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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May 24. 2024

봉준호 영화의 계급의식 재현 방식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을 중심으로

들어가며
 프랑스 영화 잡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봉준호에 대한 평가이다.
아티스트적인 면모와 엔터테이너적인 면모를 절묘하게 갖춘 봉준호라는 천재는 분명 한국 영화의 보물이다. 이름 자체가 장르가 되어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적인 감독으로서 관객들에게 봉준호의 세계를 개척하여 전염시킨다. 그의 세계는 보통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라고 이해된다. 그 근거로는 대표작인 <괴물>에서 반미적 메세지가 담겼다는 것, 17대 총선에서 진보적인 영화인들과 함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지지했고 당원이었다는 점이 언급된다. 한심지어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점을 봤을 때, 좌파 감독이라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선입관은 관객이 봉준호 영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된다. 올바른 해석학적 순환을 위해, 감독이 아닌 영화에 집중해 역으로 감독의 성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분명 봉준호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에 비판적인 메세지가 있으나, 전혀 전복적 혹은 변혁적이지 않은 영화로 평가할 만하다. 정확히 말해 초기 영화에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급진적인 메시지가 있지만, 그의 영화의 기점이 되는 <설국열차>을 기점으로 그의 정치성이 전환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봉준호 영화의 성향이 바뀌는 지점은 파악하기 위해, 그의 영화에서 ‘계급의식’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 중 사회 비판적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괴물>, <설국열차> 그리고 <기생충>에는 저마다 특정 순간에 계급의식이 발현된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어떤 과정으로 발현되는지 파악해 그의 영화의 정치성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추적해보고자 한다.

1. 계급, 계급의식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착취에 기인한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원동력은 노동자의 이윤의 착취로,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강탈한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용어가 아닌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착취개념이다. 노동자가 만든 이윤을 일부 강탈하는 착취 구조는 계급(Class)에 따라 착취하거나, 착취당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은 자본가계급이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계급을 착취한다. 이 계급 구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해할 수 없는 구조이며, 이 둘은 오직 대립할 뿐이다. 화해할 수 없는두 계급이지만, 계급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의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일부 개념을 차용해 계급의식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즉자적 계급의식과 대자적 계급의식이다.
 먼저, 즉자란 자기 자신에게 있음, 그 자체임, 구별 없는 자기 관련, 무규정성 등을 말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조금 빌려오자면, 즉자란 곧 사물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계급에 속했다는 계급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곧 즉자적 계급이다. 봉준호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초기에 대부분 즉자적 계급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저항하지 않는 즉자적 계급의식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러나 헤겔 변증법의 기초인 ‘만물은 변한다’에 의거했을 때, 사람들의 의식 역시 변화함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바로 계급에 대해 대립할 때 비로소 대립하는 계급의식을 갖고, 이 계급의식은 계급투쟁을 통해 점차 대자적인 계급의식으로 변한다. 즉, 계급투쟁이 의식의 변화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봉준호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위기를 겪으며 계급 적대를 느낀다. 이때 주인공의 계급의식은 즉자적 계급의식에서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발전한다.

2. <괴물>, 지배계급이 만든 재난에 맞선 가족들의 연대, 그리고 계급의식

 영화 <괴물>을 통해 분명 봉준호라는 이름은 한국 영화에 괴물 같은 등장의 존재로 각인되었다. 이미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내놓은 봉준호였지만, <괴물>을 통해 독보적인 한국적 영화의 등장을 알렸다.

