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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비평의 이름, 문화비평

10.12 독서일기

by 꿈꾸는 곰돌이

뿌리 깊은 비평의 이름, 문화비평

-이택광의『이것이 문화비평이다』에서 느껴지는 문화비평의 마력


1.

저자인 이택광에 따르면, 문화비평은 단지 대중문화나 영화 또는 음악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비평은 문화에 대한 비평일 것이라는 사고는 나이브한 사고라고 하며, 19세기로 올라가 “문화비평가는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비평하는 비평가다.”라고 하는 말을 인용한다. 그래서 이택광은 문화비평가를 두고 ‘급진적 비평가’라고 말한다. 이때 급진적인 단지 과격함이 아니라, 뿌리에서 문제를 보는 비평가를 의미한다. 어쩐 사안을 뿌리에서, 발본적으로 사유하는 자가 문화비평가이며, 이 말은 곧 당위적 존재이다. 그래서 문화비평가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존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문화비평가는 대중문화의 시녀가 될 수 없다. 문화비평은 당연히 기존의 장르 비평을 모아둔다 해서 문화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이 문화비평만이 갖는 총체성으로 이해된다. 문화비평의 총체성은 장르 비평과 다른 새로운 비평 행위라고 할 수 있고, 언제나 전체의 관점에서 개별 문화 현상을 망라한다. ‘진리는 전체다’라고 선언한 헤겔이 생각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화비평가들이 헤겔리언이 아니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처럼 충분히 이단아도 있다. 니체, 보들레르, 매튜 아놀드가 대표적인 문화비평가이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문화 비평이 좌파의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우파 문화비평가인 어빙 배빗이 있다. 그래도 결국 루카치, 벤야민, 프랑크프루트 학파로 이어지는 독일 좌파 문화비평의 계보는 20세기 문화비평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와 별개로 저자는 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를 최고의 문화비평 중 하나로 뽑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화비평이야말로 일상에 파묻혀 있는 불편한 정치성을 발굴해서 재 몫을 찾아주게 하는 중요한 글쓰기라고 생각하기에 만용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고, 문화비평은 낡은 것처럼 보이는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고, 문화비평은 낡은 것처럼 보이는 잔해더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헤안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p.15) 그러면서 이 책을 한국대중문화의 폐다고지로 선언하며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라는 담대한 제목과 함께 문화비평의 전범이 되는 산문들을 나열한다.


2.

인문좌파는 주체적인 문제를 주체화의 관점에서 사유하자는 취지를 담은 저자가 만들어낸 용어법이다. 인문좌파는 단지 좌파도 ‘인문학을 공부하자’ 라고 하거나, 인문학을 공부하면 좌파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모든 주체화는 상품화를 전제하는데, 상품화는 하나의 재현 체계로서 합의된 즐거움 이외의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인문좌파는 이렇게 가치 없는 것으로 제거되어버린 것에서 어떤 정치적 가능성을 찾아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p.57)

이 개념은 전에 쓰인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서도 사용되는데, 내가 이해한 인문좌파의 개념은 자본주의의 사물화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온몸으로 맞서는 전략가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니 당연히 문학뿐 아니라, 사물화된 대중문화를 망라해야 하며, 특히 현상의 토대를 파악하는 문화비평의 시선에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문화비평의 관점에서 철학과 비평/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인물 사이를 넘나들며 인문좌파의 사고를 이어간다.

3.

이태광의 문화비평은 사회를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렌즈를 빌려 바라본다. 이 책이 나온 2011년은 이명박 정부 내에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으로 인해 불평등과 계급 문제가 중요한 시점이라 그런지 2008년 촛불, 2009년 용산 참사, 쌍용차 자동차 점거 농성 등 굵직한 사회적 사건들을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교조적인 해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택광은 2008년 촛불을 이중적인 중간계급의 욕망을 표현한다고 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로 발생한 촛불이지만, 촛불은 명박산성을 넘을 수 없는 탈정치성의 상황 자체가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촛불은 비록 중간계급의 운동이지만, 그것의 한계를 염려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분한 메시지를 주었다고 한다.

