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철,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현대문학, 2025
사물에 대한 글쓰기를 20여 년 동안 이어오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러 작가들이 사물을 다루는 글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깊은 사유를 글로 보여주지만, 안규철 미술가만큼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깊은 사유를 보여준 작가는 없을 것이다. 본인은 안규철 미술가 정도로 생각하지만, 한예종 미술원 명예교수이자 조각가, 그리고 수려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이전에 나온 사물에 대한 책인 《사물의 뒷모습》(2021)을 잇는 책이다. 단문이면서 깊은 사유와 본인의 삶에서 겪은 경험과 반성 , 그리고 단아한 산문으로 이뤄진 전작과 유사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책 제목 역시 이 글들이 사물의 그림자를 통해서 사물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붙였다고 한다. 책 제목은 파울 챌란의 시 <그대도 말하라>에서 따온 시이다. 책 중후반부에 실린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 실린 글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는 후배들을 위한 글을 쓰다가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마지막 구절 뼈 아프게 다가왔다고 말한다. "마지막 사람으로 , 그대의 말을 하라.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는 파올 첼란의 말을 젊은 시절에는 본인도 지키지 못 했다고 말한다.
짧은 단문으로 이뤄진 산문의 성채를 직접 읽어보길 바란다. 내용 대신 책에 실린 매혹적인 몇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어쨌든'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어째서'도 아니고, '어떻게'도 아닌, '어겠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어쨌든 나는 믿을 수가 없다.
-p.38
겨울 동안 그들이 없었더라면 적막했을 집 안에서
뜻밖의 꽃 선물을 누리면서, 한편으로 그들의 노력이 결실 없이 끝나리라는 것에 마음이 쓰인다. 그 꽃들 속에서 아무도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무명 화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p.96
집과 작업실 사이의 높이 차이는 약 8미터쯤 된다.그 높이에서 수직으로 추락한다면 빠가 부러지는 건 물론이고 간단히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 높이의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 또한 매 순간 목숨을 건 도전일 것이다. 계단이 없다면 매일 아침 작업실 출근길은 치명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그 절벽의 단차를 잘게 분할해 놓은 계단 덕분에 나는 걸어서 작업실을 오르내린다.그러나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언제든 돌이킬 수없는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작업실로 가는 길에는 물리적인 추락을 넘어 예술적 추락의 위험이 널려 있다. 그럼에도 도약과 비상의 가능성 또한 여기에 있기에, 매일 빈손으로 돌아오는 노동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p.104-105
지금 책상 서랍을 열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지우개를 꺼내보라. 당신이 잊었던 몽상과 실수의 세계,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호기심과 두려움과 열정으로 조금씩 다가서던 시절이 그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