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곰돌이 May 24. 2024

총체성 상실의 시대, 자연과 인간의 조화의 오디세이

영화 <모노노케 히메> 분석

총체성 상실의 시대, 자연과 인간의 조화의 오디세이: 영화 <모노노케 히메> 분석
-발터 벤야민 문예이론을 중심으로

60220383 김민규

1.서론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20세기 최고의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여는 유명한 서문이다. 그가 동경하는 시대는 고대 그리스로, 신이 살아있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는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루카치가 말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는 총체성이 회복된 시대이다. 루카치에게 총체성이란, 서사시의 시대 영혼이 운명에 순응하여 조화롭게 사는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는 횔덜린이나 노발리스 같은 독일의 천재적인 시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영혼의 고향’에 안주하는 시대인데, 루카치는 호머의(호메로스) 서사시가 그 시대의 사고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운명에 따라 죽을지 알면서도 전쟁에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헥토르, 그리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하는 오디세우스 등 신이 정해준 운명에 순응하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무너지는데,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 세계관으로 옮겨가면서, 인류는 자유를 얻었지만, 대신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후 철학에서는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과학에서는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총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는 ‘고향상실의 시대’이고, ‘신들은 떠나갔고 와야 할 신들은 오지 않는다.’ 특히 21세기 들어, 총체성 상실의 시대는 재난의 시대가 되었다. 이미 누적된 자연 파괴는 기후 위기, 코로나 팬더믹과 같은 전염병을 만들었다. 이런 위기는 연결된 위기이고, 재난으로 인류를 공멸시킬 실존적 위기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재난은 이제 예외가 아니라 정상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21세기 들어 흥행하는 재난 영화들은 현시대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할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그 힌트를 위대한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발터 벤야민에게 들을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구원은 과거에서부터 온다. 과거로부터 희망은 오고,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병폐 속 구원을 위해 초창기 자본주의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이 바로 벤야민 평생의 역작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그는 미완성으로 된 이 책의 원고를 집필하며, 끊임없이 자본주의 초창기 파리를 연구를 통해 어디서 병폐가 시작되었는지 추적했다. 당시 쓰였던 시, 소설, 희곡과 같은 문학작품부터 백화점 전단지까지,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매체와 자료를 통해 자본주의 도시의 문제점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다.
  본고에서 다룰 <모모노케 히메> 역시 재난이 시작된 최초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자연과 유기적으로 살던 인간들이었지만 점차 문명이 발전하며, 점차 인간들은 공존이 아닌 자연을 정복하고자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했다. 결국 자연은 기후 위기와 전염병으로 인류를 공멸시킬 재난으로 가고 있다. <모모노케 히메>는 자연과 인간이 공조롭게 지내다가, 문명이 발전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를 거쳐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를 하며 기술을 통해 신을 대체한 것처럼, <모모노케 히메> 역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며 신의 죽음이 시작된 시대를 다룬다. 총체성 상실을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대안을 찾는 이 애니매이션이 주는 메시지는 자본주의가 만든 재난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특히 자연을 더 이상 도구로 보지 않고,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난의 시대에서, 영화 속에서 인류의 ‘구원’을 모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역사철학을 중점에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총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온 일부 개념을 차용했다.

