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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May 06. 2024

마르크스의 개급 개념

1.계급에 관한 피상적 이해 방법들

 불평등 증대를 말하는 사람 중 계급 문제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극소수이나, 소득이나 부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본질적으로 계급 문제에 다가가야 한다. 불평등과 계급을 연결짓는 사람들도 계급을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계급을 혈통이나 가문, 세습화된 특권이나 지위, 출신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 종종 사용하는 '신계급사회'라는 용어도 부모의 부나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나 이런 모호한 용어 사용은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물론 세습화된 특권과 부는 오늘날에도 중요하나, 계급 문제의 핵심은 출신 배경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지위로 대물림에만 주목한다면 계급과 자본주의를 서로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고, 무엇보다 자수성가하는 자본가들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다른 오해는 계급을 특정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몇 개의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흔히 계층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 기준은 다양하지만, 흔히 경제적 자원 공유가 계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소득, 재산, 직업, 생활 방식 등이 그렇다. 이 계급론에서는 사회가 이런 기준으로 여러 층위의 위계로 나눠진다고 본다. 먼저, '수저 계급론'은 가구 소득과 자산을 기준으로 사회를 4,5개 등급의 집단으로 나눈다. 언론에서는 대략 부유층, 중산층, 저소득층으로 나누는 분류가 많다. 또한 학벌과 직업 역시 계급을 나눈데 사용하며, 노동자라고 해도 육체직부터 관리직까지 여러 분류로 나눈다.

 이러한 계급에 대한 이해 방법은 매우 피상적이어서 곅급을 결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단지 그 반영일 뿐 인것들을 전혀 구분할 수 없다.(취향이나 기호가 '구별짓기'를 만든다던 부르디외 사회학이 생각난다) 그러나 계급은 얼마나 버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혹은 자산이 얼마나 있고, 어떤 제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계급 분류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도 받아들여진다. 이런 주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산층화 되었거나, 노동 귀족이 되었다는 주장은 임금 수준이나 소비 성향을 기준으로 계급을 분류하는 방식이 반영된 것이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더는 투쟁을 이끌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2.생산관계와 계급

마르크스의 인식은 위의 인식과 다르다. 표면에 나타난 특징들(소득이나 생활방식)을 기술하는게 아니라 그 배후에 놓인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밝히는 데 관심을 두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생산에 참여하면서 맺는  사회적 관계-즉  쟁산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중요한 것은 누가 생산수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느냐는 것이고, 이것이 계급  구조의 기초를 이룬다. 즉, 직업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생산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가 우리의 계급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적 예속 관계는 아니기에, 겉으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임금에 예속되어있고, 생산수단이 없는한 지배계급을 떠날 수는 없다. 즉, 한 개인이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는 그가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정의되며, 이것이 바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접근 방법이다. 이 점에서 계급을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여타 사회학의 접근과는 궤를 달리한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지배계급은 생산 수단을 지배하는 사람들로, 자본가 계급을 말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두 가지인데, 그들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이윤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착취함으로써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경쟁 관계가 있고, 이것이 착취를 추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을 관계로 이해해야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생산수단의 지배를 단지 그것의 법률저구 소유 여부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개별 자본가들의 존재('사적 소유')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계급이 그런 형식적 개념이 아니라,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봤다. 계끕은 생산과 착취에 대한 관계 때문에 다른 인간 집단에 맞서 함께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 집단이다. 이렇게 봐야만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지배 계급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사례가 있는데, 우선  고용 사장의 문제를 볼 수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다고 해서 자본가 계급의 일부로 보지 않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이들은 자본 축적의 대리인인 한 그들은 자본가다. 그들은 자본 소유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윤 논리에 따라 노동자들을 쥐어짠다. 둘째로 국가 소유 경제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도 있는데,국가 소유의 경제 부분이라도 자본주의적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유기업의 관리자들은 자본가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며, 공기업들이 앞장서서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임금 삭감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위 국가 관료층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 관료를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다른 별개의 정치 집단으로 여기나, 자본 전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한 기능을 떠맡는다. 상대적 자율성이 있더라도, 국가가 자국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정도는 한계가 있다. 국가 운영을 위한 조세 수입과 국방 능력은 자본 축적에 달려 있기에, 국가 고위 관료는 자본 축적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자율성은 국내 자본의 축적 요구를 실행하는 방법에 대한 정도이지 실행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통해 개별  자본들의 발전을 촉진하려는 고위 국가 관료도 지배 계급의 일부로 봐야 한다.

