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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펀치 포르노그래피, <범죄도시>의 씁쓸한 흥행

by 꿈꾸는 곰돌이

원펀치 포르노그래피

-<범죄도시>의 씁쓸한 흥행에 관하여

<범죄도시>는 마라탕 같은 영화다. 재료의 향과 본연의 맛을 살려 마라탕을 너무 자극적이지 않게 끓인다면, 가끔가다 먹으면 훌륭한 중식 중 하나겠지만, ‘마라수혈’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자극적이고 획일화하여 만드는 패스트푸드화된 마라탕은 음식의 미학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범죄도시도 마찬가지이다.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기계적인 이분법에 맞춰 대충 섞어놓고 요리한다. 그러니 관객들이 맛이 없을 것 같아 중독되도록 단순한 폭력성과 일차원적 유머 코드라는 자극적인 양념과 조미료로 가학적으로 조리한 패스트푸드이다. 대충 만들어도 먹을만 한 패스트푸드처럼, 재료만 조금 바꾸고 계속된 되풀이되는 마라탕 같은 <범죄도시> 시리즈는 포르노그래피 사회의 병든 징후이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판타지 포르노그래피

<범죄도시> 시리즈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나, 실제로는 리얼리즘을 가장한 판타지이다. 리얼리티는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하여 살아나지 않는다. 은폐된 것을 밝혀내어 총체적으로 담아냈을 때, 마치 현실을 지도와 같이 축약했을 때만이 리얼리티가 담긴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도시>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 파악이 아닌 다소 폭력적이지만 정의로운 경찰인 마석도의 시선에서만 영화가 진행된다. 이는 마석도에게만 줌인을 하거나 마석도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줌인하는 방식이다.

마치 포르노그래피에서 신체를 줌인하여 성적 대상화시키는 것처럼, <범죄도시>는 마석도가 깡패와 범죄자를 타격하는 지점에서 폭력의 대상화를 진행한다. 특히 마석도의 힘은 매우 강해 단연들은 한 방을 맞으면 바로 쓰러져 금세 적들은 초토화된다. 일본 대놓고 판타지를 표방하는 소년만화도 아니고, 한국 극장의 흥행수표이자 현실의 사건을 반영한 <범죄도시>의 이러한 원 펀치 액션은 뻔하다. 전혀 새로움이 없고 은폐되어 있는 아름다움이 없다. 벤야민이 말한 괴테의 베일의 미학은 <범죄도시>에는 전혀 없다. 그러니 에로티즘은 결핍되어 있는 한편의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듯하다.


경찰 미화의 이데올로기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해보면, 경찰 마석도는 대타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법과 규율이라는 상징계의 질서를 위반하면 폭력으로 응징한다. 범죄자는 대타자의 질서를 거부하는 도착증 환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범죄는 대타자를 소환하는 의식이다. 마석도는 대타자의 사도로서 이들을 규정하고 제압한다. 한 방에 보내버리거나, 아니면 메인 빌런인 경우 죽기 전까지 구타한다. 슬라예보 지젝이 <범죄도시> 시리즈를 봤다면, 이 영화의 반복되는 일명 ‘정의 구현’ 구조를 통해 경찰의 공권력 정당화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고 비판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미화는 국가의 졸개밖에 더 되지 않는 경찰을 아버지의 권위를 수호하는 권위를 부여한다. 즉, 영화는 “깡패는 맞아도 돼. 경찰은 정의롭다.”고 반복한다. 물론, 1편의 경우 룸살롱 사장에게 성 접대받는 마석도의 모습이나, 답답한 경찰 조직 고위층들, 마약을 유통하는 경찰들처럼 늘 선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설정한다면 극단적으로 작위이니까. 그렇지만 마석도로 대표 되는 ‘정의로운’ 경찰 집단은 깡패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는 집단이라는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

물론, 여기서 경찰이 국가의 지배 도구라는 마르크스의 국가관을 설파하려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까지만 서술하겠다. 핵심은 영웅주의적 국가관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범죄도시> 시리즈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범죄자를 악마화하여 폭력의 대상화가 되어도 무방한 타자로 전락시키는 <범죄도시>의 메커니즘은 전형적인 포르노그래피이다. 인간을 사물화하여 성적 대상화가 되어도 무방한 타자로 퇴락시키는 포르노그래피와 지나치게도 닮아있다. 범죄의 원인을 단지 개인의 물질적 이기심 정도로 단정하여, 그것을 탐하는 범죄자를 가학적인 폭력으로 응징하는 <범죄 도시>는 시네마의 가치가 상실되었다. 체제의 소외를 은폐하며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포르노그래피로 배설하는 <범죄도시>는 성적 포르노보다 훨씬 더 파렴치한 포르노이다. 아무리 독과점이 있다고 한들, 그런 영화가 1000만 관객이나 돌파한 한국 사회를 보면 얼마나 이 사회가 포르노화 되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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