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유기적 지식인의 전범
들어가며: 실천 철학의 계승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처럼 곡해되어 인용되는 사상가가 있을까? 레닌이 일방적으로 악마화된다면, 그람시는 진보 진영에서는 시민사회론으로, 우익들에게는 네오마르크스주의(?)라는 해괴한 사상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그람시의 표현으로, 기동전은 없지만 꿈틀거리는 시대, 그의 사상은 오래된 미래가 되어 가야할 길을 알려줄 것이다.
그람시는 열악한 배경과 신체적 장애를 딛고 마르크스주의를 독창적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다. 그는 투옥된 상태에서도 『옥중수고』라는 방대한 글을 남기며 현실 정치와 이념의 관계를 재해석했고, 그의 작업은 오늘날 학문, 정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강력한 도구로 여겨진다. 그의 주요 개념인 헤게모니, 진지전과 기동전, 유기적 지식인은 당대의 맑스주의를 수정하며 구조와 주체, 억압과 저항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동전이 정체된 사회에서,. 그의 사상은 여전히 유의미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람시의 주요 사상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며, 이러한 사상이 현대 사회에 가지는 함의를 탐구하고자 한다. 여러 텍스트를 참고했는데, 그의 사상을 조망한 책인 『안토니오 그람시』 (살림, 김현우, 2006)를 참고했다. 믿고 보는 살림 지식총서답게, 거시적인 큰 틀에서는 동의한다. 그 외 노동자연대에서 나온 크리스 하먼의 소책자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와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의 그람시 파트, 『한국 NGO의 사상과 실천』 등을 참고했다.
1. 헤게모니: 권력을 넘어서 문화로
그람시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공헌 중 하나는 "헤게모니" 개념이다. 그람시 이전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권력을 경제적 구조와 물질적 기반으로 간주하였으나, 그람시는 이를 넘어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강조했다. 헤게모니란 단순한 억압적 지배가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규범과 세계관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지배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주도성이다. 플레하노프가 주창한 헤게모니 개념을, 그는 확장시켜 다층적인 문제로 발전시켰는데, 특히 시민사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통해 이러한 권력의 작동 과정을 탐구했다. 시민사회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여기서 지식, 문학, 종교, 교육 등은 지배적 질서를 강화하거나, 대안적 질서를 모색하는 싸움터가 된다.
오늘날 헤게모니의 개념은 신자유주의와 문화적 소비주의를 분석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현대의 미디어 플랫폼은 자유와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시장 중심의 가치관을 자연화시키며 소비주의적 활동에 동참하도록 한다. 넷플릭스, 유튜브, 소셜 미디어에서의 콘텐츠 소비는 그람시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지배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억압만이 아니라, 저항의 가능성도 내포한다. 대안적 가치의 발굴과 창조를 통해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헤게모니는 후대 비판 이론가(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들이 암울하게 진단하거나, 관념적인 낙관으로 해석한 에리히 프롬과 달리, 볁증법적 유물론적이고 실천 철학의 층위에서 사유한다. 언제나 '혁명의 현실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진정한 (그의 용어를 빌려) 실천철학이다.
2. 유기적 지식인: 혁명 정당의 혁명가
그람시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유기적 지식인"이다. 그는 단순히 학문적 연구나 정신적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지식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학술적 지식인, 혹은 부르주아 지식인일뿐이다. 오히려그람시는 특정한 계급 또는 사회 세력에 뿌리를 두고,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실질적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유기적 지식인"이라 정의했다. 감옥에서 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옥중수고』 에서 쓴 '유기적 지식인'이란 사실 혁명 정당의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이란 말에 단지 '인텔리' 혹은 엘리트 정도만 생각할 수 있는데, 대중의 상식 속에서 사회주의의 양식을 이끄는 유기적인 존재들이다. 특히 노동 계급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들 속에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혁명가이다. 공허하게 들릴 수 있는 혁명가라는 단어보다, 오히려 대중 속에서 대중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명칭이 진정으로 혁명 정당의 활동가들을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들 중에서, 서방의 사르트르,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슬라예보 지젝 / 한국에서는 리영희, 백낙청, 홍세화 등 수많은 진보 지식인들 혹은 참여 지식인들이 있을 지라도, 진정한 유기적 지식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기적 지식인이 사멸해가고 진보적-참여적 지식인이 많은 상황에, 혁명에 헌사한 그람시의 삶은 유기적 지식인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3. 진지전과 기동전: 혁명 전술의 이원론
그람시는 정치적 투쟁을 "진지전"과 "기동전"이라는 두 가지 전략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기동전은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승리를 목표로 하는 전술적 투쟁을 의미하는 반면, 진지전은 장기적으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구축하며 체제의 심층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접근이다. 그람시는 마지막 성공한 진지전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봤다. 이는 그람시가 죽은지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맞는 이야기이다. 그람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의 성공은 단기적인 기동전이 아니라, 시민사회를 장악하고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진지전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진지전에서 필요시 기동전으로서의 전환을 강조한다. 진지전만을 강조하는 것은 개혁주의와 대리주의로 나가기 쉬우며, 결정적인 순간 혁명가들은 기동전의 전위에 서야 한다.
4. 현대 군주론: 대중과 리더십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전설적인 고전 『군주론』을 참고하며, 현대적 지도자 또는 정치 조직이 대중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구축하는 방법에 대해 사유했다. 그람시의 "현대 군주"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대중적 동의를 끌어내고 조직화된 행동을 이끄는 정당 또는 조직을 의미한다. 특히, 그는 지도자가 대중의 피동적 수용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과 상호작용하며 헌신적인 혁명 주체로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논쟁에서 그람시의 이론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그람시의 현대 군주론이 강조하는 "지속 가능한 지도력"은 대중을 소비자로 대하지 않고, 능동적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변혁적 공간을 창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며: 오늘날 그람시 읽기의 의의
그람시의 사유는 체제 안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혁명의 장기적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또한 파시즘의 희생자이자, 평생을 혁명에 바쳤다는 점에서, 후대 혁명가들의 모범이 혁명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다중위기-기후 위기, 전쟁, 극우화 등과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이러한 문제를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등 처럼 맹동주의 자세로 싸울 것이 아니라,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장기적이고 진지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의 유기적 지식인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변화를 이끄는 촉매가 될 수 있다. 물론, 약점도 있다. 혁명가 크리스 하먼의 말대로, 그람시는 마르크스 전통의경제 분석-특히 제국주의론-이 비어있는다고 말한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에 버금가는 거인은 아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더불어 헌신적인 혁명가이자, 독창적인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이론가이다.
그람시의 사상은 단순히 역사적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복잡한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 혁신적으로 대응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도구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람시와 교류했던 프랑스 시인 로맹 롤랑 말을 빌려 "이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실천하며, 다중 위기라는 현실 속에서도 아르고로호의 선을 이끌어야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