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면서생 어때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진부한 이 질문을 우리는 소개팅이나 미팅 자리에서 주고받는다. 때때로 회사 동료나 지인들이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며 나의 이상형에 대해 묻기도 한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이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진부하고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상대방의 이상형이 궁금할 때가 있거든.
이상형 (理想型)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유형.
이상형을 묻는 게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상형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형일 뿐 현실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이상형이 현실에 있을까?
솔직히 이상형을 만나본 적 있어?
없잖아~
나와 동갑내기 친구들이 한참 연애를 활발하게 하던 연애 성수기 시절에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한 얘기지만 사실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성수기 기준 일주에 세 번씩 소개팅을 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그저 스쳐가는 만남이었다. 그중에 몇 번의 썸도 있었고 썸을 넘어 연애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연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곧 이상형을 만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답이 없고 때론 너무 어렵게 느껴지던 연애 영역에서 나 자신과 타협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
20대 땐 이상형이 선명했다.
누가 이상형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웃김 주의;;)
백면서생*(白面書生) 같은 남자가 좋아요.
요즘 스타일로 말해보면
슬림한 체형에 스마트하고 허연 사람이요.
뒤통수랑 인중이 예쁘면 더 좋고요!
백면서생: 희고 고운 얼굴에 글만 읽는 사람
이런 내 이상형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하하하 웃는다.
‘백면서생’이 이상형인 사람은 처음 봤다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다.
나는 그 수많은 소개팅에서 백면서생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봄과 여름 사이에 소개팅으로 만난 그 오빠의 (외적인) 모습은 평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전혀 달랐다. 그분 홀로 1990년대에서 압구정동 한복판으로 시간 여행을 온듯한 옷차림…;;
’다음 만남은 없겠구나‘ 싶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람 뭐지..?
대화하는데 매력이 느껴졌다. 여태컷 소개팅으로 만나 본 사람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느낌이었다.
철학을 가르치신다더니, 대화를 리드하는 모습이 유려하시네! :)
아쉬웠던 첫인상을 대화로 이렇게 대역전시킨 경우는 내 소개팅 역사상 처음이었다.
어느새 내가 웃고 있더라니까-
대화는 카페에서 시작해 식당으로 이어졌고 그 시간 내내 내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분에게 스며든 걸까..?
집으로 가기 위해 나란히 걷다가 그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곤 나를 마주 보더니 물었다.
(백면서생 말고) 흑면서생은 어떠세요?
그는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내 이상형을 묻길래 백면서생을 좋아한고 했더니 이렇게 위트 있게 고백하는 거다!
“흑면서생은 어떠세요?”라니 ㅋㅋ꙼̈ㅋ̆̎ㅋ̊̈ㅋ̌̈ㅋ̄̈ㅋ̐̈
‘뭐지, 이 남자 왜 귀엽지..?’
(아마 글의 전개상 예상을 하셨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흑면서생’의 마법으로 연애를 시작했답니다 ;)
(*참고로 오래전에 끝난 추억이에요.)
이상형을 찾기 위해 시작된 나의 소개팅의 여정은 막연했지만 동시에 기대감도 주었다.
‘계속 만나보면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때로는 시트콤 같고 때로는 백분토론 같은 소개팅을 하며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까지 길고 긴 여정을 지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개팅 시즌 3는 내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이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애는 시작된다는 거.
다음에는 이상형을 실제로 만났던 이야기를 써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