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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pr 25. 2024

추앙은 실존에 대한 해답? <나의 해방일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으로 본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

-문제적 개인의 실존에 대한 해답, 추앙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크 루카치의 그 유명한 《소설의 이론》 서문이다. 루카치가 말한 시대는 서양 문인들이 그토록 동경하는 고대 희랍으로,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 친숙한 시대이다. 왜냐하면 별의 빛과 자아 영혼의 불꽃이 같기 때문인데, 이 말은 곧 세계와 자아가 동일했다는 은유이다. 서사시에서 볼 수 있듯, 신이 함께한 시대에 우주는 자아와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즉, 총체성이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로 총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은 살해되었고, 서사시는 사라졌으며,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었다. 근대 이후 소멸한 서사시를 대체하는 서사 문학은 바로 소설이다. 루카치는 《돈키호테》에 주목하며, 근대 이후 소설에서 발견되는 문제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총체성 상실 이후, 개인과 사회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이때 문제적 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 맞선다. 조화로운 삶을 향한 가치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인물로, 가령 최인훈의 <광장>의 이명준, 김승옥 <무진기행>의 주인공 등이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처럼,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소설만이 문제적 개인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복제시대에 이은 디지털미디어의 시대에, 소설은 위길를 맞이했다. 과거 서사시가 소설로 대체된 과정처럼, 소설이 드라마로 대체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활자의 시대가 아닌, 영상의 시대이며, 서사의 권좌 역시 소설에서 드라마로 옮겨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 중 ‘작품성’이라는 모호한 층위 중 가장 소설과 유사한 방식이면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나의 해방일지>를 비평해보고자 한다. 이 드라마를 비평할 때 착용하는 렌즈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이자 문제적 개인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실존적 소외와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의 소외를 겪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잠시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 드라마의 흥행은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초반에 2프로대 시청률로 부진한 편이었지만, 끝내 9프로의 시청률을  보였고, OTT플랫폼 넷플릭스에 서비스되며 방영 이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팬층의 요구에 충족하고자, 대본집까지 출간되었다. 즉, 인기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온전히 대본집으로 출간한 책 <나의 해방일지>를 다룬다. 드라마를 그대로 옮겼다고 해도 좋을 만큼, 드라마를 충실히 텍스트화시켰기 때문에, 드라마와 차이는 없으나, 본고의 장르적 특징이 독후감이기 때문이다.     

-문제적 개인: 염미정과 구씨

 <나의 해방일지>는 이중 소외에(존재론적 소외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시달리는 주인공 염미정이 이방인 구씨를 추앙을 함으로써 해방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염미정은 경기도 변두리에 살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20대 후반의 비정규직 사무직 노동자이다. 자본주의 체제 속 구성원들은 누구나 차별과 착취로 인한 소외에 시달린다. 염미정의 경우, 비정규직 여성이라는 층위에서 소외를 느낀다. 그러나 염미정의 개인의 성격 역시 괴롭게 작용한다. 그녀는 매우 내성적이다. 그 배경에는 경기도 외각, 매일 왕복으로 58개의 역을 지나야 하는 거주지 문제도 있지만, 다른 가족에 비해 유독 존재론적 불안을 느낀다. 그 이유는 ”한 번도 채워지지 않았어”라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 자신과 만난 연인들을 ‘전부 개새끼’라고 말한다. 즉, 그녀는 사랑받지 못했고, 그녀의 인생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특히 사람을 만나는 일을 꺼려한다. 회사내 복지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사내 동호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불만을 느껴 괴로워한다. 상사의 핍밥, 괴로운 출퇴근, 가족끼리의 갈등, 그리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감 등 다중 소외에 시달린 그녀가 만들어낸 해결책은 바로 추앙이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미래의 사랑하는 연인을 만들어내, 그이를 삶의 목적으로 만든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실존에 대한 해답으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맹세한 것처럼, 상상계 속 이상적 존재를 형성함으로써 실존의 의미를 개척한 것이다. 즉,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무거운 돌을 들고 있음으로서 존재의 방식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 사랑의 대상은 이데아에서 존재하나, 구씨를 통해 현실에 편입된다. 

