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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 보여주는 것:연민에서 연대로

by 꿈꾸는 곰돌이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이 보여주는 것들: 연민에서 연대로 이행을 위하여

우선 흠뻑 축하할 일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자로, 근대 문학 이후 꾸준히 주변부에 머물던 아시아 여성 작가인 한강의 수상은 여러 긍정적인 성과가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작품의 시원으로 삼는 한강의 수상은 오늘날 억압과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특히 한강의 작품 세계관은 충분히 진보적이다. 여성 작가이자,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서 탁월한 페미니즘 작가이다. 또한 억압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80년 5월의 광주와 해방후 제주의 4.3 등 국가 폭력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서사를 보면, 한강의 소설 세계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단지 ‘좋다/나쁘다’, ‘반갑다/반갑지 않다’ 로 단순하게 분류하는 방식은 한강의 미학과 그 수상 의미를 단순하게 전락시킬 수 있다. 조잡하지만 나름의 애정을 담아 한강의 세계에 대해 논해보겠다.

애도의 아이러니, 연민의 양면성

서른 넘어서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 한강 시 ‘괜찮아’ 중

오늘날 한강은 소설가로 이해되지만,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기도 하다. 한강의 시세계 또한 소설세계와 유사한데,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수록된 <괜찮아>는 한강의 세계관을 가장 잘 함축해주는 시로 읽힌다. 왜 우는지, 아버지의 질서로 타박하기보다 어머니의 모성으로 품어주는 것. 따뜻한 위로로 대표되는 한강의 작품 세계는 애도의 세계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리비도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사를 관통한 천재의 징표인 멜랑콜리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애도가 대상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정상적인 고통인 반면, 멜랑꼴리는 자아상실과 망상에 시달리는 병리적 상태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면 그 대상에게 향했던 리비도는 분산한다. 그러니 상실한 자는 ‘멜랑꼴리’한 상태이다. 멜랑꼴리는 검은색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멜랑과 담즙을 의미하는 꼴레의 합성어로, 무기력한 우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작업이 실패하면, 멜랑꼴리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인류 문학의 원동력은 바로 작가들의 멜랑꼴리였고, 한강 역시 강력한 멜랑꼴리커이다. 한강의 근간 『 작별하지 않는다 』는 소설 속 국가 폭력으로 애도 되지 않은 4.3 민간인 희생자를 애도하는 도정이다. 몽환적 정치에, 시적인 산문으로 작품 속 인문들이 겪은 국가 폭력이라는 재앙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상처를 기억한다. 아마도 홀로코스트, 유대인 용어로 쇼아를 가장 검은 것으로 여기는 서구 문학에서, 이러한 한강의 애도 서사는 반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소설의『 작별하지 않는다 』의 가장 큰 문제점은 4.3을 단지 애도로서, 희생자로서 기억하는 것에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4.3은 제주 민중이 그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부와 맞선 민중항쟁이지만, 이를 단지 국가 폭력으로‘만’ 기억한다면,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민중의 투쟁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강의 시선은 평화주의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국가관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을 강대국들의 대리전으로 본 한강의 시선은 통찰력이 있다. 우파들은 이를 비난하겠지만) 4.3을 국가폭력으로만 보는 이러한 관점은 희생자의 눈물에 연대할 지라도, 이들의 비극을 끝내기 위한 ‘정의로운 폭력’에는 연대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강의 문학은, 특히 근간 『 작별하지 않는다 』 ‘몰락의 에티카’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강 소설의 텍스트를 너머

한강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대해 논한 것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한강의 작품의 세계를 보아 선험적으로 파악컨대, 당연히 희생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애도할 것이다. 그러나 무장 저항에는 외면할 것이다. (만약 소설이 진실로 한강의 세계를 반영한다면) 하마스도, 헤즈볼라도, 후티도. 이들의 죽음은 단지 애도의 대상만이 아니라, 칭송하기 벅찬 반제국주의의 성전에 뛰어든 전사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이냐 시온주의냐의 문제를 놓고 목숨 건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동 상황을 두고 서구 지배 권력의 영향을 받는 노벨문학상에서 한강의 수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단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에는 단지 약자와의 연대라는 진보성과 약자에 대한 위선적인 연민이라는 메커니즘이 작용한 듯하다. 그러니 한강 소설을 읽을 때, 텍스트에서 한강 이상을 읽는 ‘전복적 읽기’로 그 한계를 뒤집어야 한다.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개인에 대한 애도를 넘어 국가와 맞서 싸우다 죽은 영웅에 대한 추모로.

다시 10월이다. 팔레스타인의 영웅들을 기리며 스스로 제국주의의 폭력에 희생당할 것을 선택할 투사들을 추모한다.

*축하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학살과 폭력을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시온주의 악마들이 한강의 소설을 추모할 자격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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