2. 선행연구

 일본 애니매이션을 대표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 및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철학을 다루는 연구는 이미 많이 선행되었다. 특히 하야오가 일본에서 운동권 시대 재학했고 자국 정부 비판 및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언사를 해왔다는 점에서 좌파 감독으로 인식되었으며,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역시 평화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라는 큰 세 가지 갈래를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특히 68혁명 이후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 부상한 신좌파 및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으로 하야오의 세계관을 분석해오는 시도가 많았다. 서구권에서 하야오의 사상을 분석한『미야자키 월드』가 그렇다. 그 외 제작 과정을 다룬 『지브리 스튜디오에선 무슨 일이?』처럼, 일러스트 위주의 스토리를 풀어애는 연구 및 책들은 많지만, 학술적으로 다룬 해외 서적이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그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일본 영화나 애니매이션에서 왔다고 분석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출판되어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지브리 영화의 스터리텔링의 원형을 추척한다. <모모노케 히메>가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과, <고질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본고에서는 총체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총체성의 관점을 유지하는 루카치의 관점 및 이를 계승한 벤야민의 이론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일본 및 미국 등 해외와 달리 지브리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적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 문화 개방을 한 지 30년도 안 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일본 문화 연구를 할 기회는 적었다. 그래서 2000년대 이후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의 인기 및 연구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만, 아쉽게도 80, 90년대 지브리 영화에 대한 연구는 뒤늦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하는 <모모노케 히메>에 대한 연구 역시 부족하다. 영화 비평지인 ‘씨네21’에 실린 한편의 비평, 애니매이션 연구지에 수록된 몇 편의 논문이 있지만, <모모노케 히메>의 스토리텔링과 주제를 다룬 접근은 부족하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명작이면서도, 학술적 접근이 부족한 <모모노케 히메>를 세부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3. 본론
‘스토리텔링 전개 방식과 문화 원형 분석 ’
-발터 벤야민과 게오르크 루카치를 중점으로

1) 무로마치 오디세이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디세이아’이다." 그만큼 호메로스의 전설적인 서사시로서 서양 문학의 위대한 원형이 된 경이로운 스토리텔링을 다룬다는 말이다. 특히 루카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원환적 순환, 즉 그리스 시대의 총체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봤다. 이 중《모모노케 히메》는《오디세이아》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서양 문화의 두 가지 원형 중 오디세이로서, 저주를 푸는 모험담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디세이형, 여로형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사시 <오뒷세이아>와 애니매이션 영화 <모모노케 히메>의 전개 과정은 세부적으로 상이하다. 무엇보다 먼저 주인공의 특성이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2) 인간적 면모의 오디세우스, 신화적 영웅의 아시타카
 오디세우스는 당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과 달리,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운명에 순응하여 명예를 위해 강렬히 전사한 영웅들인 헥토르, 파트로클루스, 아킬레우스 등의 인물들, 그 외 운명에 순응하여 난관을 뚫은 영웅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와 달리 전쟁과 싸움을 싫어하는 인물이다. 거창한 평화주의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굳이 고향을 떠나 전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에 나가면 20년 동안 집에 못 돌아오고 방황한다’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심지어 영웅답지 않은 일종의 병역기피도 시도한다. 단지 어머니가 시켜 여장한 아킬레우스와 달리, 밭에 소금을 뿌리며 쟁기질을 하는 광인의 흉내를 낸 것이다. 인간적인 욕구-고향 이타카에 안주하고 싶어하기에, 왕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은 광인의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광인인지 시험하기 위해 팔라메데스가 오디세우스 아들을 밭에 두자, 오디세우스는 아들을 피해 밭을 갈았고 광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자 오디세우스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 군대에 합류한다. 오디세우스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도, 그리스 군대가 오디세우스를 동참하려고 하는 이유도 모두 예언 때문인데, 오디세우스는 신화적 영웅으로의 소명을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합류하게 된,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뒷세이아>에서 그가 이타카에 돌아가려는 이유도 영웅적인 소명이 아니라, 단지 아내와 아들이 있는 안식처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이유로 목숨을 건 귀향 여정을 겪는다.
 반면 아시타카의 경우 오디세우스처럼 비범한 출신이지만, 훨씬 더 영웅적인, 고전적인 면모가 강조된다. 그는 몰락해 북쪽 변방에 숨어서 생활하는 에미시 일족의 왕자로, 딱히 가진 것 없이 작은 마을에 살던 청년이다. 그가 ‘모험으로부터의 소명’의 관문을 거치게 된 계기 역시 ‘약자를 구한다’라는 영웅적인 신념으로부터 시작된다. 갑자기 재앙신이 나타나자 빠르게 달려가 맞서고, 결국 재앙신을 죽인다. 이는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카야’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처음에는 모험을 거부한 오디세우스와 달리, 죽음을 각오하고 어린 약자를 구하기 위해 활을 쏴서 재앙신을 죽였고, 그 과정에서 오른팔에 재앙신의 촉수가 달라붙어 저주받게 된다. 여기서도 ‘예언’이라는 주술적, 신화적 숙명이 중요하게 작동하는데, 마을 무녀의 예언에 따라 재앙신의 저주로 죽게 될 운명을 받아들이며 저주를 풀지 모른다는 희망을 앉고 서쪽으로 떠난다. 사실상 마을의 약자를 구하다가, 마을 구성원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염려하에 추방된 것이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비관하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이런 영웅적인 태도는 자신의 출생 때문에 과업을 수행하러 모험을 떠나야 하는 헤라클레스와 같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고전적인 영웅이다. 이점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원형으로 하는 모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변주가 있는 지점이다. 오디세이형구조임에도, 주인공 성격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나 ‘헥토르’와 유사하다.

