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사회 개혁의 진정한 목적은 혁명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김경미 송변현역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잘못된 경향과 충돌하면서 발전해왔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잘못된 정치 경향은 때마다 다르다. 레닌의 경우도 시기별로 다양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경제주의와 논쟁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에서는 초좌파들과 치열하게 논쟁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이하 ‘로자’)는 1899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맞서 싸우고자 글을 쓰며 논쟁했다. 젊은 로자는 1898년과 1899년 사이 <라이프치히 인민신문>에 연재되었던 글을 쓰며 당대 엥겔스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베른슈타인과 논쟁했다. 고전인 만큼 읽는 데 있어 어려울 수 있다. 당대 세부적인 역사, 익숙하지 않은 인명과 지명들, 용어의 생소함이 장애물로 다가와 초심자가 의지로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독서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로자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할 만한 저서인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 당대 독일 사회민주당의 상황
우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등장은 당대 사회민주당에서 돌발적인 행동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 정책으로 탄압받다가 1890년 총선에서 약진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받자 급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런 징후는 정치적으로 온건화, 우경화되었으며, 이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 부르던 카우츠키 역시 이론적으로 혁명을 말하나, 실천적으로는 온건화되었다. (결국 로자와 베른슈타인의 논쟁에서는 로자의 편을 든다) 마르크스21에 수록된 김인식씨의 글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사회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때 사회주의는 “힘의 문제며, 의회에서는 달성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사민당 지도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1891년에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의회 제도는 대중의 대표체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국의회에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의회 제도의 결점 때문이 아니다. … 목표에 도달하는 다른 길이 있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 달라!”
그런 와중에 엥겔스의 정치적 후계자인 베른슈타인은 엥겔스가 죽자 바로 수정주의 노선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대 사회민주당 내 잘못된 흐름의 반영이나, 제대로 토론되지 않았다. 그러자 러시아 출신 독일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라 파르부스가 먼저 논쟁을 시작했고, 그다음에 젊은 열혈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논쟁을 시작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생애는 토니 클리프가 쓴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와 사상』에서 잘 요약하고 있지만, 간략히 그녀의 삶을 정의한다면 위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요, 기계론과 숙명론에 맞선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좌파 진영 전반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람시만큼 곡해에 시달리는 혁명가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도, 개혁주의, 초좌파들도 모두 그녀를 본인 뜻대로 곡해한다. 스탈린주의의 경우, 스탈린이 직접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두고 연속혁명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비난했다. 그러니 말로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치켜 세우지만, 정치적으로는 로자와 스탈린의 정치는 단절되어있다. 주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스탈린의 기계론에 맞섰다는 것을 강조해 선거 참여를 통해 사회변혁을 주장했다고 말하거나 (한국에서는 장석준이 대표적인데, 이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정확히 거꾸로 해석한 것이다), 자발성에 중점을 맞춰 반레닌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가도 그렇게 보는 듯 한데, 로자를 초좌파주의자로 곡해하는 것이다.)
즉, 로자는 스탈린주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개혁주의)에 모두 반대했고 당연히 아나키즘이나 초좌파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이 글은 당시 우경화되는 당대 사회민주당과 기 그 경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맞선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투혼이 살아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방법론 비판: 비변증법적인 기계론
1부에서는 베른슈타인의 방법론을 비판한다. 로자가 묘사한 베른슈타인은 해괴한 기계론에 빠져있는 듯하다.
“잘 알다시피 사회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세 가지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몰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경제의 증가하는 무정부성, 둘째 미래 사회 질서의 긍정적 맹아를 창출하는 생산 과정의 사회화의 증대, 셋째 다가올 변혁의 실천적 요소를 형성하는 프롤레탈리아의 증가하는 힘과 계급의식이 그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제거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지주 가운데 첫 번째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 발전이 전면적인 경제 붕괴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단지 자본주의 몰락의 특정 형태를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몰락 자체를 기각한다.”
p.21-22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이, 베른슈타인의 가장 큰 문제는 비과학적인 낙관으로 자본주의가 몰락하지 않으므로 의회 내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뤄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것은 변증법의 기본인 양질전환을 망각한 오류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붕괴가 불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당대 독일 자본주의의 전성기와도 맞물려 있는데, 베른슈타인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니 수정주의로 퇴보한 것이다.
경제발전과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의 비변증법적 관점은 경제 분석에서도 중대한 오류가 생긴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부에 참여하게 하는, 즉 가난한 자들을 부자로 만드는 계획에 이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p.78) 베른슈타인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로자의 요약에 따르면 이것은 경제적 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을 통해서이다.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산업 이윤을 억제하려고 하며, 협동조합을 통해서 상업 이윤을 없애고자 한다. 로자는 이것을 두고 “자본주의의 경제에서 교환은 생산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무자비하게 착취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교환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정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높이고, 시장 상황에 따라 노동을 줄이거나 늘이며, 또 판매 시장의 요구에 따라 노동력을 해고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본주의 기업을 경쟁력 있게 만들어야 하는 필연성에서 나타난다. (p.79) 라고 말한다. 즉, 로자는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인지했지만, 베른슈타인은 이를 망각한 듯 하다.