 즉, 지배 계급에는 토지, 화폐, 생산자본 등의 소유자인 기업주, 금융업자, 토지 소유자뿐 아니라,  고용된 최고경영자, 공기업 경영자, 고위 국가 관료 등도 포함된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집단을  현대 사회의 주요 계급으로 묶어 주는 것은 어떤 식으로 한 집단의 수입이 다른 집단을 착취하는데서 오는 가를 봐야한다고 말했다. 위 집단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노동자 착취에 의존하는 집단이며, 그 지배계급이 조화롭게 통합돼 있는 집단이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싸우기도, 단결하기도 하는데, 위기가 장기화되는 오늘날., 이 점에서 그들은 점점 더 단호해진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해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을 정의할 때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먼저, 노동계급을 너무 좁게 정의해서는 안된다. 특정 산업의 육체 노동자만을 노동계급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지만 협소한 인식은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못한 총체성이 부족한 인식이며, 이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방해한다. 반대로 노동 계급을 너무 넓게 정의해서도 안된다. 모든 피고용자가 다 노동계급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고용된 처지에 있는 피고용자 가운데는 생산수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최고경영자들을은 오너가 아니라 고용된 전문 경영인일수도 있다, 이들은 봉급생활자라 하더라도, 자본 축적을 좌우하는 결정에 참여하는 극소수는 지배계급에 속한다. 또, 기업들에는 비록 생산수단에 대한 전략적 통제권을 갖지는 못하지만, 꽤 높은 보수를 받으며 다른 노동자들을 관리 감독하는 구실을 하는 상당 규모의 피고용자 집단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끼어 있는 이들은 신중간계급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정이 점점 복합해진 결과로 생겨난 집단으로, 그 상층은 조건이 자본가들과 공통되고, 하층은 노동자들과 공통되기도 한다. 즉, 생산관계속에서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계급으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3. 두 계급 사이의 적대와 투쟁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는 근본적 대립 관계에 놓여있고, 이처럼 착취 관계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는 끊임없는 투쟁을 하게 된다. 이런 투쟁은 계급 화해로 이어질 수 없으며, 계급 투쟁은 본질적인 것이다. 아무리 개별 자본가가 착하고, 인정 많더라도 자본가들은 냉혹한 착취자로서 노동자와 마주한다. 그렇다고 노동계급이 단지 약자,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다른 계급이나 집단이 갖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이것이 바로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는 바로 그 사실 덕분에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맞설 힘을 갖게 된다. 노동자들은 결코 개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으로 할 수 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생산수단은 개인이 돌릴 수 없고, 집합적 노동자들의 결합된 노동으로서만 가동할 수 있다. 파업을 통해 자본가들을 굴복시켜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지키거나 개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 사회주의를 역사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계급을 폐지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인 노동 계급을 만들어냈고, 이는 노동계급이 다른 피착취, 피차별 계급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사회의 혁명적 이해가 집중된 게급" 이라고 했다. 즉, 노동게급은 자신의 이해가 사회의 근본적 변혁과 일치하는 계급이라서 보편적 계급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다른 피착취, 피차별자들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다.



4.계급 위치와 의식의 분리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강조한 이유가 가장 고통 받고 박탈당한 집단이어서는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더 가난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노동계급을 중시한 이유는 이들이 자본주의 생산관게에서 차지하는 위치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할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전략적 차원에서 접근해 볼때, 그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면 차별의 물질적 토대가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 노동계급의 의식 또한 모두 선진적이지 않다. 체제의 오물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온갖 편견을 수용할 수 있고, 서로 분열해있다. 이것을 두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세 명의 사상가들이 있다.

 에드워드 파머 톰슨은 헝가리 혁명 분쇄 이후 신좌파의 선구자가 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데, 그는 계급이 구조에 의해 단순하게 결정되는 고정적 산물이 아니라, 개인들의 나날의 생활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라고 봤다. 이와 같은 "게급 형성" 개념은 한국 진보사회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분명 스탈린주의 역사관에 반대해 쓴 책지만, '토대와 상부구조' 메타포에 대한 스탈린주의에 기계적 해석 뿐 아니라, 그 자체에 반대했다. 이로써 톰슨은 인간의식의 형성을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으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톰슨은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으로 보는 것을 "휴머니즘적 자유지상주의적 이상론을 함축하는 도덕적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톰슨의 관점은 계급을 물질적 조건보다 의식의 측면에서 정의하는 민중주의와 잘 연결된다. 이 때문에 톰슨이 계급이라는 개념에서 민중이라는 개념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관게에 내재한 경향들로부터 사회를 변혁할 힘을 갖게 될 세력이 누구인지(즉자적 계급)를 흐리거나 잊게 만든다. 이는 개혁주의를 극보가할 전략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풀란치스의 계급이론을 언급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유로코뮤니즘의 좌파적 버전을 제시한 인물인데, 풀란차스는 계급이 생산관게 안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정치, 법률 수준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경제 관게가 계급을 규정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며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계급 경계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풀란차스는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임금 노동자일지라도 정신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육체 노동을 하는 사라들고 달리 노동계급이 아니라, 신프티부르주아지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노동계급의규모는 극히 축소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풀란차스의 계급 분석이 가리키는 것은 노동계급은 한 줌밖에 안된다는 것이고,이것은 계급 간 동맹이 필요하다는 유로코뮤니즘 전략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즉, 이제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계급과 무관하며, 상호 적대 계급을 아우르는 동맹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보장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을 수용했다) 계급 관계만이 권력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 위험이 있다는 것이 풀란차스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독재를 막기 위해서는 무장 봉기를 삼가해야 하며,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계급을 생산관계에서 보지 않는 것은 노동 계급의 사회 운영 능력을 부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계급이론 역시 노동계급 동질성을 운운하면서 그 기원을 자본 축적 논리에 새겨진 메커니즘에서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즉, 노동 계급이 생산관계의 위치로부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적 이해를 갖게 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투쟁과 노동계급을 특권화하는 환원주의 오류를 범했다면서, 주체의 다원화를 강조한다. 노동계급은 사회변혁의 여러 주체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고, 의식도 덜 급진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착취에 바탕을 둔 생산관계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적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데서 온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혁해도 차별의 물질적 토대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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