3) 여성 중심 스토리텔링
 지브리 영화 중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인물 중심의 ‘여성 서사’라는 점이다. <모모노케 히메>의 경우 서사의 주인공은 아시타카로 볼 수도 있지만, 영화 제목이 ‘모모노케 히메’인 만큼 여성 주인공 ‘산’의 비중 역시 작중 서사에서 중요하다. 게다가 타타라 마을을 수호하는 에보시 고젠 역시 여성으로,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일본 애니매이션속 여성상과 달리 강인한 여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기존의 일본 소년만화가 남성 소년 주인공이 강해지는 서사였다면, 지브리 영화는 여성 주인공이 지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가령, 지브리 작품의 원형이 되는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의 경우, 결말에서 여성 메시아의 강림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80년대 초반,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구성이다.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 위의 포뇨> 등 여러 지브리 작품들이 여성 주인공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보통의 일본 소년만화에서 ‘소년’이 ‘히로인’을 만나, 각성하는 서사가 주된 스토리텔링 방식이라면, 지브리의 경우 여성 주인공이 스스로 초자연적인 도움(토토로), 남성 주인공(하울) 등을 만나 지혜를 얻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모모노케 히메> 역시 스토리텔링의 시작은 아시타카로 시작하지만, 두 가지 여성상을 만나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깨운다. 여기서 남성 위주의 사무라이 마을, 승병 부대, 사냥꾼 부대 등의 서사는 배제된다. 즉, ‘남성성’을 배척하고, 여성 중심 세력의 조화를 다루며, 여성성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하는 에코페미니즘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4) 네 가지 세력에 대한 해석
《모모노케 히메》는 단지 자연을 대표하는 '산' 과 인간을 대표하는 '에보시'로 상징되지 않는다. 더욱 심층적인 세력 균형이 얽혀있다. 인물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원령공주 '산'은 생태주의를 넘은 급진적 생태주의, 반인간주의적 생태주의, 에코파시즘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불가능을 말하며, 심지어 자연을 위해 인간을 소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은 분명 인간이지만, 스스로를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모로 역시 "인간도 될 수 없고 들개도 될 수 없는 불쌍한 산... 그 애는 이 모로의 딸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임에도 인간을 혐오하는 극단적 생태주의자, 에코테러리스트를 상징한다. 결말에서 시시가미의 죽음과 아시타카의 진심을 듣고 조금 변화지만, 여전히 "아시타카 당신은 좋아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싫다"고 말한다. 타타라 마을에 살며, 산을 만나겠다는 아시타카와 달리 계속 숲에 살겠다고 한다. 즉, 작중에서 상징적인 극단적 생태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과 화해 가능성을 열어둔다.)