 여기서 사용되는 제국주의 개념은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 개념에 기반함을 밝힌다.
1) 제국주의 갈등이 낳은 재난
 우선 영화의 핵심 소제인 ‘괴물’은 무엇을 상징할까?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괴물은 미국 제국주의가 만든 재난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제작된 2000년대 초중반은 한국에서 가장 반미 감정이 치솟은 시대였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통일 분위기와 민족적 화해가 대두되는 시기라 미국은 ‘악’으로 인식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재조명, 안톤 오노 사건, 효순이 미선이 압사 사고가 터지며 과거 운동권에서만 존재하던 반미 의식이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근본적으로 영화 초반에 미군 부대 내 실험실에서 미군이 화학폐기물을 한강에다가 방류하라고 하는 장면으로 반영된다. 이 장면은 단지 영화적 허구인 것은 아니다. 감독은 주한미군이 한강에 독극물을 실제로 무단 방류한, 맥팔랜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즉, 괴물은 미국이 제국주의 패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영혼들이 만들어낸 재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치 지브리 애니매이션  <모노노케 히메>에서 자연을 파괴한 분노한 영혼들이 재앙신으로 나타나듯이, <괴물>에서는 제국주의 갈등에 희생당한 영혼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인 한강에 괴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경쟁을 상징하는 핵실험의 여파로 ‘고지라’처럼, 제국주의 경쟁을 상징하는 주한미군의 여파가 만든 ‘괴물’인 것이다.

2) 가족 연대와 계급의식
작중 등장인물인 강두네 가족은 피지배계급이다. 수원시청 소속의 국가대표 양궁 선수인 남주는 프롤레탈리아를, 운동권 출신의 대졸백수로, 무기한 잉여인간으로 묘사되는 남일은 룸펜 프롤레탈리아를, 매점 운영 외에 가진 것 하나 없어, 딸 핸드폰 하나 사주지 못하는 강두와 아버지 희봉은 가난한 하층 중간계급을 의미한다. 체육 노동자이자, 공무원으로 부를 수 있는 ‘남주’ 외 노동자라고 할 만한 가족 구성원은 없지만, 이들은 모두 체제에 고통받는 피지배계급이다.
 이 가족은 파편화되어 있고, 서로 관계가 좋지 못하지만, 괴물에게 딸 현서가 납치된 이후 서로 연대한다. 처음 현서가 죽은 것으로 생각해 장례식장에서 강두를 원망하며 싸우지만, 이내 현서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격리된 강두를 구출해 딸을 구하러 간다. 작중에서 계급의식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즉자적으로 자신들의 사사로운 개인적 안위만 추구하던 강두네 가족이 국가를 불신해 스스로 법을 어겨가며 딸을 찾기 위한 사투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안위를 보존해야 하나,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미국이 바이러스를 운운하자, 더 이상 괴물을 추적하지 않고, 오히려 딸을 구하려는 강두네 가족을 지명수배한다. 이는 국가가 결국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이기에, 소시민들의 생명보다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이다. 영화 속 직접적인 지배계급에 대한 적대는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국가에 대한 적대심을 보여주며 대자적 계급의식을 회복한다. 강두네 가족은 대자적 존재로 거듭나 딸 현서를 위해 괴물에 맞서는 계기가 된다. 결국은 딸을 되찾기 위한 괴물과의 사투에서 이기지만 딸을 구출할 수 없었다. 딸 현서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현서와 함께 있던 노숙자 소년인 ‘세주’를 입양하며 친자식처럼 키운다. 이는 결코 현재 상황에서 국가 권력 및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패배할 지라도, 후세대인 ‘세주‘를 통해 계급의식의 희망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괴물이 폐허로 만든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은 보존하는 한국식 민중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설국열차》, 수직적 혁명에 대한 일탈

1) 혁명이라는 비상 브레이크 잡아당긴 파국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벤야민 선집5>, 길)

