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생각하는 연필』, 난다, 2014
권혁웅, 『생각하는 연필』, 난다, 2014
인문학의 꿈을 품은 작가라면, 장르와 형식을 불문하고 사물에 대한 글을 시도한다. 가장 유명한 사물에 관한 글은 발터 벤야민의 전위적인 에세이인 『일반통행로』를 뽑을 수 있고, 롤랑 바르트나 존 버거와 같은 창의적인 작가도 사물에 관한 사유를 진행해 글을 썻다. 한국에서도 사물에 관한 글을 써오는 작가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20여 년 동안 「현대문학」에 글을 기고해 온 안규철 미술가, 두 권의 사물에 대한 책을 쓴 함돈균 평론가 등이 있다. 다만 이 둘은 평론가의 시점으로 글을 쓰며, 시적인 산문에 가깝다. 그렇다면 시인이 쓴 사물에 관한 글은 어떨까? 권형웅 시인의 산문집
『생각하는 연필』은 독자들에게 사물에 대한 시인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히 사물의 외형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사물이 사람, 세계, 그리고 타 사물들과 맺는 관계를 탐구한다. 제목에 표방된 “감성사전”이라는 시리즈명답게, 감성과 사유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다. 권혁웅은 단추, 빵, 연필, 거울, 인형 등 21개의 사물을 주제로 하여 각각의 사물과 그것이 연결된 세계를 섬세하게 풀어내며 총 386개에 달하는 이야기를 엮어내었다.
이 책은 한껏 두터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가장 무겁고 복잡한 철학적 사유마저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가벼운 속도로 독자의 눈 앞에 펼쳐진다. 그의 글쓰기는 정확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으며, 다독과 다작으로 다져진 저자의 내공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짧은 문장들 속에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능숙한 필력이 돋보인다. 덕분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물이라는 주제가 가진 다층적 의미를 따라가며, 사유의 여정에 발을 들인다.
권혁웅은 이 책에서 자신의 사유를 “시작메모”이자 “산문시” 또는 “에세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흥은 단순히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복합적인 경험이다. 한 권의 책이지만, 이 안에는 수많은 책의 즐거움이 공존한다. 읽는 재미와 쓰는 즐거움, 그리고 보는 아름다움이 어우러지며 독자의 감각을 풍부하게 자극한다.
시를 습작해본 입장에서는 시작노트로 읽힌다. 의식의 흐름대로, 달리 말하면 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다른 사물에 관한 평론적인 글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어떤 글들은 사물에서 음담 패설에 가까운 응큼한 농담을 상상하기도 하고, 짝사랑에 빠진 멜랑콜리커의 시선에서 사물을 상상하기도 한다. 유치하면서도 쉽게 읽히면서도 많은 사유를 환기하게 해준다.
『생각하는 연필』은 사물들에게 단순한 단어 이상의 생명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자들과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권혁웅이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일 것이다. 권혁웅의 세 번째 감성사전, 『생각하는 연필』은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축복스러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