쌍용차 투쟁을 바라본 시선 역시 흥미롭다. 노동자의 적이 무엇인지를 노동자에게 각인시킨 사건으로 보며, 합리적 진보와 보수의 소통이라는 중간계급 이데올로기를 폭로했다고 말한다. 또한 진보 세력의 전략 전술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했다는 주장 역시 흥미롭다. 기존의 총고용 보장이나 공적 자금 투입이라는 대안 제시와 투쟁 지지보다 국가를 시장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국가 기능의 강화를 내세우는 폴라니주의나 케인스주의의 망령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복지국가’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복지국가 수호라는 유럽식 대안을 일방적으로 차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물론, 대안으로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리한 통찰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과 계급 개념을 차용해, 김대중, 이명박, 노무현, 전두환 등 정치인들을 통찰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정신분석을 차용한다. 그와 깊은 관계에 있는 슬라예보 지젝의 시선과 유사하다. (스탈린에 대한 호감이나 비판적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진 지젝과 달리, 이택광에게는 스탈린을 향한 일체의 동경은 보이지 않는다.) 지젝의 문화비평을 국내로 도입한 이택광의 문화비평의 또 다른 축은 정신분석이다. 물론, 아버지의 법이라던지, 주이상스, 대타자 등 지젝, 적어도 라캉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고, 과연 정신분석이 과학적인가를 의문으로 가져간다. 문학비평이 아닌 문화비평에서 정신분석에 의존한 글쓰기가 사회의 현상을 명확하게 규명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나, 적어도 흥미롭게 읽힌다.


4.

이택광이 문화비평의 재단에 올린 대상은 다양하다. 물론, 2011년에 나온 책인만큼, 보통 2000년대 중반과 후반을 강타한 사건과 인물들이 위주라 1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수정될 필요는 있겠지만, 그 당시 이슈가 된 것들에 대해 그 뿌리를 추적하고 있다. 한류, 휴대폰, 독신주의, 천안함, 2006년과 2010년 월드컵, 미디어법, 북핵, 이순신, 몸짱-얼짱 신드롬, 김 일병 등 한국 사회를 드러내는 표상들을 모두 추적해 그 심연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택광의 문화비평에서 공통점으로 제단되는 부분 중 하나는 전통 윤리의 균열이다. 불륜 드라마를 우리 시대로 리얼리즘으로 규정하는 글에서는 “불륜의 징조는 소박한 차원에서 지금 현재 개인이 처한 현실을 넘어가려는 바람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차원에서 다른 사회적 체제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불륜 드라마는 이 열망의 물화가 빚어낸 하나의 징후다.”(p.76)라고 말한다. 이어 <신성가족의 몰락>이란 글에서는 한국에서 붐을 일으킨 ‘가족교’는 남성의 위계적 권력이 접지하는 지점으로서, 이로 인해 가부장적 상징 권력으로부터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승인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신성한 범주는 그 생성의 시기에 내장되어 있던 기원적 모순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행복한 가족이라는 판타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긴장을 무마하기 위한 유토피아적 이미지였고,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론, 점차 가족의 신성함은 희미해지고 있으나,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2005년 개정 국적법 논란에서 이를 읽어낸 것이 놀랍다,

이처럼 이택광의 사유들은 사회의 표상에서 심연으로 향하는 시원의 문제를 향한 도정이다. 그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존하여 문제의 시원을 파악한다. 그가 포착한 대부분는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가속화하는 사물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을 추적하여 밝히는 일, 사물화가 가치 없는 것으로 판명한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인문좌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택광은 이 책에서 한국에는 없는 지젝과 같은 도발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문화비평가를 꿈꾸는 듯하다. 그래서 문화비평의 페다고지라는 호기로운 선언 역시 무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말처럼, 대중문화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같은 선상에서 놓고 비평하는 문화비평에는 일반 문학이나 장르 비평 이상 가는 마력이 있다. 사변적 산문에 가까운데 분명 시적인 산문에 버금가는 마력이 있다. 그 마력은 이론으로 현실을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파동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또한 이택광이 포착하는 지점 역시 흥미로움 역시 한몫하는 것 같다. 가령, 운서인의 소녀시대 성희롱 논란에서 다들 윤서인의 비도덕성을 논할 때, 이택광은 사회의 섹슈얼리티의 상품화에 주목해, 소녀시대의 상품화 지점을 분석한다. 비슷한 경우로, <꿀벅지는 성희롱인가>라는 글에서는 꿀벅지 논란을 “가냘픈 소녀시대의 허벅지에 재생산의 몫을 담담할 건강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첨가해서 탄생한 기표라고 할 수 있다.” (p.321) 라고 말한다. 꿀벅지 논란은 외모가 자산이라는 합의가 꿀벅지라는 기표에 담겨있다는 것이며, 성희롱 차원을 넘어 우리의 주체를 고정시키는 정체성 담론으로 강림한 것에 주목한다.

이렇듯 남들이 옳냐, 그르냐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논쟁에서 벗어나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이택광의 문화비평은 내가 그토록 헤매며 찾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하다. 급진적인, 근원적인 이택광의 문화비평과 글쓰기를 더 탐닉할 가치가 있다. 급진적 문화비평의 마력을 폭주하는 윤석열 정권에서, 다중위기의 시대에 적용하는 글을 꿈꾸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문화비평의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이론을 다지며 문화비평의 스타디움에 입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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