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 독서일기
에로티즘: 인간본성과 억압없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로티즘>, 서문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인간본성에 대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분석에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환원론으로 빠지지 않고, 더 나아가 인간 해방의 가능성도 모색한 명작이다. 인류사에 헌사하는 수많은 불멸의 고전이 있겠지만, 그중 한국 사회에 읽혀야 할 책 한권을 뽑는다면 단연코 <에로티즘>을 들고 싶다.
오랫동안 성 보수주의를 채택한 주류 한국 지배자들은 여성을 억압해왔고, 체계적으로 차별했다. 20세기 후반 들어 이에 맞선 운동이 부상하고, 그러한 도구로서 페미니즘을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페미니즘의 인식은 결국 우파적 여성차별 인식을 뒤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이 주구장창 주장하는 것은 여성들과의 연대를 말하며 남성성을 거세하자고 말하나, 그것은 남성성으로 점철된 남근과의 연대라는 동전의 뒷면에 불과하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우파들의 성적 억압에 동조함으로써 여성 해방을 스스로 옥죈다는 것이다. 성 해방 없는 여성 해방은 없지만 성 상품화에 반대한다며 성적 보수주의와 타협한다. 안티 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이 대표적이다. 성매매나 포르노그래피가 여성 차별(이들의 표현으로 여성혐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틀렸다. 포르노그래피와 매춘은 사회의 병폐이지, 병폐의 원인이 아니다. 이들의 과도함은 힘들게 진보해 온 사회의 성적 자유를 성적 보수주의로 퇴보하게 했다. 그러니 현재 여성 차별과 여성의 성젂 억압에 맞서는 사람들이 채택해야 할 무기로
현재 주류의 페미니즘인 (남녀 대립적) 안티 포르노 페미니즘이 아니라, 바타유의 에로티즘을 제안하고 싶다. 바타유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이 새로운 억압을 할수록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여성 혐오라는 억압이 더해진다고 보았다. 바타유야말로 인간의 성 해방을 선구적으로 포착한 이론가이자, 억압 없는 해방된 사회를 꿈꾼 혁명적 사상가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 수천 년간 반복해온 질문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바타유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가져온다. 인간 존재는 모친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한 존재와 다른 존재는 단절되어 있으며, 이를 두고 인간의 특징으로 불연속성을 든다. 인간이 고독한 불연속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연속성을 갈망한다. 불연속적 존재가 연속성이 구현되는 찰나의 순간이 있는데, 바로 생식의 순간이다. 불연속적 존재인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식을 이룰 때만 연속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섹스를 통한 결합의 순간만이 연속성에 이를 수 있는 신비로운 시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결핍된 연속성을 두고 향수를 느끼고, 그것이 세 가지 에로티즘-육체에 대한 에로티즘, 심정의 에로티즘, 신성의 에로티즘-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 세 에로티즘은 고독감을 망각학고, 연속성에 다가가게 만든다고 보았다.
육체의 에로티즘은 불연속적 개체가 와해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섹스를 통해 상대방의 몸 안에서 자아의 완전한 상실을 이루어 존재의 연속성을 구현한다.
심정의 에로티즘은 사랑의 열정을 말한다. 사랑하는 두 개체는 서로 연속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서구 문학의 주요 서사로 자리잡은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에 못 이겨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깨져버린 연속성으로 인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심정의 에로티즘은 육체의 에로티즘과 연결되어 있다. 육체적 사랑과 심정적 사랑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육체적 에로티즘이 심정적 에로티즘을 유도하고, 연장한다.
신성의 에로티즘은 신에 대한 (숭곻한) 사랑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11:28)에서 알 수 있듯이, 초월적 절대자의 품속에서 존재와 존재 사이의 경계가 없는 연속성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즉, 인간이 에로티즘을 느끼는 이유는 불연속성 존재로서 연속성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성적 매력의 대상과 합일이 되고 싶은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에로티즘은 죽음마저 초월하게 해주며, 이것은 에로티즘이 마력이기도 하다.
