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인 글에는 기존 상식과 체제에 대한 전복성이 돋보이는데,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가 그렇다. 손택은 1964년 발간된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영미 문학계와 사회 전반에 알렸다. 이전 해에는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할 정도로 모더니즘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윽고 발표된 수잔의 이 글을 통해 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 글은 아리스트텔레스의 그 유명한 모방이론을 비판하면서 포문을 연다. 모방이론이 모방의 대상 인 ‘내용’을 중시하면서 자꾸 해석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잔은 해석에 반대한다. 해석은 예술을 지식과 논리로 강제적으로 규명하려고 하기에, 심지어 강간과 같다고도 말한다.그래서 예술을 상징계의 언어로 풀어내는 해석이라는 작업보다 예술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주장한다. 글의 결말에서 손택은 이것을 두고, 예술의 성애학이라고 한다. 마치 '사랑'처럼 상징계의 질서로 풀어내기보다 있는 그대로 감정을 느끼라는 것으로 읽힌다.
나온지 60년이 지난 이 글은 해석에 연연해하는 오늘날에도 분명 유효한 글이다. 해석이라는 전통적 권위에 맞서 이해의 주체를 비평가에서 독자에게 준,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불 같기도 하다. 내게도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있다. 그 글에서도 저자의 죽음을 통해 작품 수용을 작가에서 독자에게 주었는데, 수잔의 글에서도 비슷한 울림을 느꼈다.
한편 해석에 반대하는 행위가 급진적일 지라도, 결국은 작품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술 수용을 논리와 지식으로만 수행하려는 기존의 비평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내게도 신선하게 읽힌다. 다만 예술을 새로운 감수성으로만 파악하다가는 오히려 고일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하에, 독자들이 예술을 온몸으로 느낄 여유가 있을까? 해석을 거부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찾기보다 예술이 더 어렵게 느껴져 거부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예술'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려면, 감각을 미쳐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을 위한 해석자-비평가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