또한 로자는 자본주의 생산구조에 있어서 기계론적인 분석을 배제한다. 베른슈타인의 경제학 분석이 사회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기 위한 기초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본가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에서 소유관계로 옮겨놓고 ‘기업 대신에 인간을 말하고’ , 또 사회주의의 문제를 생산 영역에서 재산 관계 영역으로, 다시 말하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빈부의 관계로 옮겨 놓고 있다.” (p.71) 즉,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분석은 과학적이며, 스탈린주의자들을 비롯해 좌파 진영 일각의 공통된 견해인 생산관계의 사적 소유-자본주의, 국유화-사회주의를 배격한다. 로자의 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비판을 하기 위해 저술된 이 책은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스탈린주의자들에도 유효하다.
로자는 “기계적이고 비변증법적인 같은 관점은 더욱이 베른슈타인이 위기의 부재를 자본주의 경제의 ‘적응’ 징후로 간주하는 메커니즘이 교란된 상태이며 따라서 이것이 종식되면 그 메커니즘은 순조롭게 작동할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상 위기는 그 말의 고유한 의미로 ‘교란’이 아니다. 아니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전체가 제대로 영위하는데 꼭 필요한 교란이다.”라고 말한다.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오늘날 사민주의(개혁주의)는 오늘날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나, 룩셈부르크의 분석은 비변증법적인 잘못된 경향이 서로 매우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회전술과 국가론
로자 룩셈루르크는 결코 초좌파적인 인물이 아니며, 이 책 역시 맥락에서 쓰이지 않았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제목은 역시 양자택일이 아니다. 물론, 로자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밝히며 그 혁명을 부정하는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당 내 분위기를 비판한다. 심지어 베른슈타인은 혁명이 너무 빨리올까봐 시기 상조를 운운하며 걱정하기도 하는데, 이것에 대해 로자는 강력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프롤레탈리아는 국가권력을 ‘시기상조’와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에, 달리 말해서 결국 프롤레탈리아가 국가권력을 지속적으로 쟁탈하기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 ‘시기상조일 때’ 탈취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시기상조의’ 권력 장악을 반대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력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p.105)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의회를 통한 개혁 전술을 배제하지 않는다. 분명 로자는 거대한 변혁이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에 찬 한 번의 타격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라고 밝힌다. (p.104) 이러한 견해는 블랑키주의적인 견해라고 말하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과 자신감이 발전해야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과정에서 의회를 비롯해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요소들은 생략하거나 배제할 것들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무하고, 민주주의적 요소를 확대해야 계급투쟁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즉,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술은 당연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블랑키주의 등 잘못된 초좌파적 경향을 배제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대 국가 역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당대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 팽배했던 군국주의를 비판한다. 당시 국가와 자본의 상호 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특징중 군국주의 형태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로자는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카우츠키와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문제가 되는 카우츠키 특유의 괴상한 평화주의(초제국주의론)와 달리 “전쟁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p.49)라고 말한다. 로자는 국가와 자본을 별개로 보지도, 그렇다고 국가를 단순한 상부구조로도 보지 않고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의 이정표
이 책은 단지 청년 룩셈부르크의 포부가 담긴 출사표뿐만 아니라, 레드 로자의 하늘을 개척한 저작이다. 훗날 유명한 『대중파업론』, 『정치경제학 강의』, 『자본축적』 등 주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여한 저술을 남긴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한국에서는 이 책의 영어본이 과거 부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가 2002년에 들어서야 두 명의 로자 학회원이 독일어 원어 번역을 마쳤다. 책세상 번역본답게 번역의 질 자체는 좋으나, 해설은 아쉬움이 남는다. 번역가도 스스로 우려했듯이, 로자를 레닌과 대비되는 ‘반레닌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레닌과 로자는 서로 동지였고, 로자는 레닌에 비해 이론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다. 제국주의론이나 민족문제에서 레닌만큼의 기여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동지였고, 레닌이 그랬듯이, 로자 역시 『대중파업』을 통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측면으로 보았다. 결정적으로 ‘당이론’과 ‘제국주의와 민족문제’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결국 레닌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당이론도 완전히 다르지 않다. 로자는 결코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으며, 혁명적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둘의 논쟁은 혁명적 조직에 있어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인식 차이와 혁명적 조직의 지도 방향에 대한 차이였다. 반레닌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로자도, 레닌도 동의하지 않을 호칭이다. 그 외에도 로자의 생애 역시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 번역서를 다루는 책세상의 문고의 한계이기도 한데, 당시 독일 사민당에서 강사 경력이나 혁명적 신문 「적기」에 대한 부분 역시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책으로 로자를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 토니 클리프가 쓴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등 개론서가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혁명가들에게는 레닌뿐만 아니라, 로자 역시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과 혁명적 전통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윤석열 퇴진 운동 내에서 제기되는 오류 중 상당수가 개혁주의적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로자의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의회 참여를 통한 사회 개혁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민주당이 요구하는 이상의 요구를 외쳐야 하며 민주당과 정치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친민주당 계열이든, 비민주당 계열이든 민주당에 거슬리는 행보를 안하려고 한다. (물론, 극소수의 혁명 좌파 조직은 추상적인 선전을 하는데, 이것 역시 대중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로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이러한 문제는 결국 개혁주의가 운동 조직에 스며든 현상이다. 진정으로 사회 변혁이 가능하려면, 사회개혁에 그칠 것이 아니라 대중 혁명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100여년 전, 죽은 레드 로자가 우리에게 주는 거대한 교훈이다.