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빨간 잉크』, 연두, 2018
책 표지가 인상적이다. 파란색으로 쓰인 빨간 잉크는 이 책의 기획을 상징한다. 한국에 슬라보예 지젝을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지젝의 농담을 빌려 서문을 시작한다. “빨간 잉크는 분명 거짓말을 뜻하지만, 빨간 잉크로 쓰인 편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빨간 잉크의 금지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이 ‘거짓’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진실’은 금지당한 빨간 잉크의 공백이기도 하다.”(P.6-7)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듯 보였던 2018년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엮였다. 4년 동안 써온 글들을 모은 것으로, 트럼프 당선, 극우의 부상, 반지성주의 현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다뤄진다. 시대가 거대한 전환을 맞이할 때, 이에 상응하는 비평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택광의 초기 저서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가 루카치의 리얼리즘 개념을 탐구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슬라보예 지젝과 자크 랑시에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서문에서 그는 이들과의 논의를 통해 책의 주제가 형성되었음을 밝히며 감사함을 표한다.
출간된 지 7년이 흘렀지만, 이 책이 던지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비정상’, ‘반지성주의’,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극우’라는 키워드는 오늘날 더욱 강한 현실감을 띠고 있다. 출간 당시보다 극우화 물결이 더욱 거세졌고, 정치적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시대 기록이 아니라, 예언적 성격을 띤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주의가 간과한 극우의 귀환을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를 빌려 분석하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저자는 이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이들의 개념을 통해 시대를 읽어내고자 한다.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글은 「트럼프는 무엇인가」와 「반지성주의」다. 이택광은 미국의 전후 자유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진단하며, 트럼프의 당선을 파시즘적 욕망의 분출로 본다. 트럼프는 미국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를 깨뜨리며,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한국 사회 역시 반지성주의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습득한 ‘먹고사니즘’이라는 경제주의적 판타지의 산물로 본다. (P.31) 이는 단순히 보수주의적 흐름이 아니라, 지식인에 대한 반감과 한국식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태도가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한편, 저자는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의 개념, 그리고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을 한국 사회에서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서발턴(사회적 주변부)의 대변인 역할을 할 지식인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미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논의를 빌려 보자면, 흔적이 뚜렷하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는 미미한 반딧불을 민중의 은유로 사용했듯, 유기적 지식인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존재는 미약할지라도.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2017년 바우만이 타계한 이후에 쓰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교훈」은 그의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 개념을 중심으로 근대성을 탐구한다. 바우만은 전기 근대를 ‘고체 근대’로, 후기 근대를 ‘액체 근대’로 명명했다. 저자는 그의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최근의 극우 세력 부상이 액체 근대의 흐름과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알렉산드르 두긴이나 마린 르펜처럼 ‘민족’을 내세우는 새로운 우익의 등장은 바우만이 말한 유동적 개인의 삶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바우만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액체성’을 통찰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저자는 바우만의 논의를 한나 아렌트의 ‘세계 없음’(worldlessness) 개념과 연결한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근대를 “세계의 퇴거와 인간이 거주할 거처의 상실”, 즉 ‘세계 소외’로 보았다. (P.113) 그는 바우만보다 아렌트가 더욱 근대적 소외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고 평가한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근대 사회의 문제를 지적했다. 세계 소외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결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를 초래한다. 이 무지야말로 일상적 악의 뿌리이며, 나치즘의 기원이 바로 ‘사유 없음’(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면서도, 저자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가 친나치 행보를 보였다는 점을 들어 사유하는 철학자가 반드시 윤리적이지는 않다는 모순을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장-뤽 낭시의 논의를 덧붙인다. 낭시는 아렌트처럼 ‘세계 없음’을 주요 문제로 삼지만, 그 원인을 ‘지구화’에서 찾는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와 낭시의 차이를 드러내는 저자의 분석은 흥미롭다.
저자는 세계적 담론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국내 남성 인사들이 보인 반응을 프로이트적 진보주의의 문제로 분석하며 비판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며, ‘여성 혐오’와 ‘조현병’의 관계를 탐구한다. 극우 커뮤니티인 ‘일베’에 대한 심층 분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는 2018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거대한 전환 이후,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극우의 부상이 더욱 거세졌고, 예외 상태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현실이 된 지금, 이 책이 던지는 문화비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시대를 통찰하고자 한다면, 훌륭한 문화비평서가 필요하다. 이택광의 사유가 담긴 『빨간 잉크』 한국의 문화비평서 중 으뜸으로 뽑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