금기와 위반
바타유는 인간의 쾌락을 목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에로티즘은 바타유는 동물들의 교미행위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동물이 생식을 위해 교미하는 본능이 있다면, 인간은 생식 외에도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한다. 이것이 섹스와 교미의 차이이자, 인간과 동물의 차이이다. 욕망의 대상을 탐닉하는 것도 동물과 달리 다채롭다. 에로티즘은 인간 고유의 ‘내적 체험’이고 이 내적 체험의 결정에서 주체는 자아를, 의식을,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즉, 에로티즘은 비의의 체험이기에 신성한 경험이기도 하다. 비의의 내적 체험은 금기로 설정된 것에 더욱더 신비함을 느낀다. 나아가 신성한 종교적 행위가 된다. 앞서 말한 대로 금기를 설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동물들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성행위를 부끄럽게 여김으로써 금기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동물로부터 멀어진다. 즉, 인간은 금기의 대상이 있어야 에로티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 최대의 금기는 무엇인가? 성에 대한 금기는 시대마다 상이하다. 조선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분리가 거의 없어졌다. 또한 서구 일부 국가에서는 누드 비치와 남녀 혼욕이 금기의 대상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금기의 대상이다. 또한 문명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노출허용에 대한 금기 역시 다르다. 서구에서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 노출 외에 상당히 관대한 복장을 허용하나 (경제 수준이 비슷한) 이슬람 문명권은 그렇지 않다. 반면 문명과 단절된 원시 부족은 거의 벗고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문명 이전인 네안데르탈인이 있었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금기 역시 생겨났다. 또한 사회에서 살인이 엄청난 금기로 인식되며, 성경에도 수록될 정도이니 그 금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바타유는 죽음에 대한 금기로 인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있어 충동을 느낀다. 거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격투기나 익스트림 스포츠를 경험할 때 오르가즘과 같은 쾌감을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을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한 것도 거기에 있다. 그렇기에 욕망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면 금기가 강화되고, 그럴수록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죽음 역시 억제하려면 금기가 강화되고, 그럴수록 욕망을 자극한다.
바타유는 섹스는 본질적으로 노동과 대립한다고 보았다. 쾌락에 도달하기 위해 행해지는 섹스와 물질획득을 목표로하는 이성적, 의식적 행위인 노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쾌락의 추구가 노동을 강조하는 모든 인간 집단에서 금기시되는 이유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마약을 죄로 규정하며, 난교나 수간과 같은 쾌락적 행위 역시 경멸의 대상이다. 성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닮아있다. 성적 경험으로부터 황홀함을 느낄질라도 폭력성을 띤다. 섹스란 결국은 성기의 마찰이고, 그 과정에서 파열이 발생한다. 성행위의 원리는 정상 상태의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던 폐쇄적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 파괴에서 비로소 황홀감과 함께 비로소 연속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과 달리, 문명과 체제 유지 차원에서는 성행위를 금기시된다. 이는 노동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성과 죽음의 관계, 그 편린
“극단적 사랑의 충돌은 죽음의 충동과 다르지 않다”
바타유는 성과 죽음은 대립적으로 보이나, 실제로 맞닿아있다고 보았다. 천재 작가 사드 후작은 성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 했지만, 바타유는 섹스를 작은 죽음이라고 보았다. 섹스를 할 때 인간은 에로티즘을 통해 역설적으로 죽음까지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인류사에 흩어진 에로티즘의 편린을 모아보자. 죽음을 느낄 때 에로티즘을 느끼기에 사냥과 고대 전쟁은 금기를 위반해 에로티즘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기도 했다. 종교의 영역에서는 희생제의를 통해 살해의 금기를 위반한다. 희생제의를 통해 존재의 연속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성관계를 전제로 하는 결혼은 바타유의 입장에서 위반일 수밖에 없다. 희생제의처럼 결혼은 사회가 허락하는 위반이기에 에로티즘이 덜 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에로티즘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시간을 갖고 서로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타유는 고대 축제인 디오니스제에 주목했다. 통음난무의 시간, 금기 위반의 시간은 억압되는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고, 배출되지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바타유는 또한 매춘 역시 에로티즘을 경험할 수 있는 행위로 보았다. 또한 고대사회의 결혼을 보완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신성한 매춘과 오늘날의 천박한 매춘을 구분한다. 오늘날의 매춘은 금기가 엄존하는 사회에서 함몰에 빠진 여자는 자괴감에서 동물 이하의 수준으로 격하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박한 매춘을 통해서는 진정한 위반이 불가능하기에 진정한 에로티즘이 불가능하며, 진정한 에로티즘이 불가능하기에 신성의 체험 역시 불가능하다.
아름다움과 더럽히기
에로티즘은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하는 변별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바타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의 비밀은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데 있다.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소유하고 싶다고 여기는 것이고, 소유하고 싶다는 것은 더럽히고 싶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금기된 대상을 동물적으로 더럽혔을 때, 에로티즘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가 그렇듯) 즉, 평소에는 정숙한 신성이 유지되면서도 성행위를 할 때는 동물적인 면모가 커야 에로티즘이 증폭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