 둘째, 타타라 마을의 수장인 에보시 고젠은 공상적 사회주의 및 휴머니즘을 의미한다. 타타라 마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에서 언급되는 '코뮌'과 닮아있다. 특히 페미니즘적인 공간으로, 성별에 관계 없이 구성원 각자 충실하게 맡은 바를 다한다. 약자인 여성과 나병 환자라고 해도 전혀 천대받지 않는다.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여성들은 우월한 제철 기술을 활용해 제철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나병 환자들 역시 기술자가 되어 무기를 만든다. 남성들은 마을을 지키거나, 철을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서로 업무는 다르지만, 모두가 평등하고 호혜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 특히 계급도(에보시 고젠은 지도자이지만, 사실상 같이 생활하는 같은 계급에 있다), 장애 여부, 성별로 인한 어떤 차별과 천대도 없는 초기 사회주의가 이상으로 보는 ‘코뮌’이다. 즉, 에보시 고젠과 타타라 마을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착취가 없는‘ 공상적 사회주의, 초기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생산력이 낮아 당시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이곳은 인간 사이에서는 차별과 착취가 없지만, 사회를 운용할 수 있게 하는 하부구조를 보면 결국은 경제 구조가 제철산업과 무기 제작에 있다는 한계가 있다. 결국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휴머니즘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보여준다.

 셋째, 사무라이 집단, 사냥꾼, 승려병 등은 보수 반동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영화는 이들에게 일말의 동정을 하지 않고 잔인하게 묘사한다. 타타라 마을을 습격하는 사무라이들이 아시타카에게 팔이 잘리고, 화살에 목을 맞는 장면은 지브리 영화 중 가장 잔인하게 묘사될 정도로 잔혹하게 묘사된다. 영화는 이러한 끔찍한 장면을 넣음으로써 생태를 파괴하고, 약자에 대한 차별과 천대하는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가 담겨있다. 특히 시시가미/데이다라봇치의 죽음 이후 폭주하는 누런 빛의 점액에 휩쓸려 죽는 것을 보면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야만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넷째,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꾸는 생태주의, 생태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을 위하여 시시가미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일당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하나, ’산‘과 ’에보시‘의 대립에서 특정 세력 편을 들지 않는다. 신화적 영웅의 면모로서, 자연과 공존을 꿈꾼다. 그래서 산이 타타라 마을을 습격하는 것을 반대하며, 산에게 숲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산이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마을을 공격하자, 마을 사람들이 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특히 에보시와 싸우려는 산을 말리며 산을 기절시키고 숲으로 도망친다. 아시타카는 신령 멧돼지인 ’나고‘가 타타라 마을의 총탄을 맞고 재앙신이 된 것을 알지만, 타타라 마을을 원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자연이 인간에 대한 중오와 원한의 굴레를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의 신이자, 일명 자연과 인간의 ’총체성‘을 아우르는 시시가미에게 치명상을 치유해주지만, 멧돼짇들을 선동해 인간과 전투를 벌이다가 재앙신으로 변한 옷코토누시의 생명은 거두어간다. 즉, 자연의 신은 극단적인 생태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염원하는 아시타카의 편을 들며 인간(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는 계급사회가 아닌, 타타라 마을처럼 평등한 사회와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4. 결론: 발터 벤야민의《역사철학테제》로 해석하는 결말

 독일 유대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글로 알려진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그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벤야민은 유대인으로서 유대 카발라 신학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역사유물론이라는 양극적 사유를 통해 역사주의의  진보 및 연속성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있다. 그는 파국만을 본다. 그 파국은 쉬지 않고 폐허 위에 폐허를 쌓고 그것을 그의 코앞에 들이댄다. 낙원에서 불어오는 강풍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천사는 이제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강풍은 천사를, 그가 등지고 있는 미래 쪽으로 막무가내로 데려간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산더미 같은 폐허는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진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강풍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중