 구씨는 이름마저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방인이다. 어떻게 경기도 외곽에 있는 산포에 오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낯선 타자였다. 그저 낯에는 염씨네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혼자 소주를 마실 뿐이다. 알 수 없는 베일에 가려진 구씨는 낯선 존재이지만, 염미정에게는 그런 베일이 신비함을 주었고, 이내 추앙의 대상이 된다. 이내 밝혀지길, 구씨(구자경) 역시 사회적 소외에 시달린 인물이다. 그는 일명 호빠 마담으로, 이내 유흥업소 관리직에 오르나 ‘15년을 지하에서 술 취한 인간들 떠드는 소리와 조직 내 정치질에 환멸을 느끼다 우연히 산포에 내리게 되었고, 술을 마시며 은거한다. 염미정처럼, 구씨 역시 세계에 환멸을 느낀 은자이며, 존재의 허무감에 시달려 매일 소주를 통해 허무감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나, 매일 괴로울 뿐이다. 즉, 문제적 개인인 염미정과 구씨는 소외에 시달렸던 인물이었다. 마치 염미정의 그동안의 일상은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의 일상처럼 나른했고, 구씨의 과거 일상은 사르트르의 <구토> 속 로캉텡의 일상처럼 구토가 나며 책 대신 술에 의존했던 것이다. 실존적 소외를 겪는 이들이 실존적 해답을 찾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에 있다.      

-추앙: 사랑의 종교적 제의

 문제적 개인들에게 삶의 의미는 추앙으로부터 시작된다. 염미정이 먼저 구씨에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이니 “날 추앙해요.”라고 요청한다. 구씨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지만, 이내 염미정이 구씨를 추앙하기로 했고, 구씨 역시 염미정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주목할 점은 추앙이라는 낯선 표현이다. 추앙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 받들어 우러르는 것‘이다. 염미정은 사랑만으로 안되며, 추앙을 요구하는데, 여기서 추앙은 사랑의 신학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추앙과 비슷한 말로 숭배가 있는데, 염미정은 추앙이라는 종교적 제의를 통해 삭막한 삶에서 성스러운 아우라를 형성함으로써 실존의 해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제목이자, 해방의 도약을 위한 첫 여정, 일종의 모험으로부터의 소명이다. 

 구씨와의 추앙 제의를 치룬 이후 염미정의 본격적인 해방일지가 시작된다. 그동안 출퇴근에 지쳤고, 전에 연애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에 타인을 마주하는 것에 부담스러워하던 염미정의 삶이 윤택해지는 순간이다.        

-흰자와 노른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이항대립

 염씨네 가족은 경기도민이라는 이유로 많은 불편함을 겪는다. 여기에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 역시 문제인데, 집에 늦게 들어올때면 세 남매는 강남에서 모여 한번에 택시를 타고 가거나, 매일 58개의 역을 왕복해서 지나치고, 산포 안에서도 마을 버스를 타는 출퇴근길 장면의 생생한 묘사 역시 돋보인다. 이를 두고 경기도민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찬사를 붙을 정도로, 섬세한 리얼리티를 드러낸다. 이는 서울 지상주의에서 밀려난 서민들에 대한 고려로 보인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소설에서는 대체로 중산층의 화이트칼라를 위주로 다루는데, 이를 두고 ’판교문학‘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즉, 드라마는 문학의 이상적인 중상층인 거주지인 ’판교‘에서 탈피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이들의 고충에 접근한다.

 특히 코딩이나, 자영업 등 판교 문학의 여유로운 중산층과 달리, 전 연인이 갚지 않은 신용대출 때문에 괴로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염미정이라는 인물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직장 내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면서도, 직장 상사에게 찍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다.      

이중 소외 속 반쪽 자리 해방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16화를 끝으로 종결했지만, 나의 해방일지의 결말은 시원하지 않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염미정과, 노숙자에게 술을 양보하는 구씨, 그 외 결혼이나 연애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 염씨네 가족들을 보면 한 줌의 희망만 남긴 채 열어났다. 이러한 모호한 결말, 사람에 따라 짜증날 것 같은 결말은 시청자와 독자로 하여금 답답함을 주었지만, 열린 결말은 아직도 우리의 삶이 현재진행형인 노동의 소외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라고 읽힌다, 작가는 실존의 해답이 종교적 추앙을 제시한 체, 궁긍적 인간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 속 인물들의 연대기를 열어둔다. 아름다운 무책임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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