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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지금Minow Feb 01. 2024

가족이 되었다 떠났다.



내 일과 일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지 2 주가 되었다. 나의 발목 상태로는 아직 비행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한 달 동안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받을 병원을 찾고, 올해 꼭 해보자던 필라테스도 등록을 했다. 비행으로 복귀하기 위한 나의 일상은 이어졌다.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야 거제도 새언니… 부고 문자 받았어.’


믿기지 않았다. 새언니는 이제 40대 중반인데, 앓고 있던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잠시 메시지를 읽고 내 주변의 소리들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가족들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인이 정확하지 않아 부검을 한다고 했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내 일상의 기운도 이 소식과 함께 빠져나갔다.

그만큼 나는 새언니가 우리 가족이 되었을 때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제일 큰집에는 오빠가 다섯이다. 그 중에도 셋째, 넷째 오빠들이 나는 참 좋았다. 잘 챙겨주고, 유머러스하고 나도 나중에 결혼을 하면 이 오빠들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내 배우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가정환경에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보고 자라는 것, 자라온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고 이야기들 한다. 내가 본 우리 큰집의 환경은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환경을 반면교사 삼아서 잘 자라온 사람들이 우리 오빠들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사촌들과 우리 형제들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일찍 결혼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셨던 큰아버지 두 분도 오빠들의 결혼을 한다고 새언니들을 데리고 오면 엄청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교사 출신이었던 새언니가 지리산자락에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하니 동네방네 예비 며느리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이제 스무살 지난 내가 본 언니의 인상은 참 푸근하고 안정적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좋은 점이 가득 보였는데, 삶의 여정을 먼저 밟아가신 어른들의 눈에는 그 예쁜 모습이 더 크게 보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때만 해도 온 가족이 모이면 큰집에 있는 수저, 그릇들은 총 출동을 하는 날이었다. 집성촌인 산자락 마을에 모든 사람들이 모이면 촌수에, 이름까지 기억하기 힘들었을 건데 새언니는 그래도 싱글벙글이었다.


사촌오빠는 새언니와 결혼한 후 훨씬 더 얼굴이 좋아졌다. 오빠와 새언니를 반반 닮은 예쁜 조카도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 까지 수도권에서 살아서 말투도 나긋나긋했다. 나는 해외에 취업을 하고 자연스럽게 볼 기회가 적었지만, 내 여동생과 새언니가 나의 존재를 일러준 덕분에 나는 고모라는 이름으로 조카의 세상속에 들어가 있었다.



수도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새언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촌오빠와 함께 팬션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코로나로 한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동안,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에 나는 사촌오빠네 팬션에 놀러갔다. 구석구석 조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팬션 뒤에는 가족들이 지내는 집도 한 채 지어져있었다. 동네에 사시는 분들에 비해서 젊은 나이기도 했고, 어린 조카가 동네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쯤 우리 친가쪽은 큰아버지 두 분이 돌아가셨고, 우리를 이어오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대교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진 말로 단칼로 나를 끊어내는 사람도 있었고, 그 계기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친척들도 생겼다. 나의 자랑이자 버팀목이었던 사람들이 차갑게 대하는 그 순간들은 아직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사촌오빠와 새언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예전처럼 다른 가족들과 지내보자고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했었다. 두 분의 의도는 이해를 했지만, 나는 지금이 좋았다. 가족이라고 모든 것을 다 공유하고, 어린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못했다고 굽혀야하고, 사과 없이 예전처럼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새언니와 오빠의 의도대로 나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지만, 오랫만에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즐거웠다. 다시 카타르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전화를 한 게 마지막이었지 싶다.




타지에 있으면서 가족들의 부고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버겁다. 기뻐해야할 좋은 일에 함께 하지 못하고, 슬플 때 함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게 해외살이하면서 겪는 가장 아쉬운 순간중의 하나인 것 같다. 만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도 약속에 못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비록 장례식장에 가지는 못하지만, 새언니를 위한 나만의 애도기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런 힘든 순간이 왔을 때 괜찮겠지, 하고 넘기고 괜찮았던 적이 없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보기만해도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터져나오고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을 몇 번 마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새언니가 우리 가족으로 와서 함께 했던, 내 기억속의 모습들을 하나씩 생각해보려고 한다. 10년이 훌쩍 지난 기간동안 서로가 기억하는 추억이 손에 꼽을만큼 적다는게 아쉽지만, 그래도 기억할 순간 나누었던 대화들이 남아있음에 감사한다. 온 가족이 새언니를 두 팔벌려 환영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새언니가 우리 가족으로 와 주었음이 참 고맙다. 떠나는 길, 지구 반대편에서도 새언니를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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