 기차는 근대 문명과 산업 혁명의 상징이다. 기차길이 놓인 곳은 자본 축적의 세례를 받은 곳이고, 그곳에는 진보라고 불리는 서구 문명이 들어선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벤야민은 그의 마지막 글 인《역사철학테제》에서 진보라고 불리는 천사의 폭풍을 언급한바있다. 우리가 흔히 진보라고 부른는 것들의 이면에는 야만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역사마저도 철저하게 변증법적으로 인식하며, 진보라는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그리고 이 글의 메모에서는 마르크스의 기관차를 전복하며, 혁명을 단지 인류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폭주하는 기관차(문명)를 멈춰야 한다고 보았다. 이 지점이 벤야민의 구제비평적 관점에서 본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이다.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혁명개념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개념과 맞닿는다. 결말부에서 결국 정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그 혁명은 무척 공허하게 다가온다. 혁명이 이뤄진 자리는 '폐허'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벤야민의 혁명관과 맞닿아있는 듯 하나, 결정적인 차잊가 존재한다. 벤야민 혁명관은 그의 사상의 양대축인 유대 신비주의와 인간학적 마르스주의에서, 유대 신비주의의 흔적이 남아 오직 폐허 속에서 메시아적 구원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전히 폐허가 아니라, 희망이 잔존한 폐허라는 것이다.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폐허에서 구원이 잔존하나, 그렇다고 해서 반딧불마저 소산된 완전한 폐허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뜻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처럼 보이나, 봉준호는 기묘하게 희망을 남겨두지 않으면서 폭력 혁명의 허무함을 말해준다. 결말에서는 생사를 알 수 없는 긴박한 순간에서, 최후에는 민수와 커티스의 희생으로 요나와 티미는 살아남게 된다. 폭발을 통해 결국 열차는 멈췄지만, 요나와 티미외 열차의 탑승객은 전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인류 최후의 무리에서, 어린 꼬마 소년 티미와 청소년 요나만 남은 것이다. 다행인 점은 밖이 완전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꽁꽁 얼어붙어 그 누구도 살아있지 못할 것 같은 외부에서 북극곰 한마리가 이들을 응시하며 결말이 난다. 밖은 한파로 인해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기차 안의 믿음과 달리, 그래도 살만한 추위이지만 이것을 두고 희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직 얼음과 눈으로 뒤덮혀 겨우 간신히 북극곰 정도 살 수 있는 가혹한 환경에서 미성년 두 명만을 두고, 아담과 이브로 돌아가라는 듯한 결말에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혁명이 성공해도 공멸이며, 폐허라는 이 영화의 결말은 곧 혁명에 대한 부정이며 조롱이다. 결국 기차로 은유되는 자본주의 체제 및 상부 계급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보여주더라도, 혁명을 부정하는 아도르노스러운 희망 없는 '비판'에 불과하며 계급의식마저 조롱한다.
 설국열차는 신자유주의, 더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비판적인 요소가 있다. 설국열차속 악랄한 총리인 메이슨이 마가렛 대처를 오버랩시킨 것, 머리칸 학교에서 설국열차 체제를 칭송하는 교육을 받는 것, 엄청난 계급간의 격차를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설국열차라는 가상 공간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전혀 계급투쟁적인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전적인 혁명을 비웃으며, 마치 허무하다는 듯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에 가깝다. 단순히 봐도 혁명은 아래로부터 위로 이뤄져야 한다. 극것이 마르크스처럼 선로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벤야민처럼 선로의 기차를 멈추던 간에 수직적인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탈선한다. 한마디로 혁명을 비웃으며 포스트모더니즘적 허무주의로 빠진다. 이 지점에서 설국열차가 체제에 비판적일지라도, 체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급진성의 층위에서 분명 괴물보다 퇴보한 면이 보인다.

