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용호 중앙일보 정치부 부데스크의 글(2016년 12월 26일, 오피니언 32쪽)을 일부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연애와 본때 보이기
‘본때’란 말은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의미한다. ‘본때를 보이다’는 건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따끔한 맛을 보여준단 뜻이다. 나는 이 시국에 ‘본때를 보이는’ 것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촛불 민심이 그렇다. 시청 앞 시내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벌이며 대통령 퇴진과 탄핵을 외쳤던 사람들, 우리 국민들은 기어코 잠정적 승리를 따냈다.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탄핵소추안을 78%의 높은 찬성률로 통과시키도록 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용호의 생각과 같은데,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기어이 본때를 보여줘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렇다. (신용호의 말처럼) 본때의 힘으로만 진전이 이뤄지는 나라여선 곤란하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미리 막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겪고 있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은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일 아닌가. 본때를 보일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도 본때의 맛을 잘 안다. 이실직고하겠다. 눈치 없이 크리스마스인데 애인에게 일 때문에 늦게 간다고 말했다. 결과는? 따가운 눈총과 말들을 받아내야 했다. 전화를 통 안 받는 탓에 내내 마음 졸였다. 꽃과 케이크도 무용지물이었다. 아, 나는 본때를 보이기 전에 미리 알고 대비하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나. 이러려고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나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한 번 본때의 맛을 본 사람은 안다. 고생은 차치하고라도 감정과 시간 소모 때문에 소중한 하루, 많게는 며칠을 대가로 치러야만 한다. 연애에서도 원리는 같았다. 오래 연애를 했다고, 결혼을 약속했다고 긴장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내게는 애인이 좋아할만한 방식으로 애인을 사랑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고 결코 태만해선 안 되었다. 어제의 본때는 일종의 직무유기에 대한 처벌이었던 셈이다.
본때 보이기는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횟수가 많아지게 되면 상호 간 치러야 하는 유무형의 비용이 너무 크다. 그러나 본때 보이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정과 연애 운영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명백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때의 맛을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실랑이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내 애인도 마찬가지일거다. 또, 국민들도 마찬가지일거다. 이 사태를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으실 거니까.
나는 앞으로 더 잘할 거다. 내 애인을 더 사랑해 줄 거다. 본때의 맛을 다시 보지 않을 거다. 나아가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다음 대통령만큼은 본때를 보일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본때는 보이는 사람이나 맛을 보는 사람이나 결코 유쾌한 기억일 수 없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