 즉,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말은 '폭풍'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폭파하고,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에 주목한다. 이 신호는 섬광처럼, 한 순간에 나타나는 짤막한 신호라 포착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적 기회는 언제든 있고, 그 기회는 여전히 반딧불처럼 미세하게 잔존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설명한다면, 혁명을 통해 이 세상의 착취와 억압을 끝낼 수 있는 '섬광'의 기회가 매순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아적 기회를 포착해 '혁명'을 성공한다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벤야민은 한편 유대교 메시아 사상을 갖고 있는데, 그에게 메시아는 피억압계급의 혁명이다. 즉, 벤야민에게 혁명은 곧 구원이다. 그에게 구원은 고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신학의 구원과 맞닿아있다. 카발라 신학에 메시아는 통한 구원은 가능하나, 그 구원은 오로지 철저한 파국의 잿더미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관을, 고대 카발라 신학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이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인데,《모모노케 히메》의 결말은 벤야민의 구원관으로 해석된다.

《모모노케 히메》는 단순하게 보면 비극으로 끝나는 듯 하다. 자연을 관장하는 시시가미/데이다라봇치는  목이 잘려 죽었고 사냥꾼들과 마을 주민들 일부도 폭주하는 데이다라봇치의 점액에 휩쓸려 죽었다. 타타라 마을은 폐허가 되었으며, 마을 수장 에보시 고젠 역시 오른쪽 팔을 잃어 무사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숲의 세력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들개신인 모로신과 옷코토누신 모두 인간과 맞서다가 죽었다. 즉, 인간은 인간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슬프게도 폐허가 되버렸다. 그러나 시시가미신의 죽음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은 자연과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대립이 아닌 공존의 희망을 주어지기 때문이다. 자연을 강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사용하는 세력들은 몰상당한다. 이제는 숲에서 소수자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코뮌 공동체와 자연과의 조화의 가능성을 남겨둔 체 결말이 난다.
 등장인물 역시 결말에 있어 조화를 추구한다. 공상적 사회주의 공동체의 수장인 에보시는 아시타카와 산이 시시가미의 머리를 돌려주어 폭주를 멈추게 한 후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로 살아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아시타카를 마을로 불러와 마을을 재건하겠다고 다짐한다. 산 역시 아시타카에게 사랑을 느끼며, 형제와 숲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인간은 여전히 싫어하지만, 아시타카를 사랑함으로써 마을 공동체와 화해할 여지가 열린 것이다. 아시타카 역시 저주가 풀렸으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타타라 마을에서 지내겠다고 말한다. 산과 타타라 마을의 화해를 주도하는 중재자이자, 이상적인 생태주의자의 메시아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바란다. 즉, 작품의 결말에서 알 수 있는 주제의식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이다. 이 조화를 위해, 자연은 총체성의 수장이자 신인 시시가미를 잃었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지만, 구원은 폐허에서 이뤄진다. 이 점에서 작품의 주제의식에서 벤야민의 구원 사상이 돋보인다.   
몰락해가는 역사의 과정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세계를 열 수 있는, 억압, 착취, 천대, 차별 없이 자연과 공조롭게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구원에서 성공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혁명‘이 있지는 않았다. 차별받는 타타라 마을이 자연의 도움을 받아 ’국가 세력‘으로부터의 성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는 숲이 위차한 서쪽 지역에서, 자연과 조화롭게 지낼 호혜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희망을 마련했다.  

 <모모노케 히메>는 오늘날의 근본적인 문제인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공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오뒷세이아>의 스토리텔링을 원형으로 하면서도, 페미니즘적 서사를 가미했으며, 결말에서 벤야민의 구원관을 통해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보여준다. 경이로운 OST,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작업으로 만든 픽셀과 당시 최신의 컴퓨터 그래픽 역시 작품을 대채롭게 만든다. 이 애니매이션은 단지 오락용 애니매이션이 아니다. 인류의 해방 가능성을 담아내는 대작으로,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살라는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전한다. 재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시대, 아직까지도 이 애니매이션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차별과 천대가 지속되고, 재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 애니매이션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성좌가 되어, 가야할 길을 빛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봉준호 영화의 계급의식 재현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