2)계급의식 재현의 순간: 억압에는 항쟁이다
 <설국열차>의 핵심 키워드는 <괴물>에 이은 '재난'이다. 한강이라는 지역적 재난보다 스케일이 커져 지구적 재난을 다룬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기후위기로 인해 냉각제 'CW-7'을 뿌리기로 결의한다. 냉각제를 뿌리며 지구 온난화를 막아보겠다고 하나, 17년 후 부작용으로 지구는 전부 얼어붙고, 최후의 생존자들은 월포드라는 사람이 만든 설국열차에 탄다. 설국열차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무한동력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기차 앞 칸에는 비싼 티켓을 산 부유층들이 있다. 이들은 일하지 않으며, 마약과 매춘 등 향락에 젖어 생활한다. 이에 비해 실질적인 업무는 중간 칸에 있는 노동자들과 꼬리칸 사람들이 일을 한다. 즉, 머리칸 사람은 중간칸과 꼬리칸 사람을 착취해 기차를 운영한다. 결말에서 밝혀지듯, 영원할 것 같은 기차는 점차 부품이 소비되어 사라졌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엔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아이들을 끌고가 부품으로 쓴다. 아무리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 지배계급일지라도, 피지배계급의 착취 없이 체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은유로 다가온다.
 폭동-항쟁이 벌어진 원인 역시 억압에 있다. ‘단백질 블록’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먹거리를 먹으며 연명하는 꼬리 칸 사람들이라 늘 억압받고 있어 분노가 축적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된 시점은 아이들을 끌고 간 이야기로 시작한다. 건강 확인이라며 아이들을 모아 키를 잰 후 강제로 데려간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 터무니 없는 검사가 끝나자 티냐의 아들 티미와 앤드류의 아들 엔디가 끌고 갔고, 이에 항의하나 군인들이 이들을 두들겨 제압한다. 이런 참상을 관찰하는 꼬리칸 지도자 커티스는 기회를 엿보고, 마침내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리며 반란의 포문을 연다.       
 꼬리 칸 사람들의 계급의식은 처음에는 즉자적이었다. 이들은 설국열차에 사실상 살기 위해 무임승차한 집단이다. 단백질 블록을 먹고, 비좁은 곳에서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산다. 그러나 작중에서 묘사되는 이들은 의외로 화목하다. 설국열차의 앞칸에 위치한 지배자들에 대한 분노가 있기 때문에, 폐허 속에서 서로 화목하게 연대한다. 즉, 계급에 대한 적대가 누적되어 즉자적인 계급의식이 대자적인 계급의식으로 성장하다가, 꼬리칸 공동체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 데려가는 모습을 보고 대자적인 계급의식으로 성장해 반란을 일으키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설국열차>의 계급의식 재현방식 자체는 급진적인 함의가 있고, 고전적인 계급의식 발현을 따른다는 점에서 정치적 급진성이 돋보이나, 결말부에서는 이 계급의식을 모두 조롱하는 듯한 허무함을 준다. 이 영화의 후반부터 정치적으로 아쉬움이 돋보인다.

