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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몰아쳐서 부서 이동

1년 전 이야기.

by 나의지금Minow


도하로 돌아와서 한 달 더 쉬면서 완전히 회복하고, 회사 의사를 만나 복귀해도 된다는 클리어런스를 받았다. 하이힐을 신지 못할 것 같아서 낮은 신발을 신어도 된다는 스페셜 레터도 받았다. 이제는 비행기 안에서 씻 차트라는 종이에 손님들 밀 주문을 받는 대신, 아이폰으로 그것을 대체한다고 해서 아이폰도 받았다. 밀린 온라인 러닝 클래스도 모두 다 끝냈다. 곧 해마다 듣는 재교육 기간이 오고 있어 매뉴얼을 펼치고, 손톱 정리도 하고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24년 2월 18일 아침


띠리리링

”pilot selection team” 전화번호가 떴다.


팀 오피서 : “잘 지냈니? 나 리크루트먼트 팀인데, 예전에 인터뷰 보기 전에 했던 인적성이랑 성격 검사 시험 있잖아, 그게 기한이 다 되어서 다시 쳐야 해. 내일 링크 보내주면 일주일 안에 시험 칠 수 있겠어?


그리고 이 시험에 통과하고 나면 on boarding process가 시작되고 Date of Joining도 이야기할 거야. 그러니 떨어지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나 : 당연하지! 링크 보내주길 기다릴게.


기적 같은 타이밍이었다. 딱 내가 발목을 다 낫고 비행에 복귀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직 리커런트 교육 기간까지 며칠의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연락을 주다니. 얼른 노트북을 켜서 지난번에 결제했던 온라인 시험 패키지를 결제하고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링크를 확인해 보니 일주일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승무원 교육팀에서 전화 와서 다가오는 교육은 없어질 것이니, 참석을 하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좋아. 하루 더 공부하고 시험 치면 되겠다 싶었다.


2월 21일.


집 옆에 새로운 공터에서 공사를 시작하는 바람에 잠을 깊이 못 자서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 피로가 나를 잠식하기 전에 온라인 시험을 끝내고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방짝에게 지금부터 한 시간 반 정도는 거실에서 시험을 볼 것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숙소가 좁은 편이라 책상은 우리 집 거실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내가 공부한 패키지보다 조금 쉬운 감이 있었지만, 몇 개의 유형은 예전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알쏭 달쏭한 문제 3-4개를 남겨두고 인적성 시험을 마쳤다. 한숨 돌리고 화장실 갔다가 이제는 한 시름 놓고 성격 유형검사를 했다. 성격 유형 검사를 하는 것은 일관성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문장을 읽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했다. 약 30분에 걸친 검사가 끝이 났다.



띠리링


시간은 오후 3시 10분을 가르치고 있었다.


팀 오피서 : “잘 지냈니? 지금 우리가 이메일 보내줄 건데, 그 안에 다시 한번 보내야 할 서류들 목록이 있을 거야. 가능하면 빨리 보내주겠니?”


나 : 알겠어. 잠시만 기다려봐. 금방 보낼게.



해마다 라이선스나 메디컬,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미리 스캔해 둔다. 그리고 해마다 같은 유튜브나 네이버 블로그를 뒤져보며 pdf파일로 전환해서 사이즈를 줄여서 노트북 바탕화면에 저장해 둔다. 미리미리 해두길 참 잘했다. 이렇게 볶아치면서 서류를 보내라고 할 줄이야. 내 동생이 사용하던 노트북은 마이너스의 손인 나에게 와서는 여러 번의 플라잇 시뮬레이터 설치로 인해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그래도 제 할 일 잘해주고 있으니.. 고맙다… 내가 교육 끝나면 컴퓨터를 이제는 바꿔야 되겠다 생각을 할 찰나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오피서 : 아직 안 보냈니? 우리 지금 급하게 보내야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나 : 엉엉, 컴퓨터가 조금 느려서. (클릭) 다 보냈어! 확인해 봐


오피서 : 도착했어. 고마워. 좋은 하루 보내.


내가 필요한 서류를 보내고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오피서는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렸다. 느낌이 좋았다. 가족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정해지고 나면 이야기할 계획이었으므로, 남자친구에게만 살짝 이야기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같은 필드에서 일하는 남자친구는 왠지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랬음 좋겠는데 미리 김칫국을 마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정말 좋은 소식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보자,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2월 24일.


지구 반대편에서 남자친구가 서프라이즈로 나를 방문했다! 이거 뭐야? 내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성공이야.



2월 25일


필라테스를 마치고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헤어드라이어 소리에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듣지 못했는데 “pilot selection team” 이 부재중 전화가 와있는 것이 아닌가! 오 마이 갓… 얼른 헤어드라이어를 끄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 : 좋은 아침이야. 나 방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서 전화 걸었어.


오피서 : 아, 그래! 안 그래도 다시 전화 걸려고 했었어. 오늘 오피스 가서 캐빈 크루직 사직서 내고 조이닝 절차 밟자.


나 : 응!!!!!!!! 알겠어! 그럼 우리 부서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거야?


