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신론자이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던 예수님의 말씀은 정언명령에 준하도록 믿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재림예수가 있다면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다. 재림예수는 남태령 고개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것이다.
2024년 12월 셋 째의 남태령 고개는 단순히 지리적 경계선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의 축도,그리고 인류애를 통한 단결을 보여주는 현장이 되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시위와 전봉준 투쟁단의 저항은 소외집단인 농민이 목소리를 내는 자리였고, 이는 본질적으로 무심한 권력과의 대치였다. 이와 동시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또 다른 모습의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점령과 억압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 분쟁과 폭력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진보적 관점에서 보건대, 만약 재림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의 발길은 강남 상권이나 교회 성소가 아닌, 남태령 고개의 차벽 앞이나 가자 지구에서 민중과 함께할 것이다.
이는 해방신학의 핵심 메시지와 깊이 상통한다. 해방신학은 예수의 메시지를 단순한 종교적 구원이 아닌, 억압받는 민중의 사회적, 정치적 해방의 선언으로 재해석한다. 예수는 갈릴리의 농민들과 어부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신의 정의를 드러냈다. 해방신학의 눈에는 신의 진리는 성전 안에서 기도하는 엘리트가 아니라, 농토를 빼앗긴 농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 폭격에 무너진 집을 바라보는 난민과 함께한다. 남태령 고개와 가자 지구는 바로 이 해방신학적 정의가 요구되는 장소들이다.
남태령 고개에서의 전봉준 투쟁단의 트렉터 대열 통제는 단순한 교통 체증이나 시위로 치부될 수 없다. 이는 경제적 평등과 농민권리를 외치며 권력에 맞선 역사적 저항의 현대적 표상이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받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트랙터라는 현대판 십자가를 지고 남태령 고개에 섰다. 예수가 다시 온다면 어디에 있겠는가? 남태령에서 차벽에 가로막힌 농민들의 옆자리에서 “칼을 쟁기로 바꿔라”는 선포를 할 것이다. 트랙터의 엔진 소리는 예수가 과거에 최소한의 생존권을 외쳤던 시대의 함성과 맞닿아 있다.
이 투쟁은 해방신학의 사상적 뿌리와 연결된다. 남미에서 기인한 해방신학은 빈곤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투쟁을 하나님의 활동으로 해석한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싸움은 단순한 경제적 불만이 아니다. 남태령 고개에서 성직자로 변모한 전봉준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투쟁은, 수많은 이들이 "이 시대를 구원할 메시야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현대의 십자가는 트랙터이고, 고난의 골고다는 수도권 진입의 차벽 앞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는 신학적 상징을 넘어, 분쟁과 억압, 포위 속에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민중들의 끊임없는 저항의 장소다. 정권과 점령의 피해를 받은 이곳의 민중들은 예수가 걸었던 예루살렘의 십자가 길을 매일 걷는다. 그들에게 재림 예수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먹을 물과 의약품,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동료다.
가자 지구에서의 억압은 신학적으로 단순히 도덕적 악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구조적 죄악이다. 해방신학은 이 구조적 악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을 성스러운 일로 간주한다. 예수의 죽음 역시 당시 제국주의적 억압 체제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해석된다. 만일 재림 예수가 가자 지구에서 다시 온다면, 그는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피해 살아남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이 시대의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외칠 것이다.
남태령 고개와 가자 지구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학적으로 동일한 맥락 속에 있다. 둘 다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보여주는 무대다. 해방신학은 이처럼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신의 정의가 드러나는 현장을 주목한다. 이 신학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폭로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적극적 하나님 나라 건설을 추구한다.
오늘날 우리는 "재림 예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종말론적 기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새로운 정의와 해방의 메시야는 남태령 고개에서 트랙터 옆에 서 있으며, 동시에 가자 지구의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있다.
우리 시대의 예수는 권력과 부유함의 중심이 아니라, 저항이 일어나고 억압받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곳에 함께한다. 이것은 해방신학이 남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재림 예수는 차벽 앞에서, 폐허 속에서 민중과 함께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이 고난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제, 여기서 만들어야 한다. 남태령을 넘어, 용산으로 가자. 가자 지구를 넘어 강탈당한 팔레스타인 영토로 가자.
나는 운동입니다
발 밑이 깜깜하도록
아무것도 안보일 때까지
달리는 바퀴, 아스팔트의
질주입니다
너무 빨라
숨이 막혀, 먼 데를 바라보면
옷벗은 나무가 지나갑니다
-<사랑에 대해서>, 《황색예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