3, 기생충
1) 프레카리아트 혹은 프롤레탈리아트
프로젝트38 연구원인 조해영 평론가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 계급 재현이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계급 외 다양한 정체성의 부상하며 계급 선명성을 떨어뜨리고, 양극화와 중산층의 몰락, 계급범주보다 대중문화에서 특정문화를 공유하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시각화, 프레카리아트의 부상 등이 있다. 계급 재현이 희미해지는 것은 단지 영화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판교 문학이라고 조롱되는, 중산층 재현에만 국한된 오는날 한국 문학에서 계급 재현도 마찬가지이다. 계급 재현의 몰락하고 계층 재현만 남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원성과 해체주의를 운운하며 총체성을 해체한 것처럼, 계급이라는 공통된, 총체적 이해관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시도중 하나가 '프레카리아트론'이다. 프레카리아트론은 조직 노동자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불안정·비정규 노동자층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말이다.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영국의 가이 스탠딩 교수다. 그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안정적인 고용 전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 별다른 직업 경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 증가”하고 있다며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고용 형태나 임금 수준 등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삶의 안정과 불안 등의 측면에서 폭넓게 노동자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프레카리아트를 말하는 곽노완 교수는 프레카리아트가 ‘다중’의 이질성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21세기 계급이라고 말한다. 이진경 교수는 프레카리아트가 노동자 계급과 다르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안정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 정규직 노동자와 대립하는 공통성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레카리아트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프레카리아트가 사회 변혁의 새로운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안정성이 불러 온 불안감은 어느 방향으로든 나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불안이 투쟁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 불안정성은 두려움과 보수성을 낳을 수도 있다. 최근 유럽의 신나치와 극우가 부상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봉준호 감독이 설정한 기택네 가족과 국문광은 프레카리아트론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특정 기업이 아닌 가정에 고용되며, 고용 불안정에 시달린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히 돈을 벌어 보다 나은 삶에 사는 소박한 소원이라 계급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최소한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의 이해관계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기우와 기정은 박사장 가족이 문광에게 주는 ‘파이’를 빼앗기 위해 결핵환자인척 조작한다. 프로카리아트들의 생존 투쟁을 영화에서는 OST가 흐르며 희극적으로, 블랙코미디적으로 묘사한다. 예술적일지라도, 정치적 윤리적 층위에서 이러한 장면은 최악으로 비줘진다. 하층 노동자들의 생존을 건 사투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기생충>은 프레카리아트론의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총체성을 무시하고 개별화된, 파편화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카리아트론 및 이 이론이 반영된 <기생충>의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전통적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할 주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변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작 <설국열차>의 결말에서 감지된 포스트모더니즘적 조류는 기생충에서 더 강하게 정체를 드리워내며, 총체성을 해체하며 우경화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봉준호 영화는 점차 후퇴해왔다. 반제국주의적 메시지가 함유되어 국가에 대한 적대 의식과 민중들의 단결을 보여주는 <괴물>, 결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일탈의 향기가 나지만 그래도 지배자를 갈아엎는 혁명을 다룬 <설국열차>, 그러나 프레카리아트론을 수용하며 우경적으로 투항한 <기생충>으로 이어진 봉준호 영화의 정치적 계보학은 예술성을 논외로 퇴보해오며 부르주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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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냄새’ 구별짓기와 계급의식의 후각화
이 영화의 정치적 후퇴는 단지 ‘프레카리아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계급의식이 나타나는 재현 방식에서 퇴보를 보여준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에 따르면, 미학적 선택이 계급 구분을 만들어내고 한 사회의 다른 사회 계층과 적극적으로 거리를 만드는, ‘구별짓기’를 만든다고 한다. 특정 미식 취향, 예술에 대한 성향, 취미 등은 계급을 구별짓게 만든다. <기생충>에서 노동계급 가정인 기택네 식구들의 잀상적 취향은 자본가계급 가정인 박사장네와 구별지어 진다. 눈에 보이는 물직적 차이인 대저택-취객이 노상방뇨하고 비오면 자주 침수하는 반지하 외에도 일상적인 취향에서 구별지어 진다. 예를 들어, 기택네 가족이 박사장네에 취직을 기념하는 파티를 할 때, 이들은 돼지고기에 삿포로 맥주를 마신다. 이는 취직 전에 피자박스나 접으면서 ‘필라이트’에 과자를 안주 삼아 먹던 때보다 상승한 처지이지만, 박 사장 가족이 상류층의 지인을 불러 셰프들이 만든 고급 음식을 즐기며, 지인이 불러주는 오페라를 듣는 생일파티와 너무나도 대비된다. 기껏해야 무직자에서 (불안정한) 노동자가 된 기택네 가족은 ‘필라이트’에서 ‘삿포로’ 정도의 상승이 가능하지만, ‘삿포로’에서 박사장 가족이 집을 비워 마시는 ‘로얄살루트’로의 상승은 불가능하다. 주류의 선택으로서 이둘의 계급적 차이가 구별된다. 그러나 기택과 기택네 식구들은 구별된 처지에 비관하지 않는다. 기택네 식구들은 굴욕적으로 복종하며 박사장을 칭송한다. 기택은 자기를 고용해주고, 매너도 좋은 박사장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같은 가장으로 동경한다.
 기택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냄새’에 있다. 일단 기택 가족의 위장력은 대단했다. 신분도 위조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말투도 바꾸며 박사장 가족을 거의 속이는데 거의 성공했다. 끝내 기택의 가족이 위조하지 못한 것은 반지하에서 나는 하층의 냄새이다. 박사장은 기택에게서 지하철 냄새를 맡는다. 박사장 아들인 다송도 기택과 충숙에게 같은 시궁창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아무리 위장하더라도, 집에서 머무는 동안 몸속에 베인 냄새가 계급을 구별짓는 특징이 되었다. 박사장은 이 냄새를 두고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라고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요 교통 수단인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를 떠올린다. 이 냄새는 작중 후반부터 계급을 구분짓는 주요한 상징인데, 결말부에서 계급의식이 급진화하는데 무의식적 영향을 끼친다.
 다송의 생일파티 날, 전날 기택은 수해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몸에 냄새가 스며든다. 박사장 아내인 연교가 차에서 통화하며 기택에게 냄새가 난다고 하며 문을 열자, 기택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옷 냄새를 맡는다. 이후, 박사장의 요청으로 풀숲에 숨어 인디언 분장한 상태로 이벤트를 준비중이었는데, 지하실에 숨어있던 근세가 튀어나와 기정을 찌른다. 이에 충격을 받은 다송이 쓰러지고 박사장은 기택을 보고 “차 빼야지, 차. 김기사. 뭐해”라며 소리친다. 이때 쓰러진 근세가 박사장에게 인사하자, 자신을 아는지 의아해하며 근세에게 나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그러자 기택은 그동안 축척된 계급 적대가 한순간에 발화되어 계급의식의 급진화를 촉발한다. 결국 박사장을 적대적 계급으로 인식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3) ‘살인’이라는 계급의식 재현
봉준호 감독의 ‘계급 재현’은 영화적, 미학적인 층위에서는 빼어나다. 악한 부르주아와 선한 프롤레탈리아의 일명 ‘언더도그마’에서 벗어나, 겉으로는 선하고 모범적인 박 사장 가족과 신분을 위조한 가족 사기단 ‘프롤레탈리아’의 신선한 대립은 고전적인 선악과 계급의 이항대립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봉준호스러움이 뭍어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심각한 정치적 비판점은 ‘계급 재현’ 방식은 진보의 탈을 쓴 친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노동계급의 대자적 계급의식을 단지 우발적 ‘살인’으로 묘사하며, 계급 간의 선악을 해체하는 방식은 노동계급을 더 이상 사회변혁의 주체로 보는 것이 아닐뿐더러, 이들의 계급의식을 비하하는 것이다.    결국은 엔딩곡 ‘소주 한 잔’이 흘러나올 때면 체제 비판이 아닌, 혼란스러운 허무주의만 남는다.