오피서 : 응 그들도 이미 알고 있어. 서둘러야 해. 지금 당장 준비해서 오피스 가서 퇴사하고 연락 줘.



드디어.. 기다렸던 그 순간이 오늘에서야 오는구나. 꿈만 같았다. 가족들, 도하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고 나를 응원해 주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남겨두고 퇴사하러 신나게 달려갔다. 무방비 상태로 맞이하는 세 번째 퇴사 절차이지만, 이런 이유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먼저 내 퍼포먼스 매니저를 만나서 퇴사 사유를 리자인 레터에 적어내고, 캐빈크루를 담당하는 퍼포먼스 매니저들의 매니저도 만났다. 어이쿠야..


매니저 of 매니저 : 총 일한게, 9년? 10년 되었다고 했나? 이 와중에 조종사 교육까지 마치다니 대단하구나. 네가 이룬 것에 대해 너도 가족들도 자랑스러워하겠다. 그렇지? 교육은 힘들겠지만, 또 지나고 보면 그땐 그랬지 하고 돌아볼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잊지 마, 조종실 문 뒤에는 승무원들이 있다는 거. 너도 그 포지션에서 시작했고 여전히 너의 동료들이니까 잘 지내.


농담처럼 문 뒤에는 승무원들이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높은 매니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도 예전에 승무원이었다가 조종사가 된 사람들과 함께 비행을 했을 때, 우리가 바쁜 것을 알고 기다려주고 재촉하지 않으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반대로 무언가를 가져다줘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즉각 가져다주지 않으면 재촉을 하는 조종사들도 있었다. 그 감정 나도 이미 느껴봤고 얼마나 별로인지 아니까, 같은 동료들에게 이런 기분 전달하지 말라는 그런 뜻을 농담으로 건넨 것이겠지. 잊지 않아요 매니저님.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섰다.


뭐야.. 나 진짜 이제 승무원 생활 마침표 찍는 거야? 기다리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면접을 보고 합격 통지를 받고 1년 넘게 기다렸다. 누군가는 1년 정도 기다린 것이면 얼마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날이 오기를 나는 2016년부터 기다렸다. 결국엔 원하는 순간은 온다. 각자의 시간과 속도에 맞춰서.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는 항상 자신 있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너의 뜻깊은 좋은 순간에는 항상 내가 함께 있을걸?”


무슨 자신감인가 했는데, 이번에도 적중했다. 내가 ATPL 시험을 모두 다 통과한 날에도, 내가 조종사로 조인하라는 통지를 받는 날에도, 그리고 돌아보니 내 승무원 시절 마지막 비행이었던 마이애미 비행에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축하의 말 다음에 붕~~ 하늘에 떠 있는 나를 땅으로 가라앉혀서 차근차근 조언의 말을 시작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비어있는 곳에 하나씩 채우는 과정이다. 인스트럭터의 가르침 잘 받고,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는 거 주저하지 말고. 그리고 교육받는 기간 동안에 실수를 하면 피드백받고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게, 네가 시작하는 커리어로부터 따라오는 돈 관리도 잘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었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의 조언이기에 더 와닿고, 앞으로 미래를 함께할 사람이기에 무엇을 염려하는지, 내가 더 현명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조금 더 깊게 나눈 이야기들은 다이어리 한켠에 적어두었다.



2월 26일.


회사 물품 반납.

이제는 회사 아이디도 없다. 모든 클리어런스 절차가 끝이 났다.

쥐꼬리 만하지만 그래도 정산받을 퇴직금이 있다. 2월 29일에 받을 예정.

숙소에 들어가고 나갈 때 틴트된 건물 입구에서 cctv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면 세큐리티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신다.



2월 29일.


마지막 정산을 받으러 회사에 갔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함께 세컨드 오피서 포지션 면접을 봤던 동료였다. 이 친구도 며칠 전에 연락을 받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퇴사를 하고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었다. 어떤 비행기 기종을 받게 될지, 어디에서 교육을 받을지, 오가는 말에 설렘이 가득했다. 퇴직금에서 추가로 병가로 쓴 날들이 디덕션이 좀 되었지만, 총 네 달 쉬면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부서에서 시작을 하는 동안 자리를 잡는데 쓰일 자금만큼으로 충분했으니까. 곧 배치메이트가 될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고 회사를 나섰다.


회사를 나와 다시 pilot selection team에게 전화를 걸었다. Final settlement까지 끝을 냈다고 하니, tentative DOJ이 3월 4일이라고 한다!!! 그럼 당장 다가오는 월요일인데, 숙소는 어떻게 하지?? (사실 나는 짐을 60% 가까이 다 싸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우징 팀이 다시 연락을 해 줄 것이지만, 당장은 들어갈 곳이 없어 3월 10일쯤 이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도 남은 10일 정도는 현재 사는 숙소에서 보내야 하니, 출퇴근할 때 입어야 할 옷, 신발, 화장품을 조금 더 꺼내어 두었다.

금요일, 토요일은 회사 쉬는 날이고, 일요일에 다시 일을 시작하니 또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겠지?


기대된다.


나의 네 번째 사번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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