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수도승의 독서일기>를 열며

by 꿈꾸는 곰돌이

작년 겨울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었다. 문학도로 마주한 선생의 사유는 경이로웠고 한 문장, 한 글자 마다 느껴지는 비평의 세례에 흠뻑 취했다. 선생의 말년을 함께한 독서 일기를 엮어낸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 비평의 금자탑이자,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문인이 읽을 만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당시 낭만적 비관주의에 젖어있던 내 영혼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려준 은사였다. 독서는 정치와 더불어 방황하던 영혼에게 이정표가 되어준 은사이자 벗이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니 독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독서는 단지 방황하는 내 영혼의 이정표뿐 아니라, 인류의 영혼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해방에 헌사하는 것이 책으로서의 사명이다. 텍스트가 유미적이든, 탐이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인류가 보다 나은 삶에 살도록 사유의 지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독서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를 억압하는 존재인 '자본' 축척을 위해 존재하는 재테크 서적을 포함해 다수의 자기계발서는 내게는 독서가 아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패라는 말이 있지만, 굳이 적을 알고자 독서라는 제의적 행위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서문 아래 모여있는 글들은 인간 해방이라는 장대한 꿈을 품은 인문주의자 한 사람으로서 쓴 독서일기이다. 문학도와 혁명가 사이를 산보하는 청춘으로서 쓴 부족한 글이다. 언젠가 되돌아볼 때 단지 철 없는 대학생의 청춘낙서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내 젊은 한 시절에 나름 인간 해방을 위해 사유해봤다는 징표로 남겨두었다.
독서일기인 만큼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외에도 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의 공동체》 , 남진우 시인의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했다》처럼 문학산문의 정수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게 독서를 분류할 때 읽는 텍스트의 양에 따라 통독과 발췌독으로 나눌 수 있다. 장편소설이 아닌 왠만한 책들은 내게 발췌독의 대상이다. 그 그리고 읽는 속도에 따라 정독, 속독, 탐독으로 나누었다. 정독과 속독은 사전 그대로를 의미하니 넘어가고 탐독에 대해 말해보겠다. 내 특유의 독서방식으로 정독과 속독의 중간에 위치해있다. 어떤 부분은 넘어가거나 속독하고, 어떤 부분은 정독하는 방법이다. 보통 편집자들이 원고를 대략 검토할 때 이러한 방법을 쓴다고 하는데, 나는 보통 혼술을 할 때 취기에 끌려 이렇게 읽는다.
벗도 없고, 애인도 없는 나의 삶은 도시의 수도승 같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성적인 충동, 타락의 유혹, 물화의 매력으로부터 유일하게 초연해질 수 있는 제의적 행위가 바로 독서이다. 얼마나 거룩한가. 마치 연인과의 연애보다도 더욱 즐겁고, 가치있는 것이 독서이다. 게다가 책은 나를 소유하려거나 하지도 않고, 다른 책에게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독서, 그것이 침대이든, 책상이든, 버스나 지하철이든, 도서관이든, 저녁 가로등 아래 벤치 아래든 나는 매일 읽었다. 게다가 기록했다. 그 소산이 바로 이 글의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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