마치며: 예술적 발전과 정치적 후퇴
 봉준호의 영화적 기법과 봉테일로 불리는 디테일 등 미학적 층위에서 봉준호 영화는 섬세해지고, 정확해졌다. 그러나 정치성에서는 퇴보해왔다.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반감과 이에 맞선 계급의식을 보여준 <괴물>로 시작해, 계급의식을 해체하며 결국 우발적 살인으로 조롱하는 <기생충>으로 이어진 봉준호 영화의 정치성은 몰락해왔다. 한편으로 정치성을 예술성으로 등가교환한 덕분일까? 아카데미와 국내 언론에서는 그를 극찬한다. ‘조중동’으로 지칭되는 보수언론부터, 한경오로 지칭되는 진보언론까지 봉준호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측한했고, 할리웃 자본의 최정상에 있음에도 리버럴 세탁을 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봉준호 영화를 보면, 좌파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버려도 될 듯하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그렇다. CJ라는 국내 거대 대기업을 든든한 하부에 두고 있고, 언론과 영화사의 찬사를 받는 봉준호가 더 이상 변혁적 영화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이와 달리, 예술성을 위해 정치성을 포기하지 않은 켄 로치 감독의 대표작 <랜드 오브 프리덤>의 ‘인터내셔널가’가 <기생충>의 ‘소주 한 잔’보다 크게 울리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예술적으로 기대하되, 정치적으로 이미 마음을 접고 봉준호 감독의 신작을 기다려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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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준효, 프로카리아트는 새로운 계급인가, 레프트21, 201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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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p.163~p.172
9. 앤서니 기든스, 『현대 사회학』, 을유문화사, 2018, p.270~p.271, 김미숙 외 역
10. 발터 벤야민 , 『발터 벤야민 선집5』, 길, 2008, 최성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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