 의지와 강박, 그 안에서 보이는 루이의 반복되는 행동, 그리고 받으면 숨소리만 들리는 전화벨과 하트가 그려진 엄마의 유골함, ''잠깐만 기다려, 곧 갈게'라는 말만 하고 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빠, 가끔 그런 아빠를 대신하는 외삼촌과 선생님! 이야기는 점점 많은 물음표를 만들며 몰입감을 높인다.
그러다 빵! 엄청난 반전을 맞이한다. 아이의 강박적 불안한 마음에도 치유가 일어난다. 루이는 이야기 속 주인공답게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스포가 되니 더는 못 쓰겠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 자체가 커다란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 책!
시기적절하게 내게 온 책이다. 올해도 루이와 같은 친구와 함께 하게 됐다. 나의 시선 강탈자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매력적인 친구다. 고집스러운 행동으로 자기만의 상상에 따른 말과 행동으로 당황스럽게 만드는 순간을 매일 선물하지만, 난 올해도 이 아이와 잘 지낼 것 같다. 사랑스러운 루이가 조금씩 스스로 치유를 향해 나아가듯 더디지만 어울리는 법을 조금씩 서로 배워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