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떠나간 시대의 서사시로서의 하루키
표면적으로 보면 술, 섹스, 그리고 오컬트로 상징되는 하루키 소설 세계는 후기자본주의의 타락한 초상이다.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적응한 소시민의 오컬트적 여정을 다룬 하루키의 소설은 루카치의 소설론-신이 떠나간 시대의 서사시-에 부합한다. 그러니 문화비평의 시선에 기대어 하루키 소설을 정의한다면, 부르주아의 서사시이자, 한편으로는 좌절된 중간 계급의 판타지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허무함의 표상이다. 그러니 물집적 궁핍보다 정신적 궁핍으로 대표되는 실존적 고뇌 속에서 술과 섹스로 일시적 해방을 탐닉하나, 허무의 굴레 속에서 탈주는 불가능하다.
중간 계급 판타지의 표상
하루키 소설의 인기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하루키는 소설 속 주체와 거리가 가깝다 못해 합일되어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 《상실의 시대》등 초기작에서 두드러지는데, 자신의 고뇌와 실존적 방황이 탈주할 수 없는 자의 슬픔으로 표현된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90년대 초부터 하루키의 인기는 거대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로서, 경제적 풍요가 극에 달하고, 자본주의의 신화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90년대 청춘의 문화상표이기도 했다. (*물질 문명의 타락을 표상한 유하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잘 보여준다.)
하루키는 자본 속 탐욕의 항해를 방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주는데, 여기서 그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분명 불쾌하고 매력적이지 않은 문제적 개인의 방황으로, 청춘의 방황을 합리화하거나 그러한 탈주의 욕망을 대리해준다.
페미니즘과 하루키즘
한편 하루키의 소설을 두고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작품 속 여성주의가 부족하다는 지적인데, 이해할 수 있지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다. 하루키 소설 구조에서 여성은 주체라기보다 남성 주체의 서사를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 이는 하루키가 남성 작가라는 점, 소설이 한 시대의 슬픈 표상임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다만 그의 소설에는 성적 대상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에로티즘을 주요 서사의 주제로 가져가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섹스는 늘 건조하게 느껴진다. 특히 그의 소설에는 성녀/창녀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의 하루키 비판은 이해할 측면은 있지만, 그의 소설은 해로운 남성성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하루키는 여성주의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수용해 사과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의 용어로 치자면 하루키 소설에 드러나는 남성성은 분명 해로운 남성성은 아닌데, 남성 작가라 드러나는 해롭지 않은 남성성마저도 여성주의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분명 그는 한 시대의 주요 담론보다 한 단계 선진적인 담론을 따르는 소설가의 윤리를 따르는 착한 